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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는 'PIGS'에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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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는 'PIGS'에 강했다

[프레시안 스포츠] 전진 속공 축구에 취약한 'PIGS'

1986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축구 애호가다운 칼럼을 썼다. 국가마다 다른 축구 스타일에 대한 에세이였다.

이탈리아 축구 스타일에 대한 그의 설명은 특히 예리하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이탈리아 축구는 상대 캐릭터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서 출발한다. 그들의 목표는 상대방이 원하는 스타일의 경기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키신저가 분석한 이탈리아 축구는 어떤 면에서 잔인하다. 한 번 상대팀이 수렁에 빠지면 좀처럼 기회를 내주지 않는다. 1960년대 이탈리아 프로축구는 승리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어섰다. 스타급 선수들에게 돈을 물쓰듯 썼다. 그들은 철저히 계산된 축구에 취해 있었고 그런 스타일을 세련된 것으로 여겼다. 1966년 아시아의 태풍이 그들을 강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축구가 종교인 이탈리아는 월드컵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한 번은 북한에, 또 한 번은 한국에 졌다. 1986년 월드컵 때도 이탈리아는 한국과 힘겨운 경기를 했다. 한국 골키퍼가 좀 더 침착했다면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한국은 2002년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꺾고 그렇게 염원하던 16강을 이뤘고 이탈리아, 스페인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남유럽 축구 강국은 이렇게 수모를 당했다.

스페인은 축구 실력만 놓고 보면 늘 세계 최정상급. 1994년에도 그들의 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적어도 4강까지는 갈 수 있다"는 게 주요 언론들의 예상이었다. 그런데 첫 경기에서부터 스페인은 스텝이 꼬였다. 상대는 한국. 2-0으로 앞서가던 스페인은 후반 막판 한국의 소나기 공세에 연달아 2골을 내주고 비겼다.

포르투갈과 북한의 1966년 월드컵 8강전은 영원한 월드컵의 '클래식'이다. 스코어 자체가 그렇다. 3골을 먼저 넣은 북한. 5골을 넣어 역전한 포르투갈. 이탈리아를 이겼던 북한 선수들이 술과 여자에 빠져 이 경기를 망쳤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설'에 불과하다.

당시 북한은 어떻게 경기를 끝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몰랐다. 오직 어떻게 상대를 몰아쳐야 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에우제비우의 골 폭풍에 당황했고, 결국 졌다. 하지만 북한의 경기내용은 훌륭했다.

남유럽 3국 발목 잡은 '레드카드'

한민족은 유달리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에 강했다. 객관적 실력은 그들이 월등히 앞서 있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 지더라도 상당히 좋은 경기를 했다. 왜 그랬을까?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은 일단 운이 없었다. 수적인 열세에서 한국, 북한과 경기를 펼치는 일이 잦았다. 체력적으로 준비가 잘 되어 있었던 한국과 북한을 상대로 그들이 어려운 경기를 해야 했던 근본적 이유다.

1966년 북한과의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불가렐리를 부상으로 잃었다. 당시에는 선수 교체 규정이 없었다. 이탈리아는 10명이 싸웠다.

1994년 스페인은 한국과의 경기에서 주장 나달이 전반 25분에 퇴장당했다. 2002년 포르투갈은 한국전에서 2명의 선수가 레드카드를 받았다. 이탈리아도 한국과의 16강전에서 토티가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다.

한국 축구 스타일에 남유럽 3국은 왜 약했나?

수적 열세와 함께 한국과 북한의 축구 스타일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두 팀 모두 '주력의 팀'이다. 지칠 줄 모르고 뛰는 두 팀의 부지런함은 예나 지금이나 위협적이다.

남유럽 팀들에 익숙한 능수능란한 템포 조절은 사실 한민족의 축구 스타일과 거리가 멀다. 숨이 차 헉헉대더라도 우리는 일단 전진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무대포 축구'다. 공격할 때는 빠른 좌, 우측면 날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공을 뺏기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상대를 쫓는다.

그런 면에서 한국 축구는 남유럽 팀들에 늘 '활화산'이었다. 2002년 포르투갈과의 경기 후반전에 돌입하기 전 피구가 징그럽게 자신을 봉쇄했던 이영표에게 두 손을 흔들었던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한국과 북한의 축구는 투혼과 투지를 빼고 설명할 수 없다. 그만큼 비장한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는 의미다. 때로는 황산벌 전투의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처럼.

상대의 수를 읽어 이를 역이용하는데 능한 이탈리아 축구는 한국이나 북한의 작전을 제대로 읽기가 힘들었다. 역설적이지만 한국과 북한의 축구가 너무 솔직해서다. 그들은 한국과 북한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활기찬 경기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리듬과 집중력을 잃었다. 라틴계 특유의 불뚝하는 성미도 여기에 한몫했다.

