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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그 아쉬운 뒷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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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그 아쉬운 뒷 표정"

김민웅의 세상읽기 <103>

지루한 논쟁처럼 언제 끝이 날까 했던 여름도 이제 막바지 고비를 넘기고 있는 듯 합니다. 바람과 비를 한껏 품은 먹구름을, 마치 연병장의 병사들 같이 도열시켰던 장마전선도 조만간 해산(解散)의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말복(末伏)의 푯말이 한적하게 서 있는 시골 어느 정거장도 곧 지나게 될 듯 합니다.

이런 때에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눈을 부라리며 몰아쳐 오는 태풍(颱風)입니다. 옆으로 비켜나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어느 으슥한 골목길에서 나온 불량배마냥 어깨를 뒤뚱거리면서 사람이 사는 마을을 꼭 거쳐 가야겠다고 하면 이를 말리기도 어렵고, 되받아 치기는 더더욱 힘겹습니다. 아무도 막아서지 않았던 바닷길을 통과하면서 슬슬 오만해져서 이거 너무 싱겁다고 여기고, 자신의 위력이 얼마나 되는지 굳이 확인하겠다고 덤비면 그건 실로 곤란한 일이 됩니다.

선착장에 박아둔 말뚝에 잘 길들어진 양떼처럼 배들을 잡아묶고, 차마 풀지 못할 불가(佛家)의 인연인 듯 배와 배끼리 서로를 얽어맨다고 해도 이 거대한 풍파의 방문은 결코 반갑지 않은 기습입니다. 그건 다만 바다와 가까운 어촌의 평화로운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이 아니라, 논과 밭에서 힘들여 일구어낸 희망도 자칫 꺾어버리고 마는 폭력이 되어버립니다. 불가항력의 테러입니다.

그 난폭함이 쓸고 지나가는 자리는 우리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들로 채워지고 있는가를 새삼 일깨우기도 하지만, 절망이 또한 얼마나 쉽게 찾아오는가를 알게 하기도 합니다. 실로 절망은 그 자체로서는 우리에게 독이 됩니다. 그리고 그 독은 너무도 빨리 퍼지게 되면, 아름다웠던 시절의 얼굴과 몸매를 망가뜨리고 말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름은 대장간 풀무질의 빨갛게 달군 열기를 이겨내면서,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속사람의 기운을 새롭게 북돋우는 계절이 아닌가 합니다. 잘만 하면, 허해지기 쉬운 몸과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를 길러내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활력만큼 나지 않는 힘을 안타까와 하면서도, 무엇이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자신의 진면목을 새롭게 들여다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여름은 우리에게 다른 계절과는 사뭇 달리 옷을 벗을 자유를 주는 모양입니다. 맨몸이 자연과 맞닿아 이루는 즐거움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건 다른 인위적 장치와 무장 없이, 자신의 진실만을 가지고도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묻는 수행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내공을 수련하는 자의 기쁨을 알게 하는 무대가 주어지는 때일 수도 있습니다.

빠른 속도와 변화무쌍함을 신조로 알아가게 하는 시대에서, 아무런 동요도 없이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가는 법을 익힌 자는 결국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가는 것이 꼭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가는 길이 바로 자신만의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월의 풍파가 흔들지 못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시련이란 당장에 견뎌낼 때에는 언제나 힘겹습니다. 여름의 작열하는 기운도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가만 있어도 솟아오르는 땀으로 온몸이 적셔질 때에도 그건 그리 즐거운 경험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우리의 몸과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익어가고 있다는 것, 여름의 예기치 않은 선물이 아닌가 합니다.

이 아름다움을 기대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뒷모습을 보이고 가는, 그래서 이제는 짐짓 할 일을 다한 자인 양 하는 그런 여름 오후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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