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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어떻게 부지불식 간에 파시즘에 빠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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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어떻게 부지불식 간에 파시즘에 빠지는가?"

[화제의 신간] 빌헬름 라히이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파시즘 연구의 역사에서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 책이 새롭게 번역, 출간됐다. 빌헬름 라이히가 쓴 〈파시즘의 대중심리〉(황선길 옮김, 그린비, 2005)가 그것이다. 독일어로 쓰인 초판이 1933년에 출간되었으니까, 독일의 나치당이 급성장하고 집권에 성공한 1930년대 초, 바로 그 현장에서 집필된 것이나 다름없는 책이다. 동시대에 대한 연구가 그로부터 70년 이상 지난 지금에도 고전으로 꼽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바, 이 책이 갖는 연구사적 가치에 대해선 달리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연구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의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파시즘이란 용어를 자주 불러들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영웅을 넘어 우상을 만들어냈고, 이제 그것이 무너지면서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 때문에 비합리적 공황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진단이 분명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 역시 이 책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병리적 사회심리와 파시즘**

라이히가 강조하듯이, 대중운동의 형태를 띤 파시즘은 반동적인 성격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기득권 질서에 대한 하급 중산층의 반역적 열정이 결합된 급진적 내용이 함께 있다. 초기 파시즘 운동이 보수적으로 타락하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좌파 정당에 대한 혐오,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 유태인에 대한 공격성이다. 사회구성을 우생학의 관점에서 바꿔 보려는 것도 파시즘의 한 특징이며, 여기에 덧붙여 퓌러(Führer)라고 하는, 우리말로는 영웅적 지도자에 대해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자 하는 대중심리가 동원된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파시즘을 과거 독일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나타났던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사태라고 생각한다면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살아있는 파시즘 연구의 총결산자"로 불리는 로버트 팩스턴 교수가 강조하듯이(〈파시즘〉, 조효제 옮김, 교양인, 2004), 파시즘은 민주주의 체제에 내재해 있는 도전이자, 민주주의가 사회적 요구와 갈등을 통합해가는 데 있어서 실패할 때 나타나는 일상적 위험요인이란 점이 강조되어야겠다. 홉스봄을 잇는 차세대 유럽역사 연구자인 마크 매짜와(Mark Mazower) 교수가 〈암흑의 대륙〉(Vintage Book, 1998; 후마니타스 근간)에서 강조했듯이, 파시즘은 당시 프랑스, 영국을 포함 유럽의 중산층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발전모델"로 광범하게 지지를 받았던 대안이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과 유사한 특징이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 한 가지 더 말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귄터 그라스와 피에르 부르디외는 대담에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이 진보적 동원의 뉘앙스를 풍기면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역사상 이런 예는 1930년대 파시즘에 이어 두 번째라고 말했다. 지금 정부의 정책기조가 신자유주의라는 보수혁명의 내용을 가지면서도 이런저런 개혁의 수사를 동원해 뭔가 큰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듯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더 주목된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어떻게 파시즘의 징후를 보여주는가**

한편으로는 기득권 세력을 공격하는 듯한 외피를 쓰면서도 실제로는 정부 정책의 성격이 민중적 내용과 배치되는 상황에서 그 간격을 상당수 대중들이 진보파에 대한 공격과 황우석 비판자에 대한 공격으로 채우고 있는 현실은 아주 위험하다.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노무현 지지자들 중 일부가 황우석 사태의 책임을 묻는 비판자들에 대해 보여준 태도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이 황우석 교수의 비판자를 대면하는 방식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자들을 대면하는 방식의 복제판에 가깝다. 분명 안티조선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냉전반공의 기득권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고 노무현 정부의 집권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던 이들에게서 점차 두드러진 것은 진보세력에 대한 혐오, 조직 노동운동에 대한 반감, 이데올로기화된 반(反)지역주의, 나아가 핍박받는 지도자와 영웅을 자기 동일시하는 현상이다. 이들에게서 과거와 같은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을 기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파시즘을 사회심리적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되고, 한국 사회가 파시즘과 같은 국가 사회체제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한다면 다소 비약일 것이다. 또한 파시즘이란 비판이 오히려 비합리적 논란을 가져오는 부작용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꼭 파시즘이냐 아니냐를 떠나 한국 사회가 지금 민주화의 여러 과제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왜곡되고, 사회가 발전시켜야 할 공동체적 요소는 더욱 파괴되고, 연대와 공존의 가치들이 약화되면서, 그러는 사이 파시즘과 유사한 병리적 사회현상이 제어되지 않고 우리 사회에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비판적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비합리적이고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열정에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을 갖는 독자라면 응당 빌헬름 라이히의 이 책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속류적 해석을 경계해야**