스피드와 부지런함을 강조하는 전진 속공형 축구

한국과 북한 축구는 스피드에 목숨을 걸었다. 차범근도 "독일 선수들이 나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을 때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1966년 월드컵에서 얼마나 빠르던지 코너 깃대까지 부러뜨린 북한의 한봉진, 스피드와 지구력을 겸비한 '적토마' 고정운, 총알 같은 스피드의 변병주, 준수한 외모와 폭풍 같은 스피드를 자랑했던 김석원,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던 야생마 김주성 등이 이런 스타일을 잘 반영했던 선수들이다.

상대 수비가 미치지 못하는 지점에서 한국 축구의 특장점이 나타났다. 어쩌면 개인기와 패싱 게임에 뛰어나지 못했던 한국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스피드뿐 아니다. 남보다 한 발 더 뛰는 부지런함은 한국 축구의 키워드였다. 올드 팬에게 익숙한 이름인 서윤찬. 그는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열심히 뛰어다닌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악바리' 이영무도 마찬가지. 얼마나 악착같은지 그는 거의 매 경기마다 늘 2~3개 정도의 가로채기를 해냈다. 지고는 못 사는 허정무도 1대1 대결에서 강점을 발휘했던 '근성의 화신'이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3개의 폐를 가진' 박지성. 박지성이 스페인에서 뛰었다면 지금과 같은 활약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스페인 축구는 박지성과 같은 선수에 적어도 잉글랜드와 같이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잘 어울리는 선수다. 그는 맨유에서 공수에 걸쳐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최대 무기는 자신을 버리는 희생정신과 포기를 모르는 자세다.

한국과 맞섰던 남유럽과 북유럽 축구의 차이

박지성으로 대표되는 이런 팀 정신은 2002년 월드컵에서 가장 잘 발휘됐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물리적 결합체가 아닌 화학적 결합체였다. 주연과 조연 배우의 구분이 거의 없었다. 경기 상황에 따라 모든 게 바뀌었다. 포르투갈의 화려한 공격, 이탈리아의 견고한 수비, 스페인의 패싱 게임도 이를 넘지 못했다.

이 세 나라는 경기 초반 한국 축구가 어떤지 '간'을 봤다. 그 순간 한국의 전진 속공형 축구는 제자리를 잡아갔다. '해 볼만 하다'는 의식이 한국 선수들에게 퍼졌고, 우리 스타일의 축구를 할 수도 있었다.

독일, 네덜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한국과의 월드컵 경기에서 초반부터 거친 맹공격을 시작했다. 그것도 강한 압박으로 한국이 전진 속공형 축구를 펼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뛸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 한국 선수들은 머뭇거렸다. 남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이 한국을 상대할 때 달랐던 점이었다.

▲ 2010 ,월드컵이 열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스노우에서 8일 열린 그리스 축구대표팀 공식훈련을 한 그리스 어린이팬이 'I LOVE GREECE'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그리스와 맞붙는 한국, 이번에도 'PIGS'에 강점을 보일까?

한국은 월드컵 첫 상대인 그리스에도 강한 편이었다. 2006년에는 1-1 무승부를 기록했고, 2007년에는 1-0으로 이겼다. 특히 2007년 경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스는 경기 초반 장신 선수들을 활용한 고공축구와 거친 몸싸움으로 기선을 잡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민첩하게 움직이는 한국에 서서히 공간을 내줬다.

그리스는 수비에 치중하면서 역습을 노리는 단순한 전술을 구사하지만 내면적 스타일은 복잡하다. 남유럽의 특성과 북유럽 축구의 특성이 혼합돼 있다. 독일 출신인 그리스의 레하겔 감독은 느슨했던 그리스 선수들을 '그리스 병정'으로 바꿔 놓았다. 남유럽 특유의 기술과 창조성은 떨어지지만 선수들 간의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 분명하다. 한국의 위험요소도 여기에 있다. 경기 초반 그리스의 압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세계축구는 빠르게 퓨전 축구로 변모해 왔다. 한 국가만의 순수한 축구 스타일은 사실상 멸종했다. 외국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이런 현상은 가속화됐다. 하지만 민족 고유의 특성은 결정적 순간에 고개를 든다. 그리스에도 여전히 남유럽 축구의 특징은 남아 있다. 한국 축구도 기술적으로 많이 변했지만 외국에서 바라보는 우리의 특성은 사실 20년 전 그대로다.

한국 축구가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뒀던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남유럽 4국은 재정위기 때문에 'PIGS'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이번 월드컵에서 국가적으로 뭔가 반전의 기회를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의 상대 그리스는 그렇다.

월드컵이 펼쳐지는 남아공에서 주류인 줄루어로 골(goal)은 '라두마(Laduma)'다. 스포츠 해설가 자마 마손도에 의해 생겨난 표현. 대략 '천둥이 쳤다' 라는 뜻이다. 한국의 전진 속공형 축구와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한국 축구가 그리스 수비에 천둥을 칠 수 있을까?

한국 축구는 지금까지 'PIGS'에 강했다. 분명 희망적인 말이지만 이는 과거의 참고자료일 뿐이다. 우리는 12일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한국축구는 역시 'PIGS'에 강하다"라는 말이 현실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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