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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박지성이 일본에는 우라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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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박지성이 일본에는 우라와가 있다

[프레시안 스포츠] 72번째 열린 한일전의 풍경

박지성에게 일본 기자가 일본 축구의 현주소에 대해 물었다. 박지성은 일본의 '뉴 에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혼다 게이스케(CSKA 모스크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훌륭한 선수라고 들었다."

마치 박지성이 네덜란드에서 활약할 때, 유럽 빅리그에서 뛰는 스타급 선수들이 박지성에 했던 바로 그 뉘앙스의 답변이었다. 사실상 이 한 마디로 한국 축구는 일본을 이겼다. 박지성의 말은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박지성이 마냥 부러운 일본

경기에서도 박지성의 활약은 눈부셨다. 전반 6분 군더더기 없는 드리블에 이어지는 한 템포 빠른 슈팅은 일본 골 문을 열었다. 선취득점을 기록한 박지성은 자유롭게 상대 진영을 휘저었다. 일본 선수에 공을 뺏기면 끝까지 쫓아가 이를 저지하는 악착스러움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박지성은 경기 뒤 일본 축구를 이렇게 평가했다. "일본은 10년 전보다 수준이 낮아졌다." 월드컵 출정식이나 다름없던 한일전에서 패한 일본, 더욱이 오카다 감독이 일본 축구협회 회장에게 "이대로 계속 내가 감독을 해도 좋겠습니까?"라는 말까지 나온 일본 축구를 겨냥한 직격탄이었다.

일본 언론은 박지성을 마냥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 봤다. <닛칸스포츠>는 "일본에는 세계 수준의 선수가 없다. 그러나 한국에는 박지성이 있었다"고 했다. 한일전을 중계한 일본 방송사는 박지성을 '아시아 넘버 원 플레이어'로 소개했다.

일본 축구는 초상집이다. 오카다 감독의 사퇴 소동에 대해 일본 언론은 "선수들과의 신뢰마저 깨졌다"며 '오카다 재팬'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반면 한국에서는 남아공 월드컵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치솟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2010년 월드컵에 나가는 한국 대표팀은 역대 최고다"라는 이영표의 말이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프랑스 평가전에서 얻은 자신감이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직접적 원동력이 됐다는 점에서 한국 축구는 이번 한일전에서 얻은 게 많다. 6월 4일 펼쳐지는 스페인과의 평가전에서 '자신감 게이지'를 좀 더 올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보인다.

▲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24일 열린 한-일 축구대표팀 평가전에서 박지성 선수가 일본 수비수에 둘러싸여 볼을 다투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축구의 성지'를 만든 우라와 레즈

이렇게 큰 희망과 가능성을 안겨 준 한일전을 보는 동안 한 가지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캐스터는 한일전이 펼쳐진 일본 사이타마 경기장을 '일본 축구의 성지(聖地)'로 표현했다.

아주 오랫동안 '일본 축구의 성지'는 도쿄 국립 경기장이었다.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라는 멘트로 유명한 '도쿄 대첩(1998년 월드컵 예선 한일전)'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위치는 서서히 사이타마 경기장으로 옮겨왔다.

사이타마 경기장에서 펼쳐진 A매치에서 10승 7무 1패로 일본의 승률이 매우 높았다. 한국이 24일 이 무패 신화를 깨기 전까지 사이타마는 '일본 축구의 성지' 역할을 충실히 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사이타마 경기장이 적어도 팬 동원능력에 있어서만큼은 아시아 최고의 축구 클럽인 우라와 레즈의 홈구장이기 때문.

우라와 레즈는 2009년 평균관중이 무려 4만4210명. 관중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라와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위해 만들어진 대규모 경기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팀이다.

2부리그로 떨어졌던 2000년에도 약 1만7000명의 평균 관중 수를 기록한 우라와 팬들의 축구 사랑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우라와가 J리그 축구 클럽이 될 수 있었던 건 미쓰비시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아마추어 리그인 일본 사커 리그(JSL, 1965년 발족)의 원년 멤버였던 미쓰비시는 1993년 J리그 출범과 발맞춰 우라와를 연고지로 택했다.

도쿄의 베드타운 역할을 한다는 것 외에 별 알려진 게 없었던 우라와 주민들은 우라와 레즈를 통해 결집했다. "우리도 뭔가 한 번 해보자"는 움직임이었다. 늘 도쿄라는 일본의 중심을 배회하던 '주변인'들의 도시가 '축구 도시'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라와 시는 2003년 오미야 시와 합쳐지면서 사이타마 시로 탈바꿈했고, 사이타마 경기장이 홈이 되자 전성기가 찾아왔다. 2006년엔 J리그 챔피언이 됐고, 이듬해엔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섰다.

2007년 성남 일화와 우라와 레즈는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격돌했다. 6만3000명의 우라와 관중 앞에서 두 팀은 승부차기를 했다. 성남 선수들이 킥을 하기 전 우라와 팬들은 깃대를 흔들며 키커의 혼을 빼놓았다. 국가대표 경기에서나 느낄 수 있는 우라와 팬들의 환호성과 열렬한 응원에 성남 선수들의 신경은 곤두섰고 결국 경기에 패했다. 12번째 선수로 불리는 팬의 힘이 어떻게 경기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지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었다.

몇 년 전 우라와 팬들이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원정경기를 보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일이다. K리그 한 팀에서 경기 전 팬들에게 구단 기념품과 응원도구를 나눠주고 있었다. 우라와 팬은 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왜 구단이 기념품을 나눠 주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클럽의 발전을 위해 다 사는데…."

야구 중계가 끝나야 중계가 시작된다고 해서 '후생리그(후반전만 생중계되는 리그)'라는 낙인이 찍힌 K리그와 쓸쓸한 관중석. 사이타마 경기장을 진정한 '일본 축구의 성지'로 만든 우라와 레즈. "한국에는 박지성이 있다"고 부러움을 표시한 일본에 "일본에는 우라와가 있다"고 답해주고 싶은 한일전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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