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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 제5고의 영어독본과 '상상력을 잃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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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 제5고의 영어독본과 '상상력을 잃은 정치'

김민웅의 세상읽기 <113>

서기 2000년의 미국 보스턴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1887년의 상상력. 그것은 가령,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중앙의 어떤 물품 공급처가 각 가정에 연결되어 있는 튜브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화폐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신용카드 사용을 비롯해서 일체의 생활이 인간의 노동력을 최소화시켜나가는 유토피아로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이런 내용을 담은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의 <뒤돌아보면(Looking Backward)>이 1888년 출간되자,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 걸쳐 수개국어로 번역되면서 일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신용카드의 개념이 이미 거론된 것은 대단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벨라미의 이러한 미래소설적 상상력을 접한 서구는 장차 사회주의 체제 아래 어떤 꿈같은 미래가 펼쳐지게 될 것인지 환상적 논쟁을 펼치게 됩니다. 근 120년 뒤의 현실을 놓고 자신들의 현재를 점검해보는 매우 흥미로운 시선의 등장이었던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아들이라고 여기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그것이 역사적으로 성취해낸 물질문명의 안락함이 그대로 사회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막연하고도 낙관적인 기대가 여기에 집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16년 영국의 토마스 모어가 '이 세상에 없는 그 어떤 곳'이라는 의미의 <유토피아>를 출간한 이래, 인류는 성서의 에덴동산을 지상에서 새롭게 현실화시켜보려는 노력을 줄기차게 펼쳤던 셈이었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 야마구치 마사오(山口昌男)가 쓴 <패자(敗者)의 정신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1905년에 이미 일본의 제5고(高)에서는 벨라미의 책을 영어교과서로 쓰고 있다가 문부성의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사회주의 교육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해인 20세기 초반에 일본의 지식사회가 어느새 이러한 문제에까지 관심을 갖고 고등학교 수준에서 원전독해를 하고 있었다는 점은 놀라울 지경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 될까 하는 호기심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상상해보는 것은 단연 인류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상력이 단선적 시야에 갇혀 있다면 그야말로 공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벨라미의 책이 대중들의 인기를 모으자 영국의 사회주의자이자 예술가이며 출판 도안 전문가인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윌리암 모리스(William Morris)는 벨라미가 기계문명의 혜택이라는 관점에서만 미래를 생각했다면서, 비판한 바 있습니다. 벨라미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건축물을 그저 이어받은 후예가 아니라, 아버지의 세계에 도전한 아들의 반란으로 일어난 혁명적 사태였다는 점을 놓친 셈입니다.

모리스는 기계문명이란 노동자를 보다 고강도로 착취하기 위한 의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진정한 가치와 예술적 차원의 의미를 박탈하는 과정도 포함하고 있다면서 정작 중요한 사회주의적 변화는 인간관계에 있다고 갈파합니다. 그가 봉건사회에는 반대했으나 중세 길드적 장인정신을 복구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보다 평등해지고 정의로운 권력관계를 만들어 나갈 때 사회주의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가 이뤄질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윌리암 모리스가 벨라미의 저작에 대한 대안으로 내놓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어떤 곳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에서 묘사한 미래는 그래서 벨라미보다 뚜렷한 현실감을 갖고 사회변화의 핵심은 역시 인간관계의 변화에 있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말미에는 이러한 것은 단순히 꿈이 아니라 비전, 즉 '뜻을 담은 전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환상이 아닌 철학과 의지의 적극적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는, 그러나 그 나마의 소박한 꿈도 없고 더더군다나 전망도 상실한 채 뒤죽박죽의 난삽한 논란 속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윌리암 모리스처럼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거나 또는 다른 그 어떤 이념체계로 표방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무언가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의 집결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뛰어난 지식인이자 사회운동가인 스캇트 니어링은 벨라미의 사회분석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의 꿈만큼은 소중했다고 옹호했습니다. 먼 미래를 상정하고 오늘을 점검해보려는 노력이 주목되었던 것이고, 윌리암 모리스 역시 그런 점에서는 벨라미의 안목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이 이미 19세기의 일이었고, 1905년 일본 제5고의 영어독본 수업시간에는 어느새 그 꿈의 세계를 논하는 젊은 교사들과 고교생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린 지금 도대체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인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서기 2005년의 상상력으로 서기 2100년의 한국을 생각해 보면 무엇이 보일까요? 이런 질문은 당장 내년도 보이지 않는 판국에 너무 사치스러울까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상상력이 자꾸 가난해져가고 있다는 점이고, 의지를 가진 전망의 능력도 허약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www.ebs.co.kr )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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