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29일(현지시간) 치러진 유럽헌법 국민투표가 결국 부결돼 미국에 대항하는 '유럽합중국 건설'이라는 유럽의 꿈이 큰 암초에 부딪쳤다. 부결 소식은 곧바로 다음 유럽헌법 국민투표가 예정돼 있는 네덜란드의 부결 가능성을 높이는 등 프랑스 국내를 넘어서 유럽 통합을 지향하는 EU 회원국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 유럽헌법 부결. 현 정권 반대, 헌법 반대로 이어져**
AP 통신과 <BBC방송> 등 외신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들은 유럽 헌법을 큰 표차로 거부했다. 내무부에 따르면 개표 결과 유럽헌법에 반대표를 던진 진영은 54.87%에 달해 찬성 45.13%를 크게 앞질렀다.
그동안 유럽헌법 통과를 강력하게 지지해 왔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이날 투표가 끝난 후 TV 연설을 통해 간략하게 개표 결과를 발표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프랑스의 결정은 필연적으로 유럽에서의 우리 이익 보호를 위해 어려운 국면을 만들어 낼 것”이라면서도 “이는 주권 결정이며 주목할 것”이라고 선거결과를 인정했다.
프랑스 국민들이 유럽 헌법에 반대표를 던진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시라크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권의 '경제 실정'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10%에 육박하고 있고 경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좌-우 양 진영에서는 유럽헌법이 EU 내에 매우 강력한 자유시장경제를 창출, 프랑스의 전통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악화시키고 동구권의 더 싼 노동력이 국내로 유입돼 일자리를 대체해 갈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으며 프랑스가 과도한 국가 주권을 EU에 양보하는 것과 EU 확대로 유럽에서의 프랑스 영향력이 쇠퇴해 갈 가능성을 경계해 왔다.
***일단 비준절차 지속되나 다른 국가에 큰 영향**
유럽연합의 ‘정치적 통일체’로 나아가는 거대한 발걸음의 기반이 될 것으로 예상됐던 유럽헌법이 부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프랑스는 ‘주축국’이라는 점에서 그만큼 충격이 더 큰 모습이다.
유럽헌법은 25개 EU 회원국들이 2006년 11월 1일까지 모두 비준해야 발효될 수 있으므로 프랑스의 부결로 유럽헌법은 현재 상태로는 사실상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비준 방식은 의회에서 비준하는 것과 국민투표를 통하는 방식 두 가지로 나눠지며 지금까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독일, 그리스,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스페인 등 9개국이 비준을 완료했다.
EU 지도자들은 그러나 일단 프랑스 부결로 인해 다른 나라에서의 국민투표가 불필요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는데도 불구하고 비준 절차를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시라크 대통령도 “비준 과정은 다른 EU 회원국들에서는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라고 확인했다. 다음달 1일 네덜란드가 바로 국민투표에 들어가며 룩셈부르크도 6월 비준절차를 강행할 분위기다. 영국도 이미 내년도 국민투표를 예정대로 할 것임을 강조한 상태다.
하지만 프랑스의 국민투표 부결은 추후 다른 국가들의 국민투표 분위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우선 네덜란드에서는 벌써부터 부결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여론조사결과 반대 목소리가 찬성보다 20%나 높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론조사결과대로 부결이 잇따른다면 EU 정상들은 특단의 조치를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음달 16, 17로 예정돼 있는 EU 정상회담에서는 비준 절차 중단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유럽헌법이 부결됐다 하더라도 단일 정치체를 향한 EU의 제도적 위기는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기본적인 인식이다. 2000년 12월 EU 15개 정상들이 프랑스 니스에서 모여 만든 '니스 조약'은 EU 확대와 내부기구 개혁, 유럽의회 의석 재할당 등을 규정해 유럽 대륙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기본적인 제도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권력구도도 요동, 라파랭 총리 경질 예상**
한편 국민투표 부결은 유럽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 이외에도 프랑스 국내에도 만만찮은 파고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라크 대통령이 사임을 하지는 않겠지만 장 피에르 라파랭 총리가 경질되는 등 내각의 대폭적인 교체가 예상되고 있다. 그 후임으로는 도미니크 드 빌팽 내무장관이나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 총재 등이 거론되고 있다.
아울러 국민투표 켐페인 과정에서 프랑스 사회당은 내부적으로 완전히 의견이 갈려 그 후유증도 치유하는데 적지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반면 헌법을 극력 반대해왔던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장 마리 르펜 당수는 시라크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며 “그는 도박을 원했지만 패배했고 우리는 역사적인 순간을 살고 있다”고 기세를 올리고 있어 강경 우파와 좌파 진영의 입지는 강화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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