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대중화시킨 이 말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짐승보다 못한 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욕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이런 욕을 할 자격이나 있는 '동물'일까? 1980년대 초 '핵전쟁 방지 국제 의사회'의 독일 지부 초대 회장을 맡은 후 활발한 평화운동을 펼쳐 온 틸 바스티안의 <가공된 신화, 인간>(시아출판사, 손성현·박상윤 옮김)은 인간을 동물에 빗대는 것은 '동물에 대한 모독'이라고 규정한다.
***그 많던 늑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역설적으로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획 짓는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숱한 동물이 '절멸'되었다. 그 중 늑대의 경우는 특히 비극적이다. 대량 학살당한 것으로도 부족해 '잔혹함의 대명사', '악의 화신'이라는 부정적인 것의 상징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유럽 문화관에서 늑대는 악마나 마녀 못지않게 위협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왜 굳이 늑대가 '철천지 원수'가 돼야 했을까?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늑대가 사람과 아주 닮은 동물이라는 데 있다. 늑대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져 살던 포유동물이었기 때문에 인류와 식량과 생활공간을 놓고 경쟁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사회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물로서 근본적으로도 인간과 아주 흡사하다. (늑대가 얼마나 '도덕적 동물'인지는 팔리 모왓의 <울지 않는 늑대>(이한중 옮김, 돌베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인간과 닮은 늑대는 하느님으로부터 '피조물의 왕관'을 전해 받은 인류와 애초에 공존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다. 결국 늑대는 9세기부터 시작된 대량 말살 정책에 이어 거의 절멸 상태에 이른 뒤에는 문화적으로도 말살되었다. 유럽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검은 늑대가 악의 상징으로 많은 회화에 등장했으며 심지어 그림 형제와 샤를 페로의 동화에서도 늑대는 아이를 잡아먹는 악역을 담당해야 했다.
틸 바스티안은 이런 '늑대들이 죽어간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그 이유를 짚는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우리 안의 동물'에게 전가함으로써 스스로가 저지른 잔혹한 행위에 대한 일종의 면책 장치를 고안해 낸 것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삶과 역사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난 뒤에 누가 이 말을 용기 있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극도로 비관적이 된 프로이트가 했던 이 말은 이제 다음처럼 바뀌어야 한다는 게 바스티안의 생각이다. "인간의 가장 끔찍한 적대자는 바로 인간이다."
***애완동물과 식품, 그 이중적 태도**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근대 이후 또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겪는다. 오늘날 보통 사람들에게 동물은 애완동물이거나 식품, 둘 중 하나다. 특히 육류 소비가 증가하면 할수록 음식물의 출처를 점점 더 은폐하는 현상이 함께 진행됐다. 죽은 동물을 먹는 것은 정상이지만 아무도 그 동물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감추고 예쁘게 만들어진' 엄청난 양의 동물이 상 위에 차려지는 한편에서는 기묘한 온갖 애완동물에 대한 '사랑'이 강조된다.
이런 '동물 사랑'의 가장 곤혹스러운 예가 바로 나치 제3제국일 것이다. 제3제국은 권력 장악 이후 8주 만에 동물 학대를 금지하는 내용의 지시를 독일 곳곳에 돌렸다. 인간을 가스실에 몰아넣고 인간의 몸에서 짜낸 기름으로 비누를 만든 집단 수용소의 주창자들이 '동물 사랑'의 적극적인 실천자였던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틸 바스티안이 보기에는 '동물 사랑'을 외치면서도 남반구의 가난한 사람들과 동·식물의 삶의 터전을 식탁에 오를 소를 키우기 위해 파괴하는 '쇠고기 행성'의 보통 사람들 역시 이 제3제국의 행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시금석은 여전히 인간의 식습관에 있다고 확신한다. 육식을 포기하는 것에는 많은 철학적-윤리적, 정치적- 이유들이 있겠지만, 육식을 하지 않는 생활 방식이 (생명의 진화가 인간을 잡식성 동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가 그런 생활 방식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 그런 방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선택은, 이를 테면 지속 가능한 경제 방식을 지지하는 것이나 몇몇 빈곤 국가들의 대외 부채를 즉각 면제해 줄 것을 촉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역량이다. 자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함께 사는 세상을 성찰할 줄 아는 존재, 바로 이러한 성찰력으로 인해 다른 모든 동물들과 달라진 존재의 역량이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 넘나들기, 그 파국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최근 들어 다시 한번 전복되려고 하고 있다. 생명과학의 발전으로 끊임없이 그 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 역시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이종 장기 이식(Xenotransplantation)'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장기 이식에 이어 이제 과학자들은 돼지, 원숭이를 통해 문제가 생긴 인간의 장기를 '새로운 부품'으로 교환할 것을 꿈꾼다. 지금까지의 시도는 대개 실패로 끝났지만 앞으로 그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인간 수선업'을 위해 희생돼야 할 수많은 동물을 걱정하다가는 '의학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가로막는 반동으로 찍힐 게 뻔하다. 그렇다면 현직 의사인 틸 바스티안의 다음과 같은 걱정은 어떤가?
"아프리카 원숭이 개체군들 내에서 서식하고 있는 어떤 바이러스가 20세기 초에 종의 경계선을 뛰어 넘었다. 이 바이러스는 1981년부터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라는 이름으로 서글픈 명성을 획득했으니 이것이 바로 현대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전염병인 에이즈의 병원체다. (…) 인간은 다른 생명체를, 예를 들어 유전자 조작 돼지를 무슨 '부품 창고'처럼 생각해서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종의 경계를 뛰어넘는 그 수술을 이용하여 동물 속에 있던 미생물이 '무임 탑승객'으로 인간의 몸에 들어올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진보를 표방했던 시도가 엄청난 파국을 몰고 온 사례가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인류의 잿빛 미래, '외로운 인간'**
틸 바스티안은 '동물 해방'을 부르짖는 이들과도 선을 긋는다. 그 대신 그는 잊힌 사상가 알버트 슈바이처가 1923년에 펴낸 <문화와 윤리>를 상기시킨다. 그가 생태주의자의 원조로 꼽는 슈바이처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공동체'를 지향하면서도 결코 '갈등 없는 조화', '행복한 미래'라는 식의 조야함으로 빠져들지 않았다.
"생명에 대한 경외의 절대적 윤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새롭고 독창적 방식으로 현실과 대결하게 만든다. 이 윤리는 인간을 위해 갈등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만큼 윤리적일 수 있는지, 얼마만큼 생명 파괴와 손상의 필연성에 굴복할 것인지, 그리고 얼마만큼 그 책임을 자신이 떠맡을 수 있는지를 어떤 상황에서든 스스로 결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슈바이처의 가르침을 외면할 때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지구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외로운 인간'. 그것이 바로 인류의 잿빛 미래의 모습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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