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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 대중을 소외시킨 권력에 대한 끝없는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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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연정', 대중을 소외시킨 권력에 대한 끝없는 집착

[기고] '아래로부터 열망'을 배제한 연정 발상

위기는 위기인가보다. 끝없는 지지율 하락에 고심하던 집권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권력구조의 변화 문제'를 전면에 들고 나왔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귀결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으나,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과거 집권세력들도 위기에 처할 때마다 권력구조 재편을 그 처방으로 내놓았다는 점이다. 물론 지난 파시스트 지배 시기에 지금 집권하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재야'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광주에서의 학살(genocide)을 통해 집권한 신군부 파시스트 권력이 1983년 유화국면 이후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이원집정부제'를 시도한 바 있었으며, 여소야대 국면에 직면한 노태우정권 또한 김영삼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우파'와 내각제를 매개로 정치적 위기를 해소한 바 있다. 3당합당이 바로 그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세력 또한 이러한 타협을 계기로 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좌파'가 내각제를 매개로 DJP연합을 성사시켜 집권했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거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파기에 의해 모두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난 2002년 대선에서 재집권을 위해 또 다시 국민통합21과 후보를 단일화했다. 선거 전날 국민통합21의 협약 파기로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그 결과 독자집권이라는 뜻하지 않은 횡재를 얻었지만 역시 '권력분점에 대한 합의'가 이 협상의 매개 고리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집권해 오늘에 이른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집권 후반기를 맞아 한국정치의 '비정상성,' '민주주의의 위기'를 운위하며 또 다시 권력구조의 변화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집권한 세력'이 그것도 그들의 수장인 대통령의 진두지휘 아래 '정치의 비정상성'과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으니 역설적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는 열린우리당 내부도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권력의 흐름과 향배에 민감한 이들은 곧 코드를 조율하며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년도 지자체 선거와 선거법 개정이 연정제기의 목표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으나 그 최종목표는 독점이든 분점이든 재집권일 것이다. 그냥 내뱉은 무심한 말로 지나칠 수도 있으나 연정의 대상에 한나라당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말꼬리에서 재집권의 강한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비정상성과 위기'를 심화시킨 주체가 한나라당인데, 그 진위야 어떻든 연정의 대상에 그들도 포함될 수 있다니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위한 연정인지 정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집권세력이 내세우는 연정의 구체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첫째, 지난 '여대야소'가 '여소야대'로 바뀌면서 정국운영에 치명적인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행정수도법, 국방부장관에 대한 '정략적 해임결의안' 제출에서 보이듯 한나라당의 발목잡기로 정부정책이 제대로 추진될 수 없고, 나아가 '비정상적 정치'가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고질적 지역주의가 한국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주의가 한국정치의 '비정상과 위기'를 재생산하고 있는데, 그것의 해소를 위해 선거제도를 포함한 권력구조의 변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 대중은 이러한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봉황의 높은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유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비정상성'과 '위기'의 근원을 잘못 진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대중은 집권세력이 비정상성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여소야대의 장애'에 대해 그렇다면 탄핵정국을 경과하며 '민주주의를 지키라고 만들어준 여대야소'의 시기에 과연 한 일이 무엇인지 되묻고 있으며, 나아가 그들의 직무유기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집권세력 스스로 2002년 대선에서의 독자집권을, 탄핵정국 이후 만들어준 여대야소를 '개혁에 대한 대중열망'의 표현으로, '민의에 의한 민주주의의 승리'로 해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들이 보였던 모습은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혁'이라는 말로 개혁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중의 표와 지지를 모으기 위해 그렇게 세뇌시켰던 '4대 개혁입법'은 지금 어느 구석에, 어떤 모양으로 처박혀 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집권 이후 그들이 일관되게 추진했던 개혁은 노동시장에 대한 것이 주조를 이루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수장은 얼마 전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한 바 있다. 