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헤지펀드들이 연합해 경영권 확보 및 행사를 목적으로 KT&G(전 담배인삼공사)의 지분을 대량 매입한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KT&G가 '제2의 SK'가 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최근 '아이칸 파트너스 마스터 펀드' 등 미국계 헤지펀드들이 KT&G의 지분 6.59%를 사들이고 KT&G 경영에 참여하겠다고 선포한 것이 'SK 사태'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SK 사태'는 지난 2003년 미국계 투자회사 소버린의 자회사인 크레스트 증권이 SK의 지분 8.64%를 사들여 SK의 지배구조 개선, 최태원 SK 회장의 퇴임 등을 요구하면서 SK의 경영권이 크게 흔들렸던 사건이다.
이번 사태는 KT&G가 최근 3년 연속 '한국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로부터 '지배구조 최우수 기업'으로 선정된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충격적이다.
***기업사냥꾼들, KT&G 사냥 시작했나**
최근 아이칸 파트너스 마스터 펀드, 아이칸 파트너스, 하이리버, 스틸 파트너스 등 4개의 미국계 헤지펀드들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지난달 KT&G 지분에 대한 공동보유자 관계를 맺었으며, 현재 총 1070만9142주(6.59%)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펀드들은 아이칸 파트너스 마스터 펀드의 칼 아이칸과 스틸 파트너스의 워렌 리히텐슈타인이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적대적 기업인수합병(M&A)계의 거물로 알려져 있다. 아이칸은 지난 20년 동안 항공사인 TWA, 철강회사인 USX, 식품·담배회사인 RJR 나비스코 등 미국의 거대 기업들을 적대적으로 인수한 바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사냥꾼이다. 리히텐슈타인도 미국의 유나이티드 인더스트리얼에 대한 적대적 M&A 등으로 최근 급부상했다.
따라서 업계 전문가들은 아이칸 측이 KT&G의 지분 인수를 통해 본격적으로 KT&G에 대한 경영권 공격에 들어간 것으로 보고, 최악의 경우 적대적 M&A의 가능성도 예상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 헤지펀드들, 공동전선 구축**
지난해 9월부터 KT&G의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한 아이칸 측은 지분을 매입한 목적이 '경영 참가'에 있다고 분명히 밝히면서 KT&G 경영진에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칼 아이칸과 KT&G 양측은 이미 지난해부터 KT&G의 핵심 경영사안들을 놓고 의견대립을 보여 왔다. 아이칸은 지난해 말 2명의 대리인을 보내 KT&G의 자회사인 한국인삼공사이 상장, 보유한 부동산의 매각, 배당의 확대, 자사주의 소각 등을 통해 주가를 부양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KT&G 경영진으로부터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이칸 측이 그리 쉽게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아이칸 측은 3월 중순으로 예정된 KT&G의 주주총회에서 1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하겠다고 이미 못박았고, 앞으로 회사의 합병과 분할, 기업 자산의 처분 등 핵심 경영사안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아이칸 측은 6일 KT&G에 3명의 사외이사 후보를 천거하는 등 이미 행동에 나섰다.
이렇게 외국계 헤지펀드들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기업경영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고 나아가 적대적인 기업인수합병(M&A)을 하는 것은 국제적인 헤지펀드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신종 전략 중 하나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최근 이 기법을 국내 대기업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KT&G 측은 "주주가 주주권을 적법하게 행사하는 것"이라는 원칙론적인 입장을 밝혔으나, 실제로는 지난 주말 긴급회의를 소집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KT&G, 실제로는 1,2대 주주가 다 외국계**
사실 외국계 헤지펀드가 KT&G에 대한 경영권 위협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4년에도 영국계 펀드인 TCI가 외국계 주주들과 공동으로 KT&G에 자사주 소각을 요구했으나, KT&G 경영진이 이에 응하지 않자 경영진을 교체하겠다고 위협한 적이 있다.
전문가들은 KT&G가 민영화된 후 외국인들의 경영권 공격에 계속 노출돼 왔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아이칸의 경영권 공격은 '놀라운' 사태가 아니라 '올 것이 온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KT&G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취약한 지분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KT&G의 지분 보유비중은 중소기업은행 15.84%, 플랭클린 뮤츄얼 어드바이저스 7.15%, 아이칸 파트너스 마스트 펀드 등 6.59%, 기업은행 5.85%, 우리사주조합 5.78% 순이다. 그러나 최대주주인 중소기업은행의 지분 중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를 빼면 실질적인 지분율은 5.85%로 줄어든다. 사실상 1, 2대 주주가 다 외국인인 셈이다.
