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혈액을 가공한 혈액제제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감염의 연관성을 최초로 인정해 파문이 일 전망이다. 그 동안 환자들은 혈우병 치료를 위해 혈액제제를 투여받는 과정에서 AIDS, C형간염 등이 감염됐을 가능성을 제기해 왔으나 제조회사는 이를 전면 부인해 왔다.
***법원, "혈액제제 투여와 AIDS 감염 연관성 있다"**
서울동부지법 민사11부(부장판사 백춘기)는 4일 혈액제제를 투입한 뒤 AIDS에 감염됐다며 이모(16)군 등 혈우병 환자 16명과 이들의 가족 53명이 (주)녹십자홀딩스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녹십자홀딩스는 이군에게 3천만원을, 이군 가족에게 2천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박모(18)군 등 나머지 원고에 대해서는 AIDS 감염 사실 확인으로 실질적인 '손해'가 발생한 것을 안 지 10년이 넘은 시점에서 소송을 제기해 시효가 소멸했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김모(50)씨 등 감염자 4명은 혈액제제와의 관련성을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혈액제제 제조에 필요한 혈액을 채혈ㆍ조작ㆍ보존ㆍ공급하는 업무는 이용자의 생명과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적정하게 수행되지 못할 경우 국민 보건에 중대한 위해를 가하게 된다"며 "혈액 관리를 위해 최선의 조치를 다해야 할 고도의 주의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녹십자홀딩스는 AIDS 검사에서 양성을 보이기 불과 30~45일 전에 채혈한 혈액을 혈액제제에 사용하는 등 이런 주의의무를 위반했다"며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혈액제제의 경우 제조업자가 손해발생의 다른 원인을 입증하지 못하는 이상 혈액제제와 AIDS 감염의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혈우병을 앓아 오던 이군은 2세 때인 1990년 11월부터 녹십자홀딩스(당시 녹십자)가 제조한 혈우병 치료제를 투여 받는 동안 AIDS 검사에서 음성 반응을 보였지만 1993년 3월 검사에서 처음 양성 반응을 보였다. 당시 같은 기간에 혈액제제를 공급받은 혈우병 환자 상당수가 AIDS 검사 양성 반응을 나타내 혈액제제와 AIDS 감염의 연관성이 크게 논란이 됐었다.
***혈액제제와 AIDS, C형간염 연관성 주장한 혈우병 환자에게 힘 실려**
혈액제제와 AIDS 감염의 연관성을 인정한 이번 판결은 혈우병 환자들이 제기해 온 '혈액제제와 AIDS, C형간염 간에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에 큰 힘을 실어줄 전망이다.
그 동안은 제조회사는 물론 정부도 "1989년부터 C형간염 및 AIDS 바이러스를 불활성화 처리하는 방법이 도입돼 1990년대 이후 혈우병 환자에 대해 혈액제제로 인한 오염은 사실상 없다"고 공식적으로 해명해 왔었다.
논란이 계속되자 정부는 9월 의ㆍ약계 전문가와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 관계자 등 15명으로 구성된 '혈액제제 AIDS 감염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2004년 9월 "1990~1993년 기간에 혈우병 환자에게 발생한 AIDS 감염에 대한 역학적, 분자생물학적 연구 조사를 한 결과 일부 혈우병 환자의 경우 국내 혈액제제에 의해 AIDS 바이러스가 감염됐을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애매한 결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녹십자홀딩스, "즉각 항소할 것, 재판부 증거 불충분 상태에서 무리한 결론 내려"**
한편 제조회사인 녹십자홀딩스는 판결에 크게 당혹해하며 즉각 항소할 뜻을 밝혔다. 녹십자홀딩스 관계자는 "혈우병 환자들의 AIDS 바이러스 감염에 대해 아직까지 어떤 원인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진 이번 1심 판결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9월 발표된 조사위원회의 발표 이후 이번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거나 입증된 것이 전혀 없다"며 "명확한 역학적, 분자생물학적 원인을 밝히지 못해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결론을 내렸던 당시 조사위원회의 주장을 수용해 무리한 판결을 내린 재판부를 납득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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