시장에 넘어갔으니 이제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의 지배적 영향력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특히 글로벌 자본으로 성장한 유수 재벌들의 정치적 힘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러한 선언은 그나마 근대 정치가 외피로 삼고 있는 최소한의 공공성마저 외면하는, 자신들이 '신자유주의 경쟁국가'의 현신임을 자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발언의 진위가 무엇이든 스스로의 계급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한국정치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초유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서민들'이 재벌, 귀족정당인 한나라당을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생각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까닭에 'IMF사태' 이후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눌려 있는 노동자, 농민, 빈민, 사회적 약자들의 외침은 집권세력에게는 다른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신과 타워크레인에서의 목숨을 건 단식,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방 한 칸을 지키고자 사투를 벌이는 빈민들의 옥탑농성, 천정부지의 부동산 가격 폭등에 좌절하는 서민들, 난개발에 파괴되는 생태환경,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음에도 단지 이주노동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교육받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의 눈망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의 빈발하는 철로점거 농성 등 이 모든 것은 단지 '국가경쟁력 제고를 통한 성장'에 종속돼야 할 부질없는 요구들로 인식될 뿐이다. 지금 진정 민주주의의 위기를 자신들의 문제로 절실히 느끼고자 한다면, 아니 한국정치의 '비정상성'을 그렇게 절감하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관계들 속에 위기의 본질이 있으며 그것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지만, 권력의 높은 장벽에 갇힌 그들에게 이 주문은 너무 멀리 있다. 설사 그들이 이 외침들에 관심을 가진다 해도 그것은 언제 실현될지 기약할 수 없는 '쉐도우 리스트(shadow list)'로만, 아니 주기적으로 써먹을 '선거용 리스트'로만 존재할 뿐이다. 유력정치인이라고 평가되는 현 보건복지부 장관의 '사회 양극화'에 대한 때늦은 우려는 그것을 관리하는 주무부서의 장으로서, 혹은 그것을 조장한 정치세력의 일원으로서 그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면피용 제스처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다시 새삼 확인하건대, 이런 면에서 이들은 대중들 속에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로부터 배우며 자신을 변화시켜나가는 그런 정치세력이 아니라,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대중을 항상 저 멀리에 두고 관조하며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대상으로, 썩 내키지 않는 골치 아픈 존재들이지만 자신들의 법적 정당성을 추인해주는 알량한 한 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도 없는 존재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이 이러한데, 진정 여소야대로 변화된 정치지형 때문에 '민주주의의 위기,' '정치의 비정상성'이 초래되고 있다고 강변하며 연정을 제안하는가. 그렇다면 한 발 더 나아가 집권세력은 스스로의 역사에서 그런 진단의 부당함을 배울 필요가 있다. 변죽만 울리는 과거사 청산문제를 되풀이 읊조릴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가 지금 나락으로 빠진 그들의 정치적 입지와 관련해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집권자유주의 정치세력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민주화운동 세력이라는 완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혹은 파시스트 지배시기, 양적으로 보면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항상 국회에서 '소수 중의 소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소수'를 탓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그나마 현재의 그들을 있게 한, 아니 이제는 추억이 된 '그들만의 아름다운 과거'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보세력이 대중적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냉전분단체제의 파시스트 지배 아래에서 그들은 반독재민주화와 부분적이지만 대중의 삶의 문제를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로 삼아 대중적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 있었고 바로 그것이 그 뒤 그들의 집권을 가능케 한 근본적인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중적 힘은 97년 대선과정에서 나타났듯 '민중운동진영'조차 분열시킬 만큼 강한 정치적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정작 의회 안에서 다수당이 된 지금, 그것도 여대야소 상황에서 집권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어떤 발상과 행태를 반복했는가. 여기에서 다시 그것을 열거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요구와 삶의 고통에 대한 그들의 호소를 외면으로 일관하다가 지지율이 바닥으로 향하고 여소야대로 변하자,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하지 못한 채 '민주주의의 위기'니, '비정상적 정치'니 하는 이유를 들이대며 그것을 합리화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최소한의 품위조차 부정하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직면한 지난 '탄핵정국'을, 그들 스스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규정한 그 국면을 바로 대중의 힘에 호소함으로써 극복한 오래되지 않은 기억을 벌써 잊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기억들은 민주주의가 의회의 의석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억압적이고 비대칭적인 사회관계들을 해소 및 극복하기 위해,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진정한 개혁'을 위해 대중과 함께 할 때, 진전된다는 교과서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기본 내용조차 지워버린 듯하다. 