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권력 이익을 뒷받침하던 지식인들은 비판하고 반체제인사들은 존경하던' 과거 미국 지식인들의 판단 기준이 왜 요즘의 미국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행동하는 지성' 노암 촘스키는 미국의 체제 권력을 뒷받침하기만 할 뿐 그 해악을 파헤치는 일에 무신경하기 짝이 없는 요즘 미국의 지식인들에 대해 '지식인으로서의 도덕적 책무'를 거부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촘스키 "지식인들이여,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
'세계의 양심'으로서 현존하는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황소걸음 펴냄, 강주헌 옮김)에서 도덕적인 행위자로서 지식인이 갖는 책무를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기야 이런 정의라면 그동안 숱하게 듣고 봐 왔다는 점에서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촘스키는 역시 촘스키 답게 이런 '뻔한' 소리를 다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단히 진지하게 말한다. "우리가 속한 지식인 계급의 기본적인 실천원리가 이 기초적인 도덕률조차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지금 미국 지식인들은 '스탈린 체제 하의 러시아'에 적용하던 기준을 미국에는 적용하지 않는 도덕적 모순을 보이고 있다. 즉, 과거 소련에서 권력 집단이 내세우는 가치 체계를 옹호하면서 그들의 이익을 뒷받침하던 러시아 지식인들을 '정치위원' 쯤으로 경멸하면서 이런 요구를 거부해 핍박받던 러시아 지식인들을 반체제인사로 존경해 왔는데 왜 미국 내에선 '정치위원'은 존경하면서 '반체제인사'에 대해선 간악하다고 손가락질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부시 행정부의 명분없는 이라크전과 이스라엘 편애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단의 '양심'들이 비난받는 미국 지성계의 풍토는 대단히 모순된 것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부자 주머니 채워주는 국방에 치중 '미국 민주주의'의 기만 파헤쳐**
촘스키의 <지식인의 책무>는 크게 '지식인의 책무', '목표와 비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민주주의와 시장' 등의 세 장으로 나뉘어 있다. 이들 내용들은 1995년도에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해 세 차례 강연한 내용을 재정리한 것.
촘스키는 이 글들에서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새로운 시대의 약속'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과거 기억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시대의 약속'이란 냉전이 끝나면서 등장한 것으로 "민주주의와 열린 시장의 승리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도래하고 있으며 미국은 이를 위한 파수꾼이자 모델"이라는 주장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헨리 키신저나 새뮤얼 헌팅턴 등은 미국이 다른 나라 정책에 비해 민주주의, 인권, 시장을 훨씬 중시한다고 강변한다. 미국의 이타적인 정책이 지나칠 정도로 선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촘스키는 미국의 본 모습이 "그게 아니다"면서 현상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미사여구로 포장된 미국의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기만적 수사인지, 그리고 그런 사실이 냉전 종식 이후 최근의 일이 아니고 미연방 헌법이 제정될 때부터 계속되어 온 일관된 정책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익조차 미국인 전체가 아니라 가진 자들만의 계급을 위한 이익이라고 경고한다.
"미국이 상황에 따라 적절한 구실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훼손해 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얼마 전만 해도 이런 행위들은 냉전이란 이름으로 합리화됐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사례들을 하나씩 점검해 보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합리화다."
"괜스레 과거를 들춰서 우리가 무력과 전복과 억압을 원칙적으로 거부한다면서 레이건 시대에 중앙아메리카에서 테러 전쟁을 벌여 그 나라들을 황폐화시키고 고문으로 사지가 훼손돼 죽어간 수십만 구의 시신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으면 골치 아프지 않겠는가. 또 케네디 행정부가 국제적 협력까지 강요하면서 쿠바를 압박하고, 아이젠하워가 시작했던 테러국가에 대한 라틴 아메리카식 지원에서 하루 아침에 파괴적인 침략으로 전환해 남베트남을 무자비하게 공격한 사례를 따지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촘스키가 바라보는 미국은 또 세계 모든 나라의 국방비와 맞먹는 비용을 국방에 쏟아 붓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국방이야말로 '부자들이 알량한 복지국가에 호통 치면서 공공기금으로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금고'이기 때문이다.
***"변화 위해 행동하라"**
촘스키는 이 상황에서 행동을 요구한다. "기만과 왜곡의 그림자를 뚫고 들어가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고 첫 단계"라면서 "그 후 민중의 힘을 조직화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물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 이 책을 쓴 나름대로의 이유를 다음같이 밝히고 있다.
"요즘은 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운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희망의 시대, 낙관의 시대로 바꿔가야만 한다. 나는 인간의 본성과 권력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이 책이 언젠가부터 추악한 얼굴로 변해버린 민주주의를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리고 기본적인 인권마저 무시되는 현실을 뒤바꿔야 할 절박한 필요성, 그리고 정직한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앞으로 전진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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