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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부'가 밥 먹여준다는 '환상'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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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민주정부'가 밥 먹여준다는 '환상' 버려라"

[인터뷰] 김명인 '황해문화' 주간 "세계화 싸움 절박하다"

인천 새얼문화재단이 발행하는 〈황해문화〉가 1993년 창간호를 낸 지 13년 만에 제50호를 출간했다. 이 잡지는 최근 한국 사회의 방향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오고 있다. 민중의 생존권과 공공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외면한 한국 사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잡지가 제50호 전체를 이 땅의 바닥에서 살아가는 50인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할애한 것도 이런 인식 탓이다.

1999년 〈황해문화〉에 합류한 뒤 이런 방향을 모색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편집주간 김명인 인하대 교수(국어교육과)를 만났다. 김 주간은 1987년 '지식인 문학의 위기와 새로운 민족문학의 구성'으로 이른바 '민족문학 주체논쟁'에 불을 지폈던 당사자다. 그는 1990년대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오랜 칩거에 들어갔다 1990년대 후반 활동을 재개했다.

김명인 주간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나오면서 민주화와 정권교체가 곧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던가를 확인했다"며 "이젠 형식적 민주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어떻게 저항할지를 절박하게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인터뷰는 11일 광화문 인근 음식점에서 약 2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수년간 구체적 현실 모색…이제 가닥 잡았다**

프레시안 : 〈황해문화〉가 13년 만에 제50호를 냈다. 개인적으로 감회가 각별할 것 같다.

김명인 〈황해문화〉 편집주간 : 감회가 각별한 사람은 나보다는 〈황해문화〉를 발행하는 새얼문화재단의 지용택 이사장일 것 같다. 어렵게 13년을 꾸려 온 〈황해문화〉가 소박한 지역지에서 출발해 지명도가 있는 전국지가 됐으니 처음 창간을 제안했던 지 이사장 입장에서는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더구나 그간 〈황해문화〉가 진보적인 색채를 보일수록 인천의 보수 인사들의 불만이 상당히 높았다. 그런 불만을 지 이사장이 고스란히 다 막아냈으니 지금의 〈황해문화〉가 있게 한 1등 공신은 지 이사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한 편집위원들이야 그렇게 든든한 바람막이가 있으니 다른 거 생각하지 않고 내용만 고민하면서 하나하나 쌓아 올리다 보니 벌써 50호가 됐다. 나는 1999년부터 〈황해문화〉에 합류해 반 정도에 관여했다. 그 동안 석 달에 한 권씩 꼬박꼬박 〈황해문화〉를 내면서 점점 인지도, 영향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들이 높아져 개인적으로 보람찼다.

프레시안 : 김명인 주간은 1990년대 오랫동안 공식 활동을 않다가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공식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 시점이 〈황해문화〉에 합류한 것과 맞물린다. 문학을 하는 김 주간 입장에서는 〈창작과비평〉, 〈당대비평〉같은 잡지에 관여하거나 다른 활동을 생각해 봤을 법도 한데….

김명인 : 〈황해문화〉의 창간 주간이던 최원식 인하대 교수(국어국문과)가 마침 1998년 박사 학위를 받은 나를 지용태 이사장에게 추천했다. 나는 당초부터 〈창작과비평〉이나 〈문학과사회〉 같은 문학적 에꼴(ecole)에 들어가서 뭔가를 할 생각이 없었고, 전공인 문학과 관련해서 발언을 하기에는 아직 정리가 안 끝난 시점이었다. 그래서 〈황해문화〉를 통해 세상을 읽어나가면서 현재 진행되는 움직임들을 살펴보고자 했다. 〈황해문화〉를 통해 조금씩 시선을 펼쳤다 모아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생각이 정리돼 최근엔 전반적인 상황을 좀 거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훈련이 된 것 같다.

