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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12> 문승근과 이우환

***'재일(在日)의 인권전'**

내게는 이 '재일의 인권전'에서 처음으로 안 작가가 많았다. 그 가운데에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맹)의 조직에 관계하고 있거나, '조선 국적' 소지자인 소위 '총련계' 작가가 적지 않았다. 총련계 작가의 작품의 대부분은 나에게 낯설었다.

나 자신이 총련계 조직이나 커뮤니티와 관계가 희박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적'을 가진 '민단계'의 재일 조선인이며, 더욱이 그 안에서도 오랫동안 정치범이라는 반국가 분자의 가족으로 고립된 속에서 지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총련계 작가의 작품을 돌아보면서, 나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무엇보다 우선 한국 땅에서 이런 전람회가 가능해졌다는 것에 대한 감개. 이 전람회를 나 자신이 보고 있다는 사실이 지니는 비현실감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와 같은 귀중한 기회가 마침내 가능해졌다는 것에 오히려 석연치 않은 거리감과 같은 것을 느껴 생각에 잠겨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의외의 감정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양규를 비롯한 몇 명을 제외하고 전시된 작품 자체에서 받는 감흥이 의외로 적었던 것이다.

재일의 인권전의 기획은 당시 이 미술관 학예연구원이던 김선희 씨(현재 모리 미술관)의 각고의 노력에 의해 실현되었다. 남북 대립이 격렬했던 군사정권 시대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국가보안법이라는 법률에 의거해 북한 정부나 조선로동당은 '반국가 단체'로 규정되어 있으며 조총련도 거기에 포함된다. 군사 독재정권 체제가 일단 종식된 것으로 간주되어 민주화를 표방해 대통령에 취임한 노태우 정권 시대 말기에조차 신학철이나 홍성담과 같은 한국의 민중 화가들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홍성담은 그때 수사기관에서 20여 일 동안 '물고문'을 받아, 그 경험을 훗날 작품화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지 불과 10년 후에 한국이라는 장소에서 총련계 작가를 포함한 재일 조선인 작가의 대규모 전시를 시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1990년대의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가 있었기에 또한 광주라고 하는 특별한 장소였기에 전시는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곤란은 정치적인 측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선희 씨는 전람회 도록에서 이 기획은 "재일 한국인의 유민사를 반영"하고 있으며 "대두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의 아이덴티티 문제를 그들의 미술을 통해 검색해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썼다. (여기서 '재일 한국인'이란 용어는 '재일 조선인'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기획은 한국에 있어서의 기성의 재일 조선인관에 대한 도전임과 동시에 미술 관계자를 포함한 한국 국민 일반에 침투해 있는 냉전시대의 무의식 속에 자라 온 남북 분단을 전제로 한 국민관과 단일 언어, 단일 문화, 나아가 단일 혈통이라는 관념을 전제로 하는 폐쇄적인 민족관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와 같은 의욕적인 물음은 적어도 그 시점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 기획은 한국의 일반 미디어는 물론 미술계에서도 별반 깊은 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곤란은 원래 '재일 조선인 미술가'란 누구를 가리키느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전람회 출품작은 크게 1세와 2세 이하 세대의 작품으로 나뉘는데 특히 총련계 작가들이 많은 것은 민족학교의 운영 등 조선 민족의 역사, 문화, 언어를 지키는 활동의 중심적 역할을 해 온 것이 조총련이기 때문이다. 현재 재일 조선인 전체 중 일상생활에서 본명을 쓰고 있는 사람은 20% 미만이라고 하는데 그 대부분이 총련계다. 당연히 스스로 출신 민족을 밝히는 아티스트도 총련계에 많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은 사람의 대부분이 일본 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인 미술가'로 취급돼 그 작품은 의문의 여지없이 '일본 미술'의 틀 안에 자리매김 된다. 내 눈에는 이 역시 식민주의적 착취의 한 형태로 비친다.

즉 이 기획에서는 재일 조선인 중에서 쉽게 눈에 띠는 부분의 작품이 전시되었던 것이다. 그 이외의 부분은 아직 어두움의 저편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보이는 부분만을 보고 있어서는 재일 조선인 전체를 본 것은 되지 않는다. '나는 재일 조선인'이라고 나서는 사람만이 재일 조선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자신은 누구인가를 언제나 자문하고 있는 존재가 재일 조선인인 것이다. 재일 조선인이 스스로 이름을 말하는 것을 곤란하게 하고 재일 조선인이라는 존재를 잘 안 보이게 하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고려하면 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한 전체야말로 재일 조선인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재일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그들을 보라는 건가. 여기에 미술전이 직면한 곤란이 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재일 조선인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활자구**

재일의 인권전에서 처음으로 그 존재를 안 작가의 한 사람이 문승근(文承根)이다. 출품 작품은 <활자구>. 문자 그대로 표면이 활자로 뒤덮인 야구공 크기의 금속구이다.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보았다. 그 때는 그 이상의 인상은 없었다.

