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엄습으로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가 수많은 시체들이 떠다니는 유령의 도시로 변해버린 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게다가 이렇다 할 복구의 소식이 전해지기도 전에 허리케인 리타가 미국 남부를 강타해 뉴올리언스를 또다시 물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미국 남부의 허리케인이나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동아시아의 태풍이 지닌 위력이 해가 갈수록 강력해지는 것은 석유문명이 초래한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로 인한 것이라는 일부 과학자들의 경고만으로도, 오늘 우리 인류의 삶에 대한 성찰이 너무 늦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자연재해 이후에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이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보잘것없는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란 존재가 문명을 이루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연대와 협동의 힘으로 고난을 피하거나 고난을 당해서도 서로의 상처를 감싸는 우정과 배려 때문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당연한 사실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라는 미국의 한 도시에서 여지없이 깨져버린 것이다. 재앙이 휩쓸고 간 뉴올리언스의 풍경은 우리를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무차별한 약탈과 살인, 강간과 방화가 난무했고, 치안을 회복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투입한 중무장한 군병력에게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발포권까지 부여했는데도 시가전 상황으로까지 치달은 극도의 혼란이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런 사태는 석유산업과 군수산업의 이익을 대변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이라크 전쟁을 감행하는 한편 복지예산은 삭감해온 부시 정권의 정책이 낳은 비극이다. 또한 뉴올리언스가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최전선인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이 전체 인구의 67%를 차지하는 가장 가난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사태는 인종 문제와 양극화 문제가 중첩되면서 빚어진 결과였다. 우리가 인종 문제와 양극화 문제를 심각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그것이 재해 이후 뉴올리언스에서와 같이 인간성의 파괴와 왜곡으로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5년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의 일본 고베(神戶) 지역은 총으로밖에는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뉴올리언스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정전과 단수, 굶주림의 상황에서도 서로를 돕고 배려하는 상호부조의 힘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복구기간도 엄청나게 단축할 수 있었다. 평생을 유기농업 운동에 종사해온 고베 대학 야스다 시게루(保田茂) 교수의 증언처럼, 그것은 세계 최대의 협동조합 조직인 코프고베를 비롯한 고베 지역의 협동조직들이 힘이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회운동가들에 의해 슈퍼마켓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받던 코프고베의 '취약한' 조직력이 극한의 위기 속에서는 연대와 협동, 우애와 배려로 빛날 수 있었다.
헤이즐 헨더슨이란 여성 경제학자는 오래 전에 산업사회의 생산구조를 크게는 시장(market)과 세금으로 움직이는 공공영역으로 구성되는 화폐경제 부분과 비화폐적 경제 부분으로 나눴다. 그는 화폐경제 부분은 전적으로 비화폐적 경제 부분에 의존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화폐적인 경제 부분은 크게는 사회적 협동경제 영역과 자연(nature)으로 구성되며, 사회적 협동경제 영역은 공유, 호혜적 교환, 나눔, 자급을 원리로 작동하는 DIY, 물물교환, 사회ㆍ가족ㆍ지역을 유지하는 기초인 가사(家事), 돌봄, 봉사활동, 상호부조, 노인이나 병자의 간호, 가정 내 생산과 가공, 자급농업 등을 포괄한다.
<표 1>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과 사회적 협동경제 영역 덕분이며, 화폐경제 부분이 성립할 수 있는 것도 이 영역이 터전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자본주의의 전개과정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습은 이 두 영역을 화폐경제 영역으로 끌어들여 점차 상품화해 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렇게 대책 없는 상품화의 확대는 인류의 생존뿐 아니라 사회적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카트리나 이후의 뉴올리언스다.
자연의 상품화는 지구온난화 등 급속한 기후변화로 이어지면서 초강력 허리케인을 발생시켰고, 그 허리케인은 '화폐경제로 흡수되어 사회적 협동경제 영역이 붕괴된 자본주의의 극지(極地)'는 폭력과 살인, 강간과 방화와 같은 인간성 상실의 현장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아무런 가감 없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바꿔 말해, 한 사회가 그 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곳이 되려면 건강한 대자연의 품 안에서 연대와 협동, 우애와 배려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협동경제의 영역을 확충하는 것이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연과 사회적 협동경제를 구축하는 기반은 누가 뭐래도 농업과 농촌에 있었다. 우리가 자연과 관계를 맺는 접점은 농업이었다. 즉, 농업을 통해 자연의 혜택을 받아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전통 두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상호부조의 공동체문화를 일구는 터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는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농업과 농촌이 급속도로 축소되었고, 현재는 그마저도 비교우위의 상품화 논리에 밀려 고사위기에 처해 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지역이 몰락해가면서 자연스럽게 협동과 공동체의 문화도 침몰하고 있다. 즉, 우리 사회의 근대화는 도시의 물질적 풍요를 얻은 대신에 농업과 농촌을 기반으로 한 자연, 그리고 사회적 협동의 경제를 잃는 과정이었다.
물론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생태환경의 보호와 함께 유기농업을 사회적 기초로 삼고 있는 스위스, 덴마크, 독일 등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21세기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기반으로서의 농업과 농촌을 살려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뉴올리언스의 참극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를 떠올리지 않으려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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