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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길은 항상 열려 있어"

산골 아이들 <21> 자신을 찾아가는 길, 두 번째 이야기

***자기 리듬을 찾기**

아이들이 집에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네 식구는 자기 리듬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새벽형 인간인 남편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일하다 낮잠을 즐긴다. 늦잠꾸러기인 나는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수 있다. 아이들은 자기 리듬에 충실해진다. 몸 움직이고 싶으면 움직이고, 가만 앉아서 책을 보고 싶으면 본다. 몸과 정신이 자기 리듬을 솔직히 알려주고 아이는 거기에 맞춰 움직인다. 그러기에 아이마다 다르고 한 아이라도 날마다 다르고 그때그때가 다르다.

조금 길게 보면 그때그때 한 가지에 푹 빠져 지낸다. 한 가지에 푹 빠져 거기서 몸과 마음의 자양분을 충분히 얻는다. 양분을 얻을 만큼 얻었으면 다른 양분을 찾아 나선다. 이 발걸음을 따라가 보면 나와 내 남편이 같지 않듯 아이마다 자기 길이 그려진다.

식구 저마다 자기 리듬을 찾아가면서 우리 식구는 저마다 배움의 길을 찾아나가고 있다. 어른 아이 구별이 없이 누구나 한 사람으로 자기 길을 찾는다. 길은 각자 다르지만 배움의 길을 찾아가는데 공통점은 있다. 그 첫 번째 공통점은 배움의 길이 열려있다는 점이다.

"친구랑 놀 것이냐? (먼저 학교를 그만 둔) 누나처럼 퍼질러 잘 것이냐?" 한 아이가 중학교를 입학할 것이냐 그만 둘 것이냐 하는 선택을 하면서 이렇게 생각 했단다. 참으로 단순한 생각인데 그 생각이 내게 긴 여운을 남긴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하고 지금이 얼마나 다른 환경인지를 실감나게 해주었다. 왕조시대에는 배움의 길이 몇몇에게만 열려있었고 우리가 학교를 다니던 때는 배움의 길이 학교 안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은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구나. 배움이 더 이상 학교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다는 걸 아이는 직관으로 안 것이다.

아이들이 집에서 지내면서부터 나는 우리 사회가 정보화 사회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인터넷 서점에 책을 주문하면 다음날 책이 집에 온다. 읍내 도서관이 웬만한 지식의 갈증을 풀어줄 만큼 신간을 갖추고 있다. 방안에 앉아 외국의 사이트와 만날 수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인터넷, 책, 미디어……. 정보와 지식은 넘쳐나니 배울 길은 많다. 요즘 세상에서 더욱 중요한 건 무얼 알고 싶은가 하는 자기 물음이라 생각한다.

***배움이란 스스로 알고자 하는 걸 묻는데서…**

공자님이 하신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하는 말씀이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배움이 그만큼 기쁜가?

아이가 처음 태어나 말을 배우고, 몸 움직임을 배우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걸 보면서 신기해하던 때가 떠오른다. 저녁마다 아이의 배움이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날마다 놀라움을 느꼈다.

그러던 탱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공부는 어느새 의무가 되었다. 더 이상 기쁨이 아니었다. 그걸 보면 '배움'은 '학습'과는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습은 주어진 교과를 성실히 익히는 것이라면 배움은 스스로 알고자 하는 걸 묻는데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건 웬만한 어려움도 즐겁게 이기며 해낸다. 같은 일이어도 누가 시켜서 하는 거라면 작은 어려움도 크게 느껴진다. 지식 공부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 한 시간이 억지로 하는 공부 열 시간보다 낫다. 배움이야말로 그렇지 아니한가. 자기 삶에서 우러나온 배움, 배움과 동시에 삶에서 쓰일 수 있는 배움이라면 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머릿속에 쏙쏙 들어와 박힐 뿐 아니라 뒷날 머리는 잊어도 몸은 기억한다.

올 봄 탱이가 제 아버지와 함께 자기가 살 집을 짓기 시작했다. 탱이가 독립된 공간을 가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방은 구들방으로 두 평 남짓한 방이다. 탱이 방 옆에 그만한 마루방을 한 칸 더 들여 모두 여섯 평 크기의 작은 집으로 설계를 했다. 남편이 먼저 마루방을 지어나가면 탱이는 제 아버지 하는 걸 어깨 너머로 보고, 구들방을 지어나간다. 남편은 가르쳐 주고 싶어 했지만, 탱이는 제 아버지가 하는 걸 묵묵히 보고 꼭 필요한 거만 묻고는 자기 나름대로 해나갔다. 남편은 나름대로 삼각함수가 어떻고, 중력의 원리에 따른 수직과 수평을 잡는 법, 구들방에서 공기의 흐름, 전기 전류가 어떤 건지 근사하게 이야기 해 주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탱이는 제 아버지 말에서보다는 삶에서 배우는 것 같다. 아버지가 목수도 건축가도 아닌데도 공부해가면서 집을 짓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자기가 살 집은 지을 수 있다는 거를 말이다.

***자기관리 놀이**

상상이가 요즘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누가 시킨 적은 없고, 시킨다고 할리도 없지만, 혼자서 한자를 공부하고, 일기를 쓰고, 한글 베껴 쓰기도 한다. 마루에서 식구들이 모여 놀아도 끽 소리도 없이 방에서 공부를 한다.

