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기지 반환이 줄줄이 예정된 상황에서 반환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후속 조치가 큰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반환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실태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도 미국 측은 환경오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만 지겠다며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협상의 큰 흐름은 우리 정부가 결국 환경오염 치유 비용의 상당 부분을 대는 방향인 것으로 알려졌다.
〈프레시안〉은 녹색연합과 함께 5회에 걸쳐 반환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관련 쟁점들을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녹색연합은 수년간 미군기지의 환경오염을 추적해 이 문제를 쟁점으로 부각하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 기획의 마지막으로 지난 20여 년간 필리핀 미군기지 반환 과정에서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온 필리핀 미군기지정화위원회 뮐라 발도나도(Myrla Baldonado) 사무총장의 기고를 게재한다. 〈편집자〉
지금은 필리핀에 반환된 클락 공군기지와 수빅 해군기지는 필리핀 상원에서 사용 연장안이 거부됐던 1991년까지 해외에 있는 가장 큰 미군기지 중 하나였다. 반환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필리핀 미군기지에서 심각한 환경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은 미군기지 환경오염에 대한 정화 책임은 부인하고 있다.
이렇게 미국이 정화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 일본의 '주둔군 지위 협정(SOFA)'처럼 1947년에 필리핀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군사기지 조약(MBA)'에 정화에 관한 조항이 누락돼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핀 정부는 미국이 기지를 반환할 때 정화의 의무가 없다는 조항을 내세워 결국 오염 정화 책임을 묻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필리핀 정부의 무능력이 미국의 책임 회피 낳았다**
미국 국방부는 해외에서의 환경보호에 관한 원칙을 1995년에 발표하기 15년 전인 1979년에 이미 해외에서 미군이 주둔할 때 해야 할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행정명령을 발표한 적이 있다. 물론 해외에서의 기준은 미국 국내법과 비교했을 때 훨씬 느슨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예산도 제한돼 있고 기본적인 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군사시설을 주둔국에 반환할 때 정화 비용을 지원하지 않기로 한 점이다. 미국은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험을 초래한다고 알려진 오염(KISE)'이 증명된 경우에만 정화하기로 했다.
이렇게 미국이 미군기지 환경오염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수단을 확보해 놓는 동안 필리핀 정부는 환경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필리핀 정부는 클락 공군기지의 폐쇄와 연장안을 거부할 때까지도 환경오염 문제를 제기하는 데 실패했다. 심지어 수빅 해군기지의 폐쇄 전에는 필리핀의 NGO가 정부에 환경오염 문제를 거론할 것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필리핀 정부는 기지가 반환된 지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미군기지에 심각한 환경문제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나마 미군기지정화위원회(the People's Task Force for Bases Clean-up)와 같은 필리핀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한 여론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미군기지의 환경문제를 인정해 놓고서도 정부는 더 이상 미국과 협상을 하려 하지 않는다. 2000년 이전까지 불규칙적으로나마 진행돼 왔던 협상은 지난 5년간은 완전히 중단됐다.
미군기지 인근에서 거주했던 사람들이 죽고, 정부의 조사 결과 거주했던 주민들의 혈중 유해 화학물질 함유 수치가 높다는 사실이 확인돼도 정부는 이것을 협상의 계기로 삼거나 협상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환경단체가 오랫동안 조사한 결과를 정부에 수차례 제출했으나 이 역시 묵살됐다. 돌이켜보면 지난 15년간 필리핀 정부는 오염 피해자가 사망해 반대 여론이 들끓을 때 잠깐 협상을 하는 것 같은 시늉을 하다가 미국의 군사, 무역, 투자 지원을 핑계로 금세 협상을 중단하곤 했다.
협상 과정에서 미국 관계자가 애매한 발언이나 약속을 한 경우가 몇 번 있었지만 이후 추가 조치는 전혀 없었다. 환경단체가 이런 발언과 약속의 배경을 추적하려 해도 대부분의 협상 내용이 일반에 공개하지 않아 필리핀 정부와 미국에 책임 추궁을 할 수도 없었다. 1999년에는 미국이 환경과 건강에 관한 상호 협약을 맺고 필리핀의 환경보호를 위해 여러 가지 기술,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기지 오염문제는 제외됐다. 필리핀 정부의 한심한 태도가 결국 미국이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두 얼굴'을 폭로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정부 역시 앞으로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지만 아직까지는 환경오염 정화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추궁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 정부는 안전한 환경을 유지하고, 반환 이후 지속 가능한 개발을 추진하기 위한 중요한 기회를 맞을 수 있다.
SOFA 환경 조항의 개정은 미국의 해외 미군기지 환경가이드뿐 아니라 미국 국방부도 가입된 스톡홀름 협약(1972)과 세계자연헌장과 같은 국제법에 호소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실질적인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해외 미군기지의 정화에 관한 전례를 조사해 KISE 기준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현재 필리핀의 실패한 협상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아니면 자주권에 기반을 둔 정치적 의지를 천명함으로써 국내와 국외 환경오염 문제에 이중적인 처신을 보이고 있는 '미국의 두 얼굴'을 폭로할지 기로에 서 있다. 한국 정부가 제 역할을 해낸다면 필리핀과 같은 미군기지 환경오염으로 고통 받고 있는 다른 나라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의 시민단체 역시 미국의 해외 기지와 시설의 정화 책임을 인정하는 더 강한 압력을 가할 수 있도록 국제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한국 국민 대다수가 미군이 정화하는 것을 원한다는 여론을 이용하여 한국 정부가 강력하게 협상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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