"옛날 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는 이렇게 해선 안 된다'는 식이었고, 전체주의자의 명령은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는 이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는 식이네."(조지 오웰의 <1984> 中)
도시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숨어 있다. rfid(전자태그·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라는 추적 시스템은 생활 전반에 침투했다. 지문, 홍채와 같은 생체 인식 기술을 통해 출입하는 사업장도 갈수록 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이미 현실이 되었는가? 데릭 젠슨과 조지 드래펀이 쓴 <웰컴 투 머신>(신현승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을 읽다보면 선뜻 '아니요'라고 할 수 없다.
판옵티콘이 된 세상, 종교가 된 과학
현대 과학기술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웰컴 투 머신>은 18세기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을 언급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판옵티콘은 죄수를 손쉽게 감시하도록 고안된 원형 감옥이다. 어두운 중앙의 감시탑을 중심으로 죄수의 밝은 방을 배치하면 간수는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죄수는 간수의 보이지 않는 시선 때문에 늘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므로 외적 강제가 없이도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게 된다.
이 책은 1970년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말을 빌려 "판옵티콘은 바로 현대 문명을 뒷받침하는 권력"이라고 단언한다. 오늘날의 첨단 과학기술은 바로 이 권력이 유지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 "기술은 권력자가 통제한다. 이는 곧 권력자만이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음을 뜻한다. (…) 반면에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은 권력자의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
이 책은 더 나아간다. 권력과 과학기술이 결합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가치 전도가 일어난다. '인간을 위한 과학기술'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위한 인간'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중세시대 신의 지위에 지금은 과학기술에 올라섰다. "오늘날에는 과학이 종교이고, 전문가가 사제이고, 관료는 문지기이고, 연구개발 단체는 성당이다." 중세시대 교회에서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과학 밖에는 지식이 없다', '기술 밖에는 편안함이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기계에 거부권을 행사하라…기계와 헤어지라
명상을 위한 잠언과 고발을 위한 르포를 넘나드는 <웰컴 투 머신>을 읽다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계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런 반론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한 가지는 "기술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거나, 그 사용법을 선택하거나, 혹은 우리 삶에서 기술이 차지하는 영향력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인간이 기술을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기술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 기술과 헤어지는 것"이다. <웰컴 투 머신>은 단호하게 후자 쪽에 선다.
"(기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직 힘을 가진 자만이 문명의 모습과 발전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어떻게 내가 무인 항공기 '프레데터(predator)'의 진화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거리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4000만 대의 cctv 이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내가 생체 인식 기술이 도입된 여권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사회의 권력 관계 자체를 전복하지 않는 한 이미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방향이 설정된 과학기술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지금 과학기술에 대응하는 방법은 어떤 방법이 있을까? 18세기 산업혁명 당시 흑인 노동자 존 헨리는 일자리를 잃는 것을 염려해 증기기관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죽도록' 일했다. 헨리는 결국 동맥이 파열돼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러다이트가 대안일까? "러다이트는 판옵티콘의 중심부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목을 매달기 전에 몇몇 기계들을 때려 부셨다. 그들은 이렇게 소리쳤다. 기계와 하나가 되어라. 그러면 당신은 죽을 것이다. 기계를 파괴하려고 애써라. 그러면 권력자가 당신을 죽이려고 안달할 것이다." 이런 러다이트 역시 대안이 아니다. "힘으로는 결코 기계를 이길 수 없다."
이 책은 그 대신 문제의 개념을 재정립할 것을 제안한다. "더 나은 쥐덫을 만드는 대신 우리가 쥐를 덫으로 잡고 싶어 하는지부터 물을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웃, 인간 이외의 생명체, 그리고 대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기계를 멈춰 세울 수 있을까? 초콜릿 중독이 필연적이지 않듯 원자력 발전소와 자동차와 폴리염화비닐 역시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 扮)가 컴퓨터 프로그램이 마련한 환상을 거부한 순간 진짜 세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기계에 거부권을 행사하라는 것이다. "영화 속 매트릭스를 떠난 사람은 칙칙하게 황폐해진 세계에 (…)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한다. (…)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매트릭스, 판옵티콘, 메가 머신과 시스템의 세계를 떠날 때마다 단조로움이 아닌 황홀한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매트릭스 밖 찬란한 세상의 문을 열어라."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기술'은 불가능한가?
<웰컴 투 머신>의 저자들은 신러다이트(neo-luddite)라고 불릴 법하다. 이 책은 현대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성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성찰이 당장 개입이 필요한 긴박한 순간을 놓치는 '눈가리개'가 돼서는 곤란하다. 그들의 주장처럼 대부분의 과학기술은 이미 특정한 방향으로 경로가 설정돼 있지만, 새로운 과학기술은 이렇게 경로가 설정되기 전에 개입할 여지가 있다.
이 책에서 이미 권력을 위한 최악의 과학기술로 묘사된 생명공학, 나노기술이 그 예다. 이미 권력자의 것이 됐다고 체념하는 순간 이 과학기술의 산물은 더욱더 삶을 옥죄는 올가미로 기능할 수 있다. 당장 과학기술부가 매년 실시하고 있는 기술영향평가는 최근 나노기술, rfid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무관심 탓에 이런 기술영향평가는 해당 기술에 대한 '면죄부'로 역할을 하게 생겼다.
<웰컴 투 머신>과 진단은 비슷하되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기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진보의 패러독스>(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 편, 당대 펴냄)를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 데릭 젠슨이 낯익은 이들이 많을 듯하다. 맞다! 작년에 번역돼 새로운 글쓰기 교과서로 화제가 됐던 <네 멋대로 써라>(김정훈 옮김, 삼인 펴냄)의 괴짜 글쓰기 교사와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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