일본에 돌아와 도쿄의 모리 미술관에서 일하게 된 김선희 씨와 알게 되어 그녀가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문승근의 작품을 전시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이 작가의 약력을 알게 되면서 내 속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갔다.

하정웅 씨의 회상을 빌려 문승근의 생의 궤적을 더듬어보기로 한다.

그는 1947년 이시카와현 고마츠시에서 태어난 재일 조선인 2세다. 그가 네 살인가 다섯 살 때 일가는 교토시의 후다노츠지로 이사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직물 등을 판매하러 도쿄 쪽의 하치오지나 사가미하라 등을 전전했고 어머니는 방적공장에서 일했다. 어린 문승근도 두부를 팔러 다녔다고 한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 경부터 아버지의 사업이 성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신장의 병이 발견됐다. 이력에는 1961년의 '요로결석으로 인한 좌신장 제거술'에서 시작해 1982년 '담낭암에 의한 전신쇠약으로 영면'이라는 한 줄로 맺어지기까지 병력과 수술의 긴 기록이 이어진다. 향년 35세였다.

문승근의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일가는 오사카로 이사했다. 아마도 병약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오사카 부립 덴노지 고교를 2학년으로 중퇴한다. 그 후 오사카 시립미술관 부속 미술연구소에서 데생 등을 배웠다. 19살 때 다시 교토에 돌아와 적십자병원에 입원했고, 그 뒤는 신장투석을 계속하며 입·퇴원을 거듭했다.

"교토시에서 친척이 경영하는 나이트클럽 '교차점'에서 벽화를 그렸다"라거나, "니시다이지구조에 있는 자택 1층을 주거 겸 아틀리에로 쓰고 있었다"는 하정웅의 기술은 특히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교차점'이라는 가게 이름은 우리 아버지가 경기가 좋았던 시절 밤에 놀러 다녔던 가게 중의 하나로 들은 기억이 있다. 후다노츠지나 니시다이지구조와 같은 지명은 내 속에서 소년시대의 구체적인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적십자 병원에는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도 신세를 졌다.

나는 1951년 태생으로 문승근과 거의 같은 세대다. 같은 시대, 같은 교토의 거리에서 같은 재일 조선인인 문승근이라는 젊은이가 병마와 싸우며 예술을 향한 험난한 길을 기어가듯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가 쓰던 이름은 '후지노 노부루(藤野登)'였다.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며 설령 만났다고 해도 재일 조선인2세가 지니는 갈라진 잔 거스러미 끝같이 거친 자의식에 가득 차 있던 두 사람이 친해지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1968년 21세의 문승근은 구타이(具体) 미술전에 출품했고, '후지노 노부루 전'을 열었다. 재능을 크게 촉망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에는 '국제 청년미술가전'에서 미술출판상을 수상했다. 그때 대상을 수상한 작가가 이우환(李禹煥)이었다.

이우환의 글 가운데 '후지노에서 문승근으로'라는 회상문이 있다.

"장대비가 내리는 심야에 도어를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 흠뻑 젖은 남자가 '후지노라고 합니다만 말씀드릴 게 있어 찾아뵈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교토에서 상경했다고 했다. 가까운 심야찻집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의 내용인즉, 자기는 실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2세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인으로 행세해 왔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한국인이라고 밝힐 용기는 없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종교법인) 소카 학회에 들어가 종교에서 구원을 찾기도 했고 귀화도 생각했지만 심정적으로 결론이 나오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나한테 상담을 바라고 찾아 왔다는 것이었다."

1969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도쿄의 사립대학 1학년이었다. 김희로(金嬉老)가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폭력단원을 죽이고 스마타쿄의 온천여관에서 농성을 한 것이 1968년 2월. 야마무라 마사아키(山村政明, 본명 양정명)가 와세다대 문학부 앞의 아나하치만 신사에서 분신 자살을 한 것이 1970년10월. 1967년과 68년에 모국 유학의 길을 택한 나의 두 형이 한국에서 정치범으로 체포된 것이 1971년 4월이다.

그 시절 나의 주변에는 문승근처럼 고뇌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세대의 재일 조선인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나 자신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거나 귀화를 생각했던 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의미에서 혜택 받았기 때문일 뿐이다. 그것을 지금은 잘 알 수 있다.

