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대리점에서 구입한 휴대전화기가 고장이 나 서비스센터를 찾은 직장인 김 모(34) 씨는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휴대전화 단말기 일련번호를 조회한 직원이 "중고 휴대전화를 사신 건가요?"하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분명히 새로 산 휴대전화기였다. 김 씨는 영문도 모른 채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이런 일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동통신업체가 실적경쟁을 하면서 가입자 수를 늘리기 위해 가공의 이름으로 휴대전화 가입을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가(假)개통' 또는 '선(先)개통'으로 부르는 이런 '공갈' 개통을 위해 이동통신업체들은 가짜 이름, 가짜 주소는 물론 주민등록번호 생성기를 이용해 가짜 주민등록번호까지 만들어왔다.
이동통신업체들은 다수의 휴대전화를 가개통해 놓았다가 나중에 진짜 소비자들의 명의로 전환해주는 방식으로 휴대전화기를 판매해왔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중고 휴대전화를 새 휴대전화인 줄 알고 구입해온 것이다.
***3개월 간 무려 13만 대 '공갈 개통'…KTF 본사 차원에서 개입?**
그동안 이런 휴대전화 불법 가개통에 대해 이동통신업체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대리점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각 대리점이 가개통을 하더라도 진짜 휴대전화를 개통시킨 것과 같은 개통 수수료(대당 2만2000~3만5000원)를 본사로부터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노리고 가개통을 임의로 해왔다는 주장이다. 일단 가개통을 해준 뒤 휴대전화 사용을 일시 정지해 놓으면 한 달에 3850원의 요금만 부담하면 되기 때문에 대리점 차원에서 가개통을 해놓고 실제 소비자에게 판매될 때까지 기다려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레시안>이 21일 입수한 KTF의 내부 자료는 본사 차원에서 불법 가개통을 주도한 정황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대외비'로 분류된 KTF의 2003년 4월 마케팅 자료에 따르면 KTF는 2002년 10월부터 12월까지 4분기 동안 12만9892개의 휴대전화 단말기를 가개통해주었다. 당시 KTF는 가개통을 취소하는 과정에서 대리점에 지급된 33억4000여만 원의 개통 수수료를 대리점으로부터 환급받았다. 한 분기에만 13만 개에 가까운 가개통이 대리점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렇게 본사 차원에서 주도해 무더기 가개통이 이뤄진 정황은 다른 내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2002년 10월에 작성된 KTF 영업 관련 문건에 따르면 "휴대전화 일시 정지자가 급격히 증가된 원인은 16만 개로 추정되는 선개통, 즉 가개통 작업이 있어서"라며 "가개통은 가입자 버블, 즉 거품을 상당히 발생시켜 실제 매출에는 기여가 적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본사 강요에 의한 것…가개통 후 떠안은 '악성 채무' 때문에 집까지 날려"**
심지어 KTF는 정보통신부 통신위원회 조사가 예정되자 각 대리점에 불법 가개통 사실을 은폐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KTF가 2004년 7월 각 대리점으로 보낸 이메일은 긴급하게 가개통 휴대전화를 모두 해지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돼있다. 하지만 KTF는 같은 이메일에서 "이는 조사에 대한 대응용이지 (진짜) 해지를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해 가개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KTF는 또 2001년에 대리점에 보낸 또 다른 이메일에서 "가개통 휴대전화에 대해 실제로 사용하는 것처럼 통화를 발생시켜 일시정지 상태가 아니라 정상통화 상태를 유지하라"고 통신위원회의 의심을 피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 강남에서 KTF 대리점을 운영한 김혜숙 씨는 "본사의 지시로 1000대 가량을 가개통했는데 통신위원회 감사가 나온다면서 일시정지를 풀고 가개통 휴대전화의 흔적을 남기라고 해서 일일이 직원을 시켜 그렇게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한편 이 과정에서 김 씨는 본사 말만 듣고 가개통에 나섰다가 큰 피해를 봤다. 일단 일시정지 상태를 풀면 가개통 휴대전화 역시 실제 개통한 휴대전화처럼 요금이 한 달간 1만7000원~3만3000원 정도로 월 수만 원대로 올라간다. 김 씨는 "처음에는 본사에서 가개통 휴대전화에 부과되는 요금을 모두 내준다고 하더니 2년을 이런저런 핑계로 시간을 끌다가 나중에는 수억 원대 이르는 가개통 휴대전화 미납요금이 빌미가 돼 결국 대리점 계약까지 해지당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현재 대리점 계약을 해지당해 1만여 명에 달하는 가입자를 본사에 모두 빼앗겼으며 담보로 잡힌 동생의 집은 경매처분된 상태다.
***KTF "본사 차원 개입 없었다"-검찰 "수사 검토 중"**
한편 가개통과 관련해 KTF 측은 여전히 "본사 차원의 개입은 절대로 없었다"는 기존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
KTF 측은 "가개통을 하면 실질적인 매출이 발생하지 않는데 왜 그런 일을 하겠느냐"며 "그동안 대리점이 편법적으로 해온 가개통을 없애기 위해 본사 차원에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해명했다. KTF 측은 또 "예전에도 대리점 업주들이 가개통 휴대전화의 개통이 본사가 지시한 것이라고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한 적이 있으나 이에 대해 공정위는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취재 결과 당시 문제를 제기했던 대리점 업주 이 모 씨는 "제소를 하고 얼마 후 KTF 측에서 합의를 하자고 해서 합의를 해준 것"이라며 "KTF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증명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KTF 측은 "절대 이면합의를 해준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 공정거래위원회의 무혐의 판정은 그동안 KTF의 가개통 휴대전화 남발에 대한 면죄부로 활용돼왔다.
한편 불법 가개통과 관련해 검찰이 수사를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일각에서는 KTF의 가개통이 2000년 3월부터 경영을 책임진 이 모 사장 등이 KTF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조직적으로 실시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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