이 책을 정확히 소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잘못된 소개는 책에 대한 이해를 돕기는커녕 책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부정적 효과를 낳기 쉽다. 아마도 이 책만큼 부적절한 소개 내지 잘못된 독해에 의해 그 가치가 절하된 책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산당 내부에서 그의 출판물 배부가 금지되고 결국 당에서 축출되었으며, 국제적 방랑생활 끝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 감옥에서 사망한 빌헬름 라이히의 삶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안타깝게도 이 책에 대한 협애한 이해 방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더 그렇게 보인다.

이 책의 특징을 소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가능할 것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기계적 유물론에 대한 라이히의 비판을 강조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사회경제적 조건과 역행하는 이데올로기의 운동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발견에 주목할 수도 있으며, 프로이트적 심리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연원으로부터 발전한 그의 생체심리학의 구조를 설명하고 이로부터 그가 왜 성정치학과 성경제학에 몰두하게 되었는지 아울러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나아가 이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구성하는 권위주의적 가족이데올로기, 인종주의, 신비주의, 국가주의 등에 대한 그의 비판적 분석을 요약할 수도 있겠고, 그의 연구를 둘러싼 당시의 논란을 통해 공산당을 비롯한 파시즘 비판세력 안에서의 과도한 도덕적 엄숙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고, 이후 그의 책이 미친 연구사적 영향에 대해서도 추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 대해 후속 연구들이 개진한 여러 비판들을 검토하면서 라이히의 이론과 설명이 갖는 강점과 약점을 균형 있게 따져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라이히에 대한 대중적 소개에서 이런 논의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 책에 대한 속류적 이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책이 파시즘은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중들의 비합리적 성격구조 때문에 파시즘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몇몇 문장과 자구를 뜯어 맞추면, 이러한 독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라이히 책의 전체적 논의구조로부터 분리된 이러한 독해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 무모한 일이다. 이런 속류적 해석을 따르게 되면 전통적 가부장주의도 파시즘이 되고, 스포츠 응원에서 나타나는 대중적 열광도 파시즘이 되며, 민중주의와 같은 정치적 대중동원도 파시즘이 되고, 사회운동도 민주정치도 모두 미시 파시즘의 혐의를 받게 된다. 그야말로 파시즘이라는 용어가 무제한적으로 범용되는 일이 가능해지거나, 때에 따라선 라이히가 성욕 개방론자 비슷한 뉘앙스로 만들어지거나 대중의 집단행동을 경계하는 이론가의 이미지를 갖게 되기도 한다.

