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사회민주당(SPD)은 현재 내부적인 정치적 갈등과 함께 거의 '정체성 위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전환기를 경험하고 있다. 지난 시기 여당의 위치에서 추진한 개혁정치는 내부의 좌파로부터 신자유주의로 낙인찍히면서 사상 초유의 분당 사태를 초래했고, 보수 야당들로부터는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에 획기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 하고 있는 점을 질타당하며 무능한 정권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최근 '적록연정'의 집권 실패와 뒤이은 '흑적대연정'으로의 권력이동은 사민당의 정치적 난항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서부 독일의 중소도시 본(Bonn)에서는 지난 20일 사회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재점검하며 사민당의 수뇌부들이 추진하는 정치적 방향성을 재점검하는 포럼이 개최되었다. 이 자리는 사민당을 뒷받침하는 기관이면서도 이 정당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ES)'이 1년에 두 차례 정도 개최하는 이른바 '기본가치 포럼(Grundrechteforum)'이었다.
에버트 재단의 정치아카데미가 조직한 이 포럼은 사민주의 성향의 학자, 정치가, 시민들이 모여 그야말로 '이념적 자성'의 지적인 작업을 하는 시간이었다. 이날 포럼의 주제는 사민당이 추구하는 이른바 '사회국가(Sozialstaat)'의 이념에 담겨 있는 두 가지 원리인 '사회적 권리(Soziale Rechte)'와 '자기책임(Eigenverantwortung)'의 관계를 재성찰하는 것이었다.
***독일 사민주의의 현주소를 묻다**
발제자의 한 사람이자 적록연정 제1기의 문화부장관을 지낸 바 있는 뮌헨대의 정치철학자 니다-뤼멜린 교수는 강연에서 사회국가의 '아르헤(arche)', 즉 근본원칙을 크게 빈곤으로부터 해방될 권리(Armutsrechte), 통합의 이념(Integrationsidee), 시민권(Bürgerrechte), 자율성(Autonomie) 등 네 가지로 요약했다.
그는 로크의 사회계약론, 롤스의 정의론, 칸트의 자율이성론 등 철학자들의 유명한 논의를 근간 삼아 사회국가의 이념이 어떠한 사상적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인지 청중에게 재확인시켜 주었다. 각 테제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난 후 그는 이러한 원리들은 결국 크게 '권리'와 '책임'이라고 하는 두 가지 범주를 형성하며, 사회국가의 기본 운영은 두 가치가 긴장관계를 이루며 꾸려지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날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은 기업, 세금, 실업자, 교육훈련, 연금, 의료보험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뤄진 지난 정부의 개혁정책을 사례로 언급하면서, 그것들이 사회국가의 기본이념과 어떠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며 어떠한 측면에서 기본이념에 위배되는 것이었는지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대체로 지난 정부가 '자기책임'이라는 가치를 수사로 활용하면서 그것을 사회적 권리를 증진시키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시키는 데에 역이용했다는 비판적 견해에서 일치를 보였다.
특히 이른바 '하르츠 IV'로 명명되는 실업자 지원 삭감 조치는 사회국가 이념의 원칙에 비춰 보았을 때 실업자들에게 '자기책임'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그들이 '자기책임'을 지닐 기회 자체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었다는 비판을 가했다.
발제자 간의 토론이 있은 후에는 청중도 참여하는 다양한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대부분 장년층들로 이뤄진 청중들은 발제자들이 제시한 개념들을 창의적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을 자신들이 관찰하고 체험하고 있는 사회생활의 현실에 적용시키며 그 타당성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을 피력하는 의식 있는 당원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한 직업학교 교장은 자신의 학생들이 처한 심각한 좌절상황을 묘사하며, 졸업 후에도 직장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제는 실업 지원조차 열악해진 상황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사회국가의 '자기책임'이란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발제자들에게 되묻기도 했다.
토론을 마치며 사회자이자 에버트 재단 정치아카데미의 원장이기도 한 마이어 교수는 "'자기책임'이란 사회적 권리가 전제로 마련된 이후에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론에 해당하는 것이며, '자기책임'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형성되고 지원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 민주주의, 그 답답한 현실**
필자는 이 자리에 청중으로 참석해 있으면서 시민들이 참여하는 독일 정치문화의 한 단면을 느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한국의 그것과 비교하게 되었다. 이날 포럼의 모습은 성숙한 유럽의 이념정당이 추구하는 안정된 정당정치가 무엇인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잘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한 정당의 이념과 정책의 현실적합성을 성찰하기 위해 이러한 자리가 마련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감흥을 주었다. 정당의 정책이 갖는 깊은 철학적 원리를 따져보며, 그것의 현실 적용에 대해 전문가와 시민들이 모여 허심탄회하게 지적인 토론을 하고 또 자유롭게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모습은 필자가 한국 사회 속에서 지켜봐 온 '정당(political party)'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날 포럼은 필자에게 사민주의의 이념적 기반에는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깊은 추상적 원리가 작동하고 있으며, 지금 이뤄지고 있는 사민주의 정치란 그러한 기본원리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새로이 알려 주었다. '바로 교과서에서만 있는 줄 알았던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이 정당과 정치의 장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구나, 혹은 존재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우쳐 주었다고 할까?
발제자들로부터는 그 이념의 깊이와 '보편'의 높은 수준을 배웠고, 참석한 청중으로부터는 그 이념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혹은 그 구현이 어떠한 구체적인 문제들에 봉착해 있는지 생한 '특수'를 배울 수 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는 수사적인 수준을 넘어서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깊은 이념도, 장구한 정당의 역사와 전통에 기반을 둔 정체성도, 그것을 꼼꼼히 따지는 당원들도 없다. 당연히 그러한 보편이념에 기초해 정치를 하는 정치가도, 마지막으로 그것을 지적으로 반성하게 해주는 고매한 지식인도 부재하다. 이것이 바로 이날 포럼을 지켜보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으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답답한 마음을 풀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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