'후지노 노부루'라는 일본 명으로 미술계에서 인정받고 있었던 그는 어지간히 심정이 복받쳐 거의 면식도 없는 이우환에게 고뇌를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우환이 보인 태도는 엄격한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한마디도 따뜻한 말을 걸 수 없이, 입에서는 비정하기 짝이 없는 말만 튀어나왔다. 그 정도의 괴로움이나 고민 따위엔 흥미도 없고 듣고 이야기를 해줄 여유도 없다.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알 바 아니지만, 자기 이름 하나 밝히지 못하는 인간이 진정한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술회에 이어 이우환은, 그런 말과는 정반대로 자기도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었고 끌어안고 같이 울부짖고 싶은 기분이었다고 쓰고 있다. 다음날 오후 이우환이 자신의 개인전 회장에 가보니, 입구의 방명록에 '후지노 노보루'가 아닌 '문승근'이라는 본명의 기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1970년대 중반 경부터 문승근은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우환의 질타는 문승근에게 가혹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귀중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우환이 그에게 품은 동정의 마음도 진실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이우환이 그의 고뇌를 어느 만큼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결론을 보류하고 싶다. 그리고 그 양자의 차이야말로 지켜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 *

이우환은 1936년 경상남도의 함안에서 태어났다. 독서인의 가계였던 듯, 그의 집에서는 아이들은 서너 살 때부터 고전적인 한시와 서화를 배웠다고 한다. 재일 조선인 숙부를 의지해 1959년에 일본에 와 일본대학 철학과를 다녔다. 그후 '모노파'의 중핵을 차지하는 미술가로 인정받아 1970년대부터는 세계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지금은 백남준과 함께 한국 미술계의 '큰 별'이며 국제적 스타와 같은 존재다.

나는 2003년, 서울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그가 애장해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왔던 여러 예술품도 자료로서 전시되어 있었다. 그 진열 케이스의 제일 마지막에서 전형적인 조선왕조 시대의 문인화를 보았을 때 '아, 이것이야말로 내게 없는 것이다'라고 느꼈다. 그것이 이우환에게는 있고 나나 문승근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우환은 조선어가 모어이며 '조선문화'의 소양도 풍부한 1세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가 모어이며 '조선문화'에 대해 기본적인 소양조차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바라지도 않고 '일본문화'에 젖어버린 것이 나나 문승근과 같은 재일 조선인 2세다.

문승근의 고뇌가 일본사회에 의해 강요된 근거 없는 열등감에 의한 것임에는 틀림 없지만, 예술가로서의 고뇌는 그 수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그것은 '문화'를 빼앗긴 자가 빼앗겼다는 그 지점에서 문화 창조에 참가한다는 것에 따르는, 더욱 깊은 고뇌였던 것이 아닐까. 이우환은 이 점을 통찰하고 있었을까.

안타까운 건 문승근 자신이 자기의 고뇌의 소재를 그렇게 자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 그러기에 장대비 내리는 심야에 예고도 없이 사람을 방문하는 과격한 행동으로밖에 고뇌를 표현할 방법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 * *

<활자구>는 1974년의 작품이다. 생전의 문승근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나는 문필가는 아닙니다만, 활자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어, 활자를 가지고 정보사회라는 것을 총괄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에 박아 넣은 활자는 7600자 정도입니다. (…) 오브제로서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 1년 후 구체에 박아 넣은 활자에 잉크를 칠해 종이 위에 굴려 그 궤적을 작품으로 했습니다. 구체가 종이 위를 구를 때마다 활자의 궤적이 달려 약간 힘을 주기만 해도, 계속해서 정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궤적이 끊임없이 겹쳐져 마지막에는 새까맣게 되어 버리지요.

2004년 9월 나는 또 광주를 찾았다. 몸 상태가 나빠 열이 나는 바람에 숙소에서 사흘간 앓아누워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하고 광주시립미술관을 향했다. 거기서 열리고 있던 '문승근 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활자구>와 그것이 종이에 남긴 궤적도 전시되어 있었다. 작은 금속구의 표면에,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연하게 활자를 심어가는 작업. 경탄할 인내력과 집중력에 의해 완성된 그 작은 물체에는, 뿌리가 없고 토대도 없다. 외적인 힘에 의해 마음대로 굴려지는 존재. 구르면서 흔적을 남겨가는 존재. 그것은 디아스포라적 생의 암시적 은유인가.

유리 케이스 속에 안치된 금속구는 마치 문승근의 유골을 담은 뼈단지처럼 보였다. <Untitled>라는 일련의 작품은 첫눈에는 서예의 먹 자국과도 같으나, 거기에는 어렴풋이 거리의 풍경이 떠올라 있다. 일상의 풍경을 흑백사진으로 찍은 뒤 아직 현상하지 않은 감광지 위를 현상액에 담근 굵은 붓으로 살짝 씻는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 일상 풍경은 잘 보면 내게도 본 기억이 있는 교토시의 번화가다. 버스 같은 것도 보인다. 그러나 그냥 보면 어디인지, 언제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것이 그의 눈에 보였던 풍경이었을까. 모든 것이 소원하고 아름답다. 참 지적이고 단정하다. 그것이 예쁘면서도 슬프다.

왜 그렇게도 고뇌했던 인간이 이렇게 정돈된 표현을 하는가. 왜 좀 더 끈질기게, 거친 몸짓으로 자기의 고뇌를 분출하지 않는가. 실은 그 심정은 그대로 내가 재일 조선인이라는 존재 일반에 대해 안고 있는, 사랑스러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감정이기도 한 것이다.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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