***세계화에 어떤 입장 가질 것인가…이젠 '환상'에서 깨어나야**

프레시안 : 최근 몇 년 동안 나온 〈황해문화〉를 훑어보면 재작년(2004년)까지는 중점을 두는 내용이 굉장히 구체적이고 다양했는데 작년(2005년)부터는 한국 사회의 방향에 대한 큰 그림을 제시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명인 : 맞다. 수 년간은 개별 현장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문제적 상황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는 데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인천에 기반을 둔 〈황해문화〉의 성격에 걸맞게 중국, 일본, 베트남과 같은 주변 나라들에 대해서도 간략한 정리를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금 한국 사회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편집위원들 내부에서도 조금씩 견해가 모아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세계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어떻게 하면 시장 중심의 세계화가 전면화 되는 이때에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프레시안 : 연말에 〈경향신문〉에 기고한 '굶는 민주주의는 싫다'는 제목의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다. 제목은 오해를 살 수도 있었지만, 내용은 최근 〈황해문화〉의 지향이나 고민의 핵심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김명인 : 그렇다. 제목은 〈경향신문〉에서 단 것인데 내용을 보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바로 알 수 있으니까. 1990년대 후반부터 서민들의 삶은 점점 더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진보적 지식인들의 실감은 그런 불안과 고통에 못 미쳤다. 연이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환상'에 빠져 있었다고나 할까?

최근 상황은 민주화와 정권교체가 곧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던가를 결정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갈수록 서민들은 먹고 살기 어렵다고 하고 앞으로도 나아질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제야 진보적 지식인들도 사태의 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황해문화〉가 본격적으로 사회경제적 의제를 제기하기로 한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솔직히 지금 노무현 정부가 지금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한심한가?

***남북문제보다 양극화 문제 고민이 더 절박하다**

프레시안 : 최근 "분단 현실을 망각한 양극화 논의는 공허하다"는 얘기도 있는데….

김명인 : 무슨 얘기인지는 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 국내외의 여러 문제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을 구축했던 게 바로 남북문제가 아니었나? 남북문제는 미국과의 조율이 거의 유일한 변수였지만 다른 여러 문제, 예를 들면 양극화 문제 등을 해소하는 데는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하고 있다.

프레시안 : 지난 시절 남북문제는 국내외의 여러 가지 압력들 때문에 해결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김명인 :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다. 국내의 보수 세력도 남북문제에는 크게 신경을 안 쓴다. 남북문제가 지금은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지지를 얻는 문제가 되어 버렸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 남북문제가 결코 사활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지금 전 역량을 집중해야 할 문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양극화 문제와 같은 세계화를 강요하는 압력에 맞서는 것이다.

예전에는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면서 한반도가 중립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율성을 가진 동북아의 한 세력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끔 하기 위해 분단 극복에 노력했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과 중국 틈새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정부가 공을 들이는 과정을 살펴보면 '남북문제를 우리에게 맡겨주면 나머지는 다 미국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식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현재 미국 입장에서 북한은 중국 문제 해결의 종속변수다. 현재 급속히 중국화되고 있는 북한을 미국은 기왕이면 남한처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고 싶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둘 자신이 있다면 남북 교류 협력을 확대하고 더 나아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용인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 한반도 정부가 미국화된다.

프레시안 : 지금 남한 사회에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모으지 않으면 설사 통일이 되더라도 남한 사회의 야만적인 체제가 한반도 전체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인가?

김명인 : 그렇다. 남한 사회에서 미국 중심의 세계화의 압력을 해결하지 않으면, 즉 양극화 문제와 같은 세계화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분단이 극복돼 통일이 되거나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된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뿐이다. 지금 전 역량을 집중해야 할 문제가 세계화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이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지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본격적으로 넘어 왔다. 남한 사회를 어떻게 바꾸느냐가 바로 한반도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 진보 진영의 무능력 보여준 일**