어찌 이런 자발성이 일어났나? 그건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 그러니까 이 사회로부터 상상이가 어떤 영향을 받은 덕(?)이다. 한자 공부는 요즘 유행하는 학습 만화책 덕이다. 다음 권을 사달라고 하려면 앞 권을 다 알아야 하겠는지 맨손으로 공기를 가르며 글씨를 쓰며 익히더니 말을 하다가도 글을 읽다가도 그 속에 숨겨진 한자를 찾아낸다. "아하, '급지'라면 줄 급(給)에 종이 지(紙) 맞아요?",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건 또 다른 까닭이 있다. 상상이는 이 시대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건 귀신 같이 알아낸다. 무슨 만화가 유행이라던가, 무슨 게임이 유행이라든가. 언제 어디서 그런 정보를 낚아오는지. 아이들끼리 만나는 자리, 신문, 어쩌다 보는 텔레비전.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주파수를 맞춘 전자파가 떠돌며 상상이에게 들어온 건 아닐까.

상상이 꽤 오래전부터 스타그래프트를 하고 싶어 했다. 어디 가서 텔레비전을 보면 게임방송을 찾아 스타그래프트를 보곤 했다. 그러다 어린이날 선물로 컴퓨터 게임 시디를 사달라며 되도록 스타그래프트로 사주었으면 했다. 큰 책방에 가 알아보니 있긴 있는데 값도 만만치 않고 내 마음에 내킬 리 없어, 어린이용 게임 시디를 하나 사다 주었다. 집에 와 알아보니 내가 사온 게임시디는 스타그래프트를 '장보고'로 바꾸어 만든 어린이 버전이었다. 얼마 전 할아버지 생신 때 그 이야기가 나왔더니 프로그래머인 조카(그러니까 상상이 사촌형)가 컴퓨터 게임 시디를 보내주었다. 쩝. 어쩌겠나! 이것 또한 넘어야 할 산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 동네에도 곧 인터넷 전용 회선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집도 인터넷을 연결할 거고, 상상이 역시 게임을 하게 되리라. 컴퓨터 게임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놀랍다. 나 역시 이 글을 쓰기 전에 프리셀 한 게임했다. 얼마 전에 탱이와 상상이는 의논을 했단다. 컴퓨터를 생각 없이 하면 거기 빠질 수 있고 눈도 나빠지니 시간을 정하자고. 공부를 하는 만큼 컴퓨터 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단다. 자기와의 약속을 한 거다.

한 가지 더. 공부하는 만큼 컴퓨터를 하기로 한데는 상상이가 아는 동생의 영향이 있다. 부산 사는 동생은 공부하는 시간만큼 컴퓨터를 하기로 했단다. 상상이는 공부하는 시간 대신, 공부하는 양을 시간으로 환산하기로 했단다. 이 글을 쓰려고 상상이에게 물어보았다. 일기는 한 편에 10분, 한자는 열자를 공부하면 10분. 국어 공부는 얼마. 이런 식으로 시간을 정해 놓았단다.

저녁이면 '내일은 1시간 5분간이다', 하며 혼자 좋아한다. 한 자 한 자 글씨를 써 내러 가며 내일 컴퓨터 게임시간을 모으는 상상이. 그렇게 모은 시간을 다시 관리한다. 공부를 하다 보니 공부하는 방법도 나름대로 터득해 나간다. 그래서 나는 상상이가 컴퓨터 게임이 아닌 '자기 관리 놀이'를 하는 걸로 보기로 했다. 상상이가 이 세상과 교감하면서 자기중심을 찾아가는 과정. 이 과정을 즐겁게 놀이로 해 나가는 것이라고.

***내 안에 담긴 지혜에 귀 기울이려**

산골서 사니 산을 가곤 한다. 겨울에는 땔감을 한다고, 봄에는 나물을 한다고. 어디 산나물을 해 본 적이 있나. 아무것도 몰라도 혼자 산에 다니며 눈여겨보고, 한 입 씹어도 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표본을 하나 꺾어 들고 집에 돌아와 도감을 찾고, 누구에게 물어도 보면서 하나하나 배웠다.

자연에 살아보니 나는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아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은 해나갈 수 있다. 그걸 온몸으로 겪으면서 내 안에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그 할머니 그러니까 웅녀 때부터 내려오는 지혜가 들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 유전자 안에 인류의 지혜가 들어있지 않겠는가. 내 유전자 안에 있는 인류의 지혜를 읽을 수 있다면…….'

지금도 누군가에게 물어서 알려 할 때마다 내 유전자 안에 있는 지혜는 창고에 넣어놓고 밖에서 배우려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업은 애기 삼 년 찾듯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 유전자 안에 담긴 지혜를 읽을 수 있나? 모르겠다. 혹시 학교에서 가르쳐주었는데 까먹은 건 아닌가? 되짚어 생각했다. 그러다 학교가 그걸 가르치기는커녕 그걸 창고에 넣고 문까지 봉해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 본다. 학교 공부는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누군가한테서 배워야 한다는 걸 전제하고 있으니까.

그럼, 그 비급(?)을 어찌 알았는가. 산나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내 마음에 떠올랐다. 산이 자연이 내게 직관의 열쇠를 잠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도시 문명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면서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는데, 자연 속에 있으니 살짝 가르쳐 준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고맙다. 아이들이 자연과 만나는 걸 지켜보며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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