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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회전문을 열고"

김민웅의 세상읽기 <111>

열기가 한껏 솟아오른 뒤에, 기다리던 손님처럼 찾아오는 바람의 신선함은 계절의 신비입니다. 그건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시간의 약속이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제대로 지켜내기 어려운, 우주 궤도의 침착하고도 어김없는 일정관리인 셈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흔들릴 수 없는 '중심의 성실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래전 옛 사람들은 이 절기의 좌표를 하늘의 움직임에서 찾아내려 했습니다. 변화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그래서 지상의 현실에 숨어 있는 논리를 읽어낼 수 있는 고리를 잡아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늘을 보고 땅을 아는, 그런 비밀스러운 깨달음에 대한 열망이 숨쉬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뜨거웠던 여름의 바다에도 서서히 냉기가 스며들어 벗은 몸으로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고, 서늘한 숲 속의 그림자에서 가을의 기척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세월이란 이렇게 거쳐야 할 자리를 반드시 거치면서 자기의 나이테를 그어나갑니다. 그건 동일한 궤도를 반복해서 오가는 것이기도 하면서, 전혀 다른 일정표와 전혀 다른 경유지를 지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와 본 듯 한 곳도 사실은 처음 방문하는 마을이며, 지난 해 여름이 바뀌던 길목에 서서 바라 본 하늘의 별은 지금 내가 본 별과 같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동일한 존재의 변화는 그런 '반복되는 순환의 나선형 진전'을 자신의 신화로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를 바 없는 동일한 나이지만, 그러나 그 나는 또한 서로 같지 않은 존재라는 것과 일치하는 논법일 것입니다. 하여, 세월이 쌓여가는 우리 삶의 표정은 과거의 시간과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그만큼 깊고 풍요해진 차이를 갈망할 것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젊기를 바라면서도 그 젊은 시절에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것들은 이미 이루어낸 자리에 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그래서 겨울의 소리가 다가오는 그런 반복이 결코 낯선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문을 여는 자가 됩니다. 겉으로 보면 회전문이지만, 사실은 그 봉인된 문들을 차례차례 열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의 연속인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벗들이 수십 년 만의 재회로 서로의 늙음과 서로의 달라지지 않음을 동시에 확인하는 절차는 그래서 우리가 통과해 온 우여곡절의 여정에 대한 나눔인 듯 합니다. 아,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서로의 인생역정에 대해 따뜻한 우애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된 것에 대한 감사가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르기만 하다면, 그래서 변화되지 않은 것을 찾아낼 수 없게 된다면 우린, 너무도 서글퍼지고 말 것입니다. 달라져야 할 것이 있고,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 이걸 알면, 우리는 이 거대한 우주가 한 치도 틀리지 않는 궤도를 유지하면서 우리와 함께 영원의 시간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는 것에 감격해 할 것입니다.

그런 한편,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지만, 그와 동시에 하늘 아래 새 것은 늘 태어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인생이 아니라, 나의 새로움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경이로움에 기뻐하는 그런 여름의 마지막 자락이 되었으면 합니다. 별이 스치는 밤이 유난히 마음에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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