***"주가 띄우기 전략" vs "적대적 M&A 시작한 것"**
시장에서는 아이칸 측의 이번 행보가 주가 띄우기 전략이라는 분석과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M&A)의 수순을 이미 밟기 시작한 것이라는 분석이 맞서고 있다.
이사 선임 요구, 한국인삼공사의 상장 주장 등 아이칸 측이 현재까지 보여준 행동들은 주로 주가를 부양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아이칸이 적대적 M&A보다는 투자수익을 올리는 데 더 관심이 많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
실제로 칼 아이칸 측이 지분율을 공개한 후 KT&G의 주가는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KT&G의 자사주 300만 주 매입 및 소각 예정, 고배당으로 인한 주주들의 신임, 상승세를 타고 있는 한국인삼공사의 기업가치 등으로 올 초부터 상승세를 탄 KT&G의 주가는 '아이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그러나 그간 적대적 M&A를 통해 고수익을 올려온 이들 헤지펀드가 KT&G를 적대적으로 인수합병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KT&G가 국내 담배시장의 73%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 자회사인 한국인삼공사를 상장하면 그 가치가 6000억 원 이상으로 추산된다는 점, 담배공사의 부지 등 보유한 부동산 가치도 1조 원이 넘는다는 점, 담배 원료의 수입처 다변화가 이뤄지면서 영업이익이 더 커질 전망이라는 점 등 적대적 M&A 대상으로서 KT&G의 매력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FT "아이칸, 이번엔 실패할 것"**
그러나 국내의 여론과 다르게 미국에서는 아이칸 측이 KT&G의 경영권 참여에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4일 "소버린이 SK의 경영 참여에 실패했듯 한국에서 외국인의 경영 참여 시도가 성공한 적이 없다"며 '적대적 기업인수합병(M&A) 시장의 상어(shark)'로 불리는 아이칸이 이번에는 실패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또 〈FT〉는 KT&G의 매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우량기업이긴 하지만 한국의 이른바 '금연 열풍'으로 주요 상품인 담배의 매출이 감소하고 있으며, 보유한 부동산이 많긴 하지만 그로부터 수익을 거두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FT〉는 KT&G의 사업들 가운데 한국인삼공사의 매력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외국투기자본의 국내기업 적대적 M&A 논란' 재점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지난해 한국사회를 강타했던 '외국자본에 의한 국내기업의 적대적 인수합병(M&A)' 논란이 재점화됐다.
업계에 따르면 KT&G 외에도 최근 민영화가 된 포스코, KT, 국민은행 등이 모두 외국투기자본의 공격에 취약한 지분구조를 가지고 있다.
포스코의 공식 최대주주는 2.85%의 지분을 가진 SK 텔레콤이지만, 지분율을 따져봤을 때 실질적인 최대주주는 미국계 펀드인 얼라이언스 캐피털이다. 국민연금(3.63%)이 최대주주로 있는 KT도 실질적인 1~3대 주주들은 다 외국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은행의 경우 1·2대 주주가 각각 7.19%, 5.76%의 지분을 보유한 미국의 캐피털그룹과 프랭클린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에 대한 뚜렷한 대책 없이 '자본시장을 개방해야 국가경제가 발전한다'는 주장만 되풀이해 온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외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것은 좋으나, 장기적인 투자로 국가경제에 보탬이 되는 외국인 직접투자(FDI)와 '먹고 튈' 가능성이 높은 간접투자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논평을 통해 "탈세를 위해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놓고, 주요 기업의 주식을 사들인 후 적대적 M&A를 협박하고 자사주 매입을 요구하는 등 단기적 투자 차익 증대를 위해 갖은 횡포를 저지른 투기자본으로 유명한 펀드가 한국에서도 그 수법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페어플레이의 장'부터 마련해야**
칼 아이칸은 지난 20년 간 적대적 인수합병(M&A)계에서도 무자비한 기업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쳐 왔으나 시장의 규칙을 어긴 범법자로 지목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외국 자본에 대한 시장 개방 여부에 대한 찬반 논란을 떠나 이번 사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외국자본이 국내시장에 들어왔을 때 잘 짜인 규칙 안에서 '페어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틀을 마련하는 정부 역할의 중요성이다.
한편 이번 사태로 국내 재벌의 지배구조개선에 관한 정계 일각의 움직임과 시민사회의 의욕이 꺾이지 않을지 우려된다. 그동안 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은 참여연대 등의 지배구조개선 요구를 받아들이면 외국자본이 경영권을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런 비논리적인 주장이 이번 KT&G 사태를 계기로 다시 힘을 발휘하게 될 가능성도 있어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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