그러기에 위기의 진정한 내용이 어디에 있는지 따져보지도 않은 채, 그것도 의석수가 단지 과반수에 조금 모자란다는 이유로 그 위기와 비정상성의 원인을 여소야대 국면에 돌리며 '권력나누기'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에 열광했던 지지자들, 혹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최소한의 양식을 믿었던 대중들은 탄핵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해주었건만, 집권세력은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는 '귀족국민'의 그늘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 뒤안길에서, 대중은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할 거의 모든 법제도적 기제를 박탈당한 채 또 하나의 '천민국민'으로 고통 받고 있다. 국민소득 1만불의 시대를 넘어 2만불 시대의 도래를 귀가 아플 정도로 듣고 있지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달라는, 아니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달라는 외침은 여전히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그들에게 권력구조의 변화가, 선거제도의 개정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 이 와중에 집권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천상'에 앉아 지상에서 고통받는 대중을 상대로 정치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정치가 위기와 비정상성을 증폭시킨 본질적인 요인임을 외면하면서, 아니 오히려 그것을 조장, 심화시키면서 새삼스레 위기, 비정상성 운운하니 항상 삶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대중들로서는 의아할 뿐이다. 그렇기에 지난 '블랙홀 탄핵정국' 때처럼 또 다시 민주주의를 희화하고 위기론으로 포장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망국적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선거제도가, 권력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 또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지역주의에 근거해 내각제를 거래하고 그것을 매개로 집권의 단맛을 본 세력이 민주주의를 위해, 한국정치의 정상성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다시 내각제, 이원집정부제의 뉘앙스를 풍기는 '권력분점'의 문제를 전면에 제시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대중은 곤혹스럽다. 과연 그들이 진단하듯 그 제안이 한국정치의 비정상성, 위기의 원인으로서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적실성 있는 카드인지 심각히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과거 양식 있는 사람들이 내각제를 부정했던 것은 그것을 주장했던 세력에 대한 개인적 혐오, 내각제 그 자체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각제를 주장하면서도 그것의 원활한 작동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진입장벽 완화조치, 비례대표제, 정당보조금 배분방식 등 제반 법제도적 조치들의 민주적 개정에 대해 그들이 사사건건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러한 발상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위한다고 하면서, 지역주의를 담보로 자신의 권력지분을 확보하겠다는 의도 이상이 아니었다. 내각제에 반대하며 대통령제에 집착했던 정치세력들 또한 그 제도가 지니는 의미를 한국사회의 현실에 견주어 비판적으로 살피기보다는, 그것이 자신들의 권력독점에 장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생결단으로 반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대중들이 요구하는 법제도의 민주적 재구성은 항상 뒷전이었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집권 자유정치세력과 보수야당은 물론 진보를 모토로 하는 민주노동당조차 지역주의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한국정치의 비정상을 초래하는 원인이라는 현상적 분석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여전히 그러한 화술에 쓸려갈 사람들이 적지 않겠지만, 그러한 정치적 담론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새삼 지적하건대, 지역주의는 민주주의 위기, 한국정치의 비정상성을 초래한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과라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한국정치를 관통해 온 반(비)민주성, 반민중성의 결과가 지역주의를 초래한 주요인이었고 그 기저에는 지난 자본주의적 산업화 과정에서 파시스트 권력을 매개로, 불균등발전을 증폭시키며 영향력을 확대시킨 자본의 힘이 자리 잡고 있다. 거기에 지역맹주들과 수혜관계에 있는 '지역토호들'이 연계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지역주의 또한 그러한 불균등발전의 제어를 포함하는 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를 통해 해소되고 극복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중앙정치'의 민주화에 더하여 진정한 풀뿌리 지역정치의 확장과 심화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은 외면한 채, 지역주의를 내각제와 같은 권력분점으로, 혹은 중대선거구제, 비례대표제 등 선거법의 개정을 통한 나눠먹기로 해소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악화시키는 미봉책일 뿐이다. 흔히 지역간 인사균형 논리에 근거한 공직자 발탁도 결국 기존의 지역주의를 인정하는 가운데 지분을 서로 보장해주는 '나눠먹기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동안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세 번에 걸쳐 집권하며 지역주의의 해소를 외쳐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역주의는 소리소문 없이 더 내면화되면서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대중을 소외시키는 구조적 정책적 요인들에 대한 고민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권력구조개편 혹은 선거법개정 논의에 누가 관심과 믿음을 보낼 것인가. 설상가상 노동자, 대중의 열망을 안고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조차 선거법 개정과 관련, 그 일부가 이 '프로젝트'에 내심 의미 있는 미소를 보내고 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참담 그 자체다. 대중의 고통을 자기문제 삼아 정치적 영향력을 제고할 중장기전략은 설정하지 않고, 억압적이고 비대칭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대중의 삶을 외면한 채 진행되는 '연정논의'에 편승해 세 확장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것은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민주노동당을 '어두운 미래'로 이끌 뿐이다.

