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의 장남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현대 계열사인 글로비스의 상장으로 수천억 원대의 평가차익을 거두자, 이를 '회사 기회의 편취'를 통한 변칙증여로 간주해 증여세를 과세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회사 기회의 편취'란 어떤 기업에 유망한 사업기회가 새로 생겨났을 때 그 기업의 지배주주, 이사, 경영진이 새 사업기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이익을 회사에 귀속시키지 않고 사적으로 비상장 계열사를 설립하는 방식 등으로 새 사업기회의 이익을 가로채는 행위를 말한다. 미국에서는 기업 관련법과 법원 판례로 이런 행위가 금지돼있다.
***심상정 의원 "삼성, 현대, SK 등에서 회사 기회의 편취 행위"**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27일 "변칙증여 행위에 대한 국세행정은 이제 막 걷기 시작했는데 재벌들은 이를 비웃듯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형국"이라면서 "글로비스의 상장을 계기로 국세청은 회사 기회의 편취를 통한 신종 변칙증여 행위에 주목하고, 이에 대한 과세 조치를 취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심상정 의원은 지난 9월말 국세청 국정감사에서도 "재벌들의 신종 변칙증여 행위로 회사 기회의 편취를 통한 증여행위가 확산되고 있다"면서 "삼성, 현대자동차, SK 그룹에서만 회사 기회의 편취를 통한 변칙증여가 1조2000억 원 규모에 이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심 의원에 따르면 삼성전자 이재용 상무의 경우 삼성SDS, 에버랜드, 서울통신 등 5개 회사에 503억 원을 투자했지만, 다른 삼성 계열사들의 집중 지원을 받은 결과 이들 5개사에서 4861억 원에 이르는 평가이익 또는 배당이익을 얻었다는 것이다. 또 SK그룹의 최태원 회장도 씨앤씨, 워커힐 등 4개사에 230억 원을 투자해 2478억 원의 이익을 얻었다고 심 의원은 주장했다.
국감 당시 심 의원은 "회사 기회의 편취라는 방식을 동원해 재벌들이 포탈한 증여세는 6117억 원"이라며 "2004년부터 상속ㆍ증여세 포괄주의가 실시된 만큼 이런 이익에 대해서도 과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회사 기회의 편취를 통해 회사의 사업기회를 특정인에게 양도한 것으로 판단되면 주주들이 그 기회비용을 '손해'로 보고 회사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회사 기회의 편취'에 따라 발생하는 '기회비용'을 회사의 '손해'로 보는 개념이 법률에 도입돼있지 않다.
심 의원은 특히 글로비스의 경우를 "회사 기회의 편취가 재벌의 편법증여 방법으로 활용된 전형적인 사례이자 구체적인 평가이익이 확인된 첫 사례"로 지목했다.
글로비스는 지난 2001년 정몽구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과 그의 아들 정의선 씨가 100% 출자해 만든 종합물류업체로, 이달 26일 증권시장에 상장됐다.
상장 첫날 글로비스 주식은 공모가(2만1300원)의 2배인 4만2600원에 시초가를 형성한 후 곧장 가격제한폭까지 올라 4만8950만 원에 거래를 마감했다. 이로써 글로비스의 기업가치는 1조8350억 원을 기록해, 단숨에 계열사인 INI스틸(1조8270억 원)을 제치고 현대백화점(1조9190억 원)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글로비스 주가의 향후 전망도 밝다. 글로비스는 현재 현대·기아차 그룹 전체 물류 중 40%를 맡고 있는데, 앞으로 이 비중을 60% 수준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해외 생산법인과 관련된 현지물류 등으로도 사업영역을 넓힐 것으로 예상돼, 글로비스는 높은 매출 및 수익 증가세가 기대된다는 것이 증권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같은 그룹의 몰아주기로 인해 글로비스의 내부거래 비중, 즉 전체 거래 중 기아·현대차 계열사들과의 거래 비중이 80.6%에 달한다. 글로비스의 2004년도 매출액 9027억5000만 원 중 7277억3500만 원이 내부거래에 의한 매출이다.
글로비스가 상장된 뒤에도 정의선 사장은 31.88%(1195만4460주)의 지분을 갖고 있어 이 회사의 최대주주다.
이와 관련해 심상정 의원은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의 자산 증가는 그룹 계열사들의 몰아주기에 의한 회사 기회의 편취로 이뤄진 증여의 결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장 첫날 평가차익만 5800억 원**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정 사장이 주당 500원씩 모두 59억7723만 원에 취득한 글로비스 지분의 시장가치가 이 회사의 상장으로 26일 현재 주당 4만8950원씩 5800억 원이 됐다"면서 "정 사장은 결국 회사 기회의 편취에 의해 5800여억 원에 이르는 평가이익을 편법으로 증여 받은 셈"이라고 주장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재벌들이 2세에게 비상장 기업의 전환사채를 헐값에 발행한 행위가 '편법증여'에 해당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뒤늦게 최근에 나오는 등 재벌의 재산상속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자 이번에는 회사 기회의 편취라는 수법이 재벌가의 편법증여 방법으로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는 게 민주노동당의 시각이다.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앞으로 정 사장이 그룹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평가이익은 더욱 더 불어날 텐데 그 이익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도 주목된다"고 지적했다.
글로비스의 경우 주요 주주들의 지분 대부분이 '보호예수'에 묶여있어, 상장됐다고 해서 곧바로 시장에서 지분을 매도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정 회장과 정 사장의 글로비스 지분 60%는 향후 6개월간 처분할 수 없게 돼있다.
그러나 증권가 일각에서는 앞으로 언젠가는 정 사장이 수천억 원에 달하는 평가차익으로 현재 2%에도 못 미치는 자신의 기아차 지분을 늘리는 등 기업지배구조의 핵심 고리를 이루는 계열사들의 지분 매입에 나설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고 보고 있다.
이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회사 기회의 편취'에 대한 규제나 과세가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참여연대는 최근 회사 기회의 편취를 금지하는 조항을 상법에 명문화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상법 개정안의 조문화 작업까지 완료해 놓았으며, 내년 초부터는 본격적인 상법 개정운동에 착수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재계에서는"현행 회사법상 이사진의 '충실의무'를 갖고도 회사 기회의 편취 행위에 대한 제재가 가능하다"면서 별도의 법규 도입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심상정 의원은 상법에 회사 기회의 편취를 금지하는 조항을 도입하기 전에도 '상속증여세 포괄주의'를 적용하면 증여세 과세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심 의원은 "국세청이 주식시장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이익이 실현되면 곧바로 증여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세청 "증여세 부과에는 기술적 어려움 있다"**
그러나 국세청 관계자는 "일감 몰아주기 등에 의한 증여의 의도가 있다고 해도 그런 행위가 실제 이익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등을 파악해서 과세하는 데는 기술적 문제가 적지 않다"면서 "특히 상장에 따른 평가차익으로 나타난 이익이라면 그 이익 중 얼마만큼이 경영의 성과이고 얼마만큼이 증여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세청에서 회사 기회의 편취에 따른 증여에 대해 과세를 한 사례는 아직 없다"면서 "개인과 개인 간의 거래가 아닌 법인과 법인 간의 거래로 이뤄지는 회사 기회의 편취에 대해 증여세를 부과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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