프레시안 : 좀 더 구체적인 문제를 살펴보자. 아까 노무현 정부에 대한 강한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런데 김 주간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취임 초기만 해도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김명인 : 맞다. 취임 직후 고군분투하던 노무현 대통령을 여러 지면을 통해 보호하려 했던 게 사실이다. 그 때만 해도 노무현 정부가 이렇게 취약할지 몰랐다. 사실 노 대통령이 취임할 때도 그의 도덕성은 믿었지만 그의 능력을 크게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과 함께 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는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진보 진영의 역량이 그만큼 낮았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김명인 : 일리가 있는 얘기다. 물론 노무현 정부를 진보 진영이 전 역량을 동원해 보좌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집권 초반 내세웠던 진보적인 의제들이 여기저기서 힘을 받지 못 하고 턱턱 막히는 것을 보면서 그간 진보 진영이 자신들의 의제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했음이 증명된 것도 사실이다.

전략만 있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전술이 있어야 하는데 노무현 정부는 그렇지 못했다. 당장 이라크 파병을 결정할 때나 최근 양극화 문제와 관련해 세제 문제가 나왔을 때 이 정부가 대응했던 모습을 보면 그런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노무현 대통령, '선동'하고 '모험'하라고 뽑아줬더니…**

프레시안 : 그럼 노무현 정부가 어떻게 해야 했나? 김 주간은 노무현 정부 초기에 "우리에게는 더 많은 포퓰리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명인 :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힘은 포퓰리즘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동 정치가 필요했고, 노 대통령은 일관되게 선동가가 돼야 했다. 예를 들어서 이라크 파병 때 노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다. '내가 이라크에 파병을 하지 않으면 분명히 신용등급이 낮아지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파병을 하면 정말 국민이 뽑아준 민주 대통령으로서 스스로 원칙을 저버리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하게 된다. 파병을 하지 않을 때 닥쳐 올 여러 가지 문제점을 국민 여러분이 인내할 수 있겠느냐.'

또 최근의 세재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국민들을 이렇게 설득해야 했다.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올리는 게 필요하다. 조세 저항이 심할 테고 다가오는 선거에서도 참패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원칙대로 하려고 한다. 여러분이 날 믿고 따라줄 수 있는가.' 이런 걸 제대로 하는 게 바로 제대로 된 정치공학이다.

프레시안 :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 능력을 현실 정치의 주도권을 잡는 데만 이용했다는 얘긴가?

김명인 : 노무현 정부는 정작 자신의 정체성과 부합하는 중요한 문제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사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나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포퓰리즘을 적절히 활용했다면 3년이 지난 지금 국내외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물론 베네수엘라, 브라질은 자원도 많고 남북문제도 없기 때문에 우리와 단순 비교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우리나라 국민들의 보여준 역동성을 염두에 둔다면 또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켰던 그 분위기를 생각해 본다면 큰 가능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그런 기회를 놓쳐버렸다.

사실 노 대통령은 '선동'하고 '모험'하라고 뽑아 준 게 아닌가. 이렇게 자신의 가장 큰 힘을 저버린 뒤 하는 일마다 제대로 안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명문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니 학연에서도 내세울 게 없고, 운동권에서 잔뼈가 굵은 것도 아니니 같이 일할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혈혈단신이니 뭘 할 수가 있겠는가?

***20여 년 민주화운동으로 쌓인 역량, 8년 만에 소진**

프레시안 : 그럼 다음 정권에서 한국 사회에 또 한번 기회가 올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보수 대반동'을 우려하기도 한다.

김명인 : 과거처럼 무지막지한 보수 반동이야 올 수 있겠나. 지난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쌓인 민중의 역량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쌓인 역량이 무지막지한 보수 반동의 도래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이런 역량을 잘 이용했더라면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더라도 지금처럼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절차적 민주화를 이루는 것을 넘어 실질적 민주화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에 재벌체제를 혁파한 후 좀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만의 모델을 찾아 가야 했다. 그 때 작정하고 마음만 먹었더라면 '위기의 헤게모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금 모으기 운동' 같은 것도 있었지 않았나? 돈 갚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 대표되는 시장 세계화의 압력에서 벗어나자, 이렇게 뜻을 모아야 했다.