국민대중들은 집권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출범에 즈음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세력이 아니라 과거를 마무리 짓는 세력'이라고 규정한 것을 새삼 떠올리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파시스트 유신시대에 '비판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97년 IMF사태를 계기로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으로 귀의함으로써 개혁세력으로서의 그들의 역사적 위상이 마무리됐음을 뜻한다. 그리고 현 집권세력은 '시장으로 권력을 넘긴 신자유주의 경쟁국가'의 화신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이 고통받는 노동자들, 대중들을 도와줄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표현대로 '노동자계급이 너무 컸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 도와 줄 수도, 도와 줄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최소한의 생존과 권리를 위해 비오는 거리에서 양식 있는 세력들의 지지와 연대를 요청하고 있다.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 정치의 비정상성을 이야기하며 집권세력이 내놓은 연정 등 권력구조 문제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귀결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들이 항상 즐겨 말하듯 '정치는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스스로 과거를 마무리 짓는 세력으로 규정하면서도 마치 '과거 민주화운동의 완장'이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현실의 억압적이고 비대칭적인 사회관계들의 해소, 극복이라는 절명의 대중적 요구와 맞물릴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집권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인식 혹은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그들이 진행하고 있는 그들의 마무리 작업은 다른 한편 그들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핵심세력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이 대중을 당황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한다. 하지만 '블랙홀 탄핵정국' 속에서 그들을 구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주었던 대중은 지금 정치위기의 진원지를 고통스런 자신들의 삶 속에서 찾고 있다. 이미 대중은 탄핵정국에서 자신들이 보였던 정치적 행보를 현재의 삶과 연결시켜 돌아보는 성찰의 거울로 삼고 있다. 그들의 삶은 오히려 탄핵정국이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연정 등 권력구조개편 제안이 집권 후반기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혹은 거기에 편승해 정치적 실리를 챙기고자 하는 제도정치 세력들의 이전투구의 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대중의 현실인식이 향후 어떤 정치적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할 수 없으며 그런 맥락에서 그들의 행보는 정치적 위기를 가속화시킬 또 다른 강력한 뇌관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자)라는 규정은 스스로 혹은 누군가 자의적으로 붙여준다고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구조적 특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차별과 억압의 경계를 허물며 끝없이 가야 하는 민주주의자는 과거에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그랬듯 항상 '제도적 소수'다. 반면 그들은 그 운동의 성과를 대중과 함께 하고 또 다시 새로이 재구성되는 차별과 억압의 경계와 장애를 넘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비제도적 다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손은 권력이 아니라 차별과 억압의 관계 속에 있는 대중의 요구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집권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한국정치의 비정상성,'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수사를 동원해 권력구조 개편과 선거법 개정 등의 필요성을 아무리 잘 포장한다 하더라도, 대중에게 그것은 한갓 권력에 대한 집착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규정된 '민주주의의 위기,' '정치의 비정상'의 해소 및 극복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할지 모르지만, 그 해법은 이미 집권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손에서 떠난 지 오래다. 그들이 그것을 다시 찾을 가능성을 미리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소외된 권력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염두에 둘 때, 과연 그들이 그 권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강한 의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권력구조개편 혹은 선거법개정 등을 통한 '연정'이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작동해 왔던 '종속적 신자유주의 보수대연합'을 법제도적인 수준에서 확인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대중이 그것을 수용할까. 어찌됐든 그러한 프로젝트의 현실화 여부와 무관하게 지금 집권세력은 이른바 국정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희화시키는 무덤을 판 것이고 현실의 산적한 문제들과 그 문제를 풀 수 없는 그들의 정치력 사이에, 바로 그 간극에 한국정치의 진정한 위기와 비극의 비밀이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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