속류적 해석에 따르게 되면 당장 독일과 이태리, 일본이 특별히 성적 억압이 강해서 파시즘이 승리한 것인지, 왜 유사한 성적 억압이 있었던 다른 나라에서는 파시즘이 성공하지 못했는지 등의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고, 대중의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수많은 보수적 해석 속에 이 책 역시 무의미하게 묻히게 된다. 그 결과 노동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살아 숨쉬고, 도착적 욕구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원초적 사랑이 복원되기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자 라이히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파시즘에 대한 여러 고전적 접근 중에서 이 책이 갖는 진정한 강점은 우리의 인식지평 너머로 실종되고 만다. 라이히의 논의가 이렇게 단순한 것이라면 한나 아렌트나 푸코와 같은 사상가들이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이 분석하려는 것은 파시즘의 출현을 가능케 했던 대중의 심리 상태에 대한 것이다. 대중심리, 곧 인간의 심성구조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라이히의 독창적인 작업은 프로이트적인 접근의 핵심 개념인 무의식의 세계, 그 다음에 정치경제적이고 역사적인 조건에 의해 영향받는 더 깊은 '생물학적 하부구조'의 존재를 밝히고자 하는 데 있다. 라이히가 강조하듯이 "좋은 사회적 조건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이 가장 깊은 핵심에서 근본적으로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협동적이며, 사랑을 하고 있는 동물,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합리적으로 증오를 표출하는 동물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교양의 가면을 벗기면, 자연스런 사회성이 아니라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격층만이 우세를 점"하게 된다.

요컨대 라이히가 밝히고자 한 것은, 자본주의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사회조직의 원초적이고 노동민주주의적인 형태가 붕괴"될 때 무의식이라고 하는 2차적 욕구의 층에서 인간의 심성은 어떻게 도착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변형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성격구조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집단화되면서 파시즘적인 사회구조를 어떻게 재생산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결국 우리가 천착해야 할 것은 성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한 것이지 사회의 성적 측면에 대한 것이 아니다.

확실히 라이히에 대한 속류적 해석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다른 사람의 소개나 평가에 의존하는 일없이 직접 독서되어야 할 것이다.

***발전모델로서 생명공학 산업화론이 갖는 위험성**

사회적 관점을 강조하는 참에 새로운 발전모델로 신봉되는 '생명공학론' 혹은 '생명과학 산업화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생명과학기술이나 의학기술이 덜 발달해서 인간 사회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의료기술의 혜택을 폭넓게 받을 수 없는 사회구조의 불평등이다. 신용불량자의 불행한 처지로 떨어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의료비 부담 때문인 현실에서, 인간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은 평등의 문제이다. 평등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가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으면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은 약해지며, 결국 사회는 병들게 된다. 의료산업화, 생명과학 산업화에 엄청난 국가예산을 쏟아 설령 뭔가 엄청난 기술이 개발된다 한들 산업화 논리의 귀결은 가난한 다수를 여전히 혜택에서 배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문제에 대한 접근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좋은 사회라면 장애인이나 난치병 환자 문제를 그들만의 불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의 문제로 보고, 이들이 인간으로서 필요한 여러 조건을 향유하게 하면서 사회 속에서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것에 더 많은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위대한 기술을 발전시켜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모두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반사회적이고, 반자연적이며, 위험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포함해 인간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커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기술 개발에 인간과 사회의 구원을 의탁하려는 도구적 관점이 더 커져버린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속에서 자극되는 것은 반대자나 비판자에 대한 복수의식 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비극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에 의해 대중의 심성 구조가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파괴되면서 만들어진 문제가 아닌가 싶다. 모두가 경제와 기술 발전의 혜택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에서 불안과 소외는 일상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는 사이 인간의 내면과 자아가 황폐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조건에서 자신의 문제를 자기 외부의 누군가에게 전가하려는 사회심리적 조건은 커지게 되고, 탁월함이라고 하는 귀족주의적 가치가 숭상되고, 그러한 능력을 갖는 영웅의 출현으로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병리적 현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집권 개혁파의 신자유주의적 타락이 우리사회의 불행을 심화시키는 현실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태의 기원이 이처럼 사회적이고 정치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가 검찰의 조사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 참담하다.

이런 고통과 참담은 라이히의 이 책을 읽을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인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개선해야 할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대가를 얻게 된다면 그야말로 좋은 거래가 아니겠는가? 언제나 그렇듯, 좋은 서평보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수천 배 더 나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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