프레시안 :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지금은 열정은커녕 냉소와 허무주의만 가득하다.

김명인 : 사실 20여 년이 넘게 민주화를 위해서 싸워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평등에 대한 욕구, 민주적 윤리 의식, 연대를 추구하려는 경향 등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개인의 인간적 존엄을 인정받으며 평등하게 어울려 사는 사회를 꿈꾸지 않았나?

안타깝게도 이런 역량의 결과물인 두 정부가 미국 중심의 시장 세계화에 백기 투항하면서 지금은 그나마 남아 있던 역량마저 다 소진되고 있는 실정이다. 김대중 정부 때 외환위기를 극복한다면서 돈은 돈대로 갚고 종속은 더욱더 심화됐다. 개혁을 한다면서 시장 세계화의 기득권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줬다.

그 결과 지금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원하는 '시장형 인간'들만 득세하고 있다. 그나마 과거 군사독재 때의 야만은 민주화를 위한 열정을 기반으로 싸울 수 있었는데 이제 이 야만은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갑갑하다.

***현 개혁 세력에서 '세련된 보수' 등장하면 더 위험하다**

프레시안 : 아까 무지막지한 보수의 도래는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 틈을 헤집고 들어오기 딱 좋은 세력이 바로 보수, 특히 파시스트들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명인 : 사실 지금 현실 정치의 수구 보수 세력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라서 쉽게 대세를 장악하기는 힘들 것이다. 오히려 한때 민주화의 과정에 동참했고, 그 때문에 대중의 열망도 잘 알면서, 시장 세계화라는 대세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그런 인물이 나와서 나라를 망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스럽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그 결과는 파시즘의 도래다.

유력한 대권 후보들 중에서 그렇게 떠오르는 인물이 없어서 아직은 안심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최근 들어선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사람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 양극화 문제를 언급하는 걸 보면서 '아직 그 지경까지는 안 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또 한미 FTA 밀어붙이는 걸 보면 우려가 많이 된다. 무지막지한 보수의 도래는 없을지라도 더 위험한 세련된 보수의 도래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만약 그렇게 권력을 잡은 이가 미국의 패권을 일방적으로 추종한다면 한반도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최악의 상황에서는 동아시아 위기의 근원지가 한국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을 업고 일본과 동아시아 패권 경쟁에 나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통일 한반도라면 그런 시나리오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 신종 파시스트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최근 '황우석 사태'에서 잘 알 수 있듯이 1980년 광주, 1987년 6월에 보였던 대중들의 건강한 열망은 조금만 방향을 틀면 언제든지 위험하게 변할 수 있다. 특히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대중들, 특히 중산층이 박탈감이 아주 크다. 가난한 서민들은 밥을 먹여준다는 보장만 된다면 언제든지 그까짓 민주주의 따위는 포기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런 상황에서 파시즘이 탄생한다. 누군가가 그걸 이용한다면 정말 끔찍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 많던 진보적 지식인들은 어디서 뭘 하나**

프레시안 : 방금 지적했듯이 이번 황우석 사태는 시민사회 위기의 징후를 여실히 보여줬다. 여전히 계몽이 중요한 화두일 것 같은데 이른바 진보 진영의 능력은 취약하기만 하다. 진보적 담론을 생산하는 책이나 잡지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은 그 단적인 예다.

