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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장가 들며 본처 생각에 움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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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장가 들며 본처 생각에 움찔"

안대회 교수, '18~19세기 후처-첩 들이기 풍속도' 글 발표

"아들 둘에 딸 하나 둔 늙은 신랑이 / 늙어서 신랑 되어 신방에 들어가네 / '후처는 전처와 같지'라고 신랑은 말하고 / '새 엄마는 죽은 엄마와 같아요'라고 아이들은 말하네 / 새 엄마가 어린 것들 쓰다듬자 / 신랑은 기뻐하다 또 슬퍼지네."

18세기 조선 영·정조 때 서화로 이름 높았던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은 늙은 나이에 후처를 맞는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후처를 들이면서 본처에 대한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회한이 풍겨난다.

이 때문일까? 18~19세기 후처라든가 첩(소실)을 들이는 사람들에게서는 한결같이 본처에 대한 두려움과 미안함이 발견된다.

최근에 공개된 '요조첩(窈窕帖)'이라는 문헌은 다산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살이 할 때 그를 도운 윤시유(尹詩有, 1780~1833)라는 사람이 재혼하게 된 일을 축하하는 시첩으로 1809년에 제작됐다. 여기에는 다산의 제자와 자제 등 5명이 한 편씩 쓴 축하시가 실려 있다. 그 중 이청이란 사람이 쓴 시는 이렇다.

"월하노인(月下老人, 중매장이)의 새끼줄로 엮어 / 백자도(百子圖) 병풍 아래서 / 꽃 같은 얼굴 옥 같은 가지 서로 엉킬 때 / 서쪽 봉우리에는 석양빛 / 쓸쓸히 머리 돌리네 / 마음 속으로 생각하노니 / 새 사람(후처)은 옛 아내와 닮았노라고."

여기서도 다시 장가를 들게 된 신랑은 죽은 본처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신랑 신부가 합방하는 광경이 다소 음탕하게 묘사된다.

한국한문학 전공인 안대회 명지대 교수에 의하면 18~19세기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는 이처럼 나이 들어 재혼하거나 소실을 얻는 경우에는 친구들 사이에 시문을 써서 주는 게 하나의 풍류로 존재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19세기의 명사이자 기인인 벽산(碧山) 정민수(鄭民秀)는 가난으로 인해 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나이 마흔다섯에 첫 장가를 들었을 때 친구들이 특별히 기념될 일을 벌이게 된다.

판향(瓣香) 함진숭(咸鎭嵩)을 비롯해 정민수와 아주 친밀한 교우들이 화가 방반석(方半石)에게 부탁해서 '벽산빙행도(碧山聘行圖, 벽산이 장가가는 그림)'를 그리게 한 다음 시를 덧붙여 그에게 선물했다.

안 교수에 의하면 대개 이런 시는 질펀한 성적 희롱을 담은 구절이 많다.

예컨대 19세기 초반 명사인 김려(金僚)는 충청도 결성이 고향인 김기서(金箕書, 1766~1822)가 55세 때인 1820년 제천 현감으로 재직 중에 첩을 들이게 되자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준 일이 있다.

"장년이 되었음을 생각하니 마음에서 불이 나네 / (그래, 나도) 40년 전에는 15살 팔팔한 사내였어 / 울긋불긋한 보료(깔개) 위엔 비단 금침 화사하고 / 뒤에는 단원(檀園, 김홍도)의 속화(俗畵, 포르노성 그림) 그린 작은 병풍 둘러쳤네 / 오늘 밤엔 원앙이의 단꿈을 꾸어보게 / 촛불 그림자 몽롱하게 운우(雲雨)를 즐기며 말이네."

김홍도와 동시대를 살다간 사람의 입을 통해 김홍도가 속화를 그렸다는 사실이 공개되고 있어 흥미롭고, 그런 속화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시는 주목을 요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첩을 사는 비용은 얼마나 되었을까? 안 교수는 전라도 출신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란 사람이 13세부터 63세까지 장장 50년에 걸쳐 쓴 '이재난고'라는 방대한 일기를 주목한다.

이 일기에 의하면 황윤석은 41세가 된 1769년 8월 23일, 4년간 계속되는 서울 생활의 외로움을 달랠 요량으로 말을 팔아 집과 소실을 얻으려고 이 문제를 서리인 이성춘(李成春)이란 사람과 의논했다.

이 대화에서 황윤석은 나이와 외모는 따지지 않고 첩과 종을 겸한 여자를 얻되, 너무 어리면 자기 몸을 상할 수 있으므로 노성(老成)한 여자가 좋다고 부탁한다.

이에 대해 이성춘은 40냥만 있으면 안방 1칸, 내실 1칸, 부엌 1칸, 사랑방 1칸, 마구간이나 헛간 1칸이 있는 초가 1채를 얻을 수 있고, 그러면 혼기 놓친 가난한 집 여자는 쉽게 얻을 수 있으니 굳이 30살 된 여자는 구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소실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같은 해 11월 23일 신춘일에 황윤석은 다시 대궐 주변에 사는 황 씨 노파에게 소실 한 사람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이 와중에 황윤석은 소실과 혼례하는 초례청에서 가까이 다가가 신부의 모습을 보다가 그만 자기 아내와 비슷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고 하며 심경을 일기에 쓰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도 본처에 대한 남편의 두려움이 묻어난다.

이런 황윤석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 생겼다. 그 사이에 본처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에 황윤석은 상처한 지 1년 만인 1777년 우여곡절 끝에 고모의 소개로 송일좌(宋日佐)라는 사람의 누이를 소실로 맞이하게 된다.

일기에 의하면 그는 첩 사는 비용으로 15냥을 지불했다. 한데 일기에는 이런 액수는 애초 고모가 제시한 첩 사는 비용 20냥보다는 5냥이 적다.

안 교수는 이로 보아 조선후기 서울지역에 통용된 첩 구입 비용은 15~40냥 정도였으며 말 1마리를 팔아 그것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최근 발간된 한국한문학회 기관지인 〈한국한문학〉 35집에 기고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인간면모와 일상'이라는 논문에서 박제가의 첩장가 들기를 고리로 삼아 이와 같이 조선후기의 '소실 들이기' 양상을 고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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