김명인 : 가장 큰 문제는 1970~80년대에 대학 다닐 때 제도적 커리큘럼을 무시하고 자체 커리큘럼을 만들어 진보적 담론을 생산해내고 그 결과 민주화에 기여했던 이들이 총체적인 무기력증에 빠진 일이다. 한때 노동사회, 시민사회에 강하게 밀착돼 있던 이들이 많이 대학으로 들어가면서 현장과 학계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더 큰 문제는 정작 그렇게 현장을 떠나 대학에 들어간 이들이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들은 대학에 대거 들어가 있지만 대학 제도의 강화되는 통제에 눌려서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 한다. 대학 내에서도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 하는데 어떻게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지금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어떻게 볼 것인지가 자기 담론의 진보성의 척도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늦게나마 그 문제에 눈을 뜬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잠시 지적했듯이 김대중, 노무현 두 민주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환상'에 빠져 그들에게 현실 프로그램을 내맡겼던 지식인들이 뒤늦게야 정신을 차렸다. 나라를 결딴낼 수도 있는 위험한 과정이 아무런 고민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와 함께 또 따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기**

프레시안 : 어떻게 지금 추세에 제동을 걸어야 할까? 김 주간은 국가에 투항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사이에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명인 : 그게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같은 경우는 국가와 시민사회가 아주 격리돼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서로 소통하는 측면이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도 서로 넘나들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넘어간 사람들이 마치 투항하듯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 편에서는 국가를 거부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식의 우편향이 있다면 국가를 억압적 측면만을 보는 좌편향도 있다. 노마디즘(유목주의)이 좌우를 막론하고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지금 가장 힘이 센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주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통제력을 강화해 그것의 성격을 바꾸는 것과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것을 함께 도모해야 한다. 이 양자가 같이 갈 때 세계화에 저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지국가'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 한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보루가 국가가 주도하는 사회 안전망이라면 그것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세계화에 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프레시안 : 요약하자면 '국가와 함께 또 따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기', 이런 제안인가?

김명인 :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이 체신 없이 얘기하듯이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 이런 얘기가 절대 나오지 못 하게 해야 한다. 국가가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일부에서 우려하는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과감한 비판을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현실적으로 국가를 던져버리면 남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소비주체로서의 개인만 남을 뿐이다. 이것은 건강한 공동체를 꾸리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가에 투항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사이에서 대안을 찾는 일, 이것이 지금 나와 〈황해문화〉의 고민이다.

프레시안 : 공교롭게도 〈황해문화〉 제50호의 맨 마지막에는 〈환경과생명〉 장성익 주간의 글이 배치돼 있다. 그는 그 동안 한국 사회의 대안을 찾을 때 '생태적 전환'의 절실함을 강조해 왔다.

김명인 :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배치가 그렇게 됐다. 사실 나 역시 개인적으로는 생태주의에 큰 공감을 갖고 있고, '생태적 상상력'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미래를 구상하는 데에 꼭 참조해야 할 사항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여전히 '과정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남는다. 생태주의자 역시 지금 당장은 국가와 함께 또 국가와 따로 가는 방법론적 모색을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 온 역량을 통해 국가를 바꾸고 또 그 국가를 이용해 새로운 토대를 만드는 것과 같은 과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내몰린 서민들, 파시즘과 민중연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프레시안 : 이제 정리를 했으면 한다. 여전히 주체의 문제가 남는다. 시민사회, 노동사회 내 진보적 역량은 굉장히 취약한 상태고 그들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 역시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민주노동당 역시 너무 취약하고, 최소한 세계화에 저항하는 데 있어서는 이른바 열린우리당과 같은 자칭 개혁 세력에서 기대할 게 없다는 게 최근의 분위기다.

김명인 : 그게 지금 가장 큰 고민이다. 누가 과연 이 체제에서 피해를 보는가, 누가 수난자인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또 소수자(마이너리티)들…. 한때 소수자로 불렸지만 현실에서는 바로 그들이 다수가 돼 버렸다.

최근 철도파업은 이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안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른바 '공사'의 정규직이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니까. 점점 더 굉장히 우려스러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렇게 내몰린 사람들이 결국 어떤 방향을 선택할까? 새로운 파시즘인가 아니면 민중연대인가, 지금 그 갈림길이다.

지금이야말로 이제 더 늦기 전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함께 나아가야 할 때다. 그간 우리가 실패도 많이 하고 또 그래서 실망도 많이 하고 그러지 않았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 대안을 모색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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