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 본관 안. 날선 질타의 기도 소리가 성당 안을 가득 메웠다.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천주교연대)'가 정부의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국 미사를 명동성당에서 열었다.
이날 미사의 열기는 '민주주의의 성지'였던 1987년 명동성당의 모습과 겹쳤다. 천주교 사제 3000여 명을 비롯해 신도 1만여 명이 미사에 모였다. 미처 본당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한 신도는 본당 옆 꼬스트홀과 성당 앞마당에 설치된 전광판을 지켜보며 미사에 참여했다. 명동성당에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국 미사가 열린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처음이다.
▲ 10일 오후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천주교의 대규모 시국 미사가 열렸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날 미사의 강론을 맡은 윤종일 신부는 1987년 5월 18일,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광주민중항쟁 기념 미사'를 회상하며 강론을 말문을 열었다.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씨의 고문 치사 사건이 은폐되었음을 폭로하면서, 명동성당의 시국 미사는 6월 항쟁의 불씨가 전국으로 번지는 도화선이 됐다.
윤종일 신부는 "23년 전 그날처럼, 이곳 명동성당에서 다시 결집된 힘을 발휘해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막아내자"면서 "인간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죽어가는 강을 위해, 4대강 사업으로 쫓겨나는 농민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고 말했다.
윤 신부는 "4대강 사업은 반생명·반생태적인 사업"이라며 "전국 곳곳의 4대강 사업 현장만 가 봐도 강을 살리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주장이 완벽한 거짓임을 알 수 있다"고 비판했다.
윤 신부는 이어서 "4대강 사업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파괴하는 사업"이라며 "정부가 국민과의 대화와 소통 없이 사업을 밀어붙일 때, 또 얼마나 많은 국민이 눈물을 쏟아야 하는지를 우리는 독재 정권 시절의 경험을 통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정부는 많은 의혹을 가지고 이 사업을 시작했고, 의혹은 의혹을 낳으며 거짓은 꼬리를 물고 있다"면서 미사에 참여한 신도들에게 "각 지역의 4대강 현장으로 달려가 달라. 가서 이 사업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 명동성당에서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시국 미사가 열린 것은 1987년 이후 23년 만이다. 명동성당을 가득 메운 천주교 사제와 신도들. ⓒ프레시안(최형락) |
▲ 천주교 사제와 신도 1만여 명이 명동성당 본당을 가득 메웠다. 미처 본당에 자리를 잡지 못한 신도들은 본당 밖에 설치된 전광판을 지켜보며 미사에 동참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 "생명의 강을 죽이지 말라!" 미사에 참여한 수녀들이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사제·수도자 5005명, 4대강 반대 '2차 시국 선언' 발표
1시간 30분 남짓의 미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명동성당 들머리로 나와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2차 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사제·수도자 선언'에는 전국의 천주교 사제·수도자 5005명이 참여했다. 지난 3월, 사제 1116명이 참여한 1차 시국 선언의 4배를 웃도는 규모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천주교 사제와 주교의 환경 파괴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과 우려를 일방적으로 설득하면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기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종교인의 양심 선언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였다"며 "강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우리 신앙인들의 몫이며, 정치적 개입이 아닌 '사회적 부정 행위와 기만적 술책에 대항하는 정의의 요구(가톨릭 교리서 1916항)'"라고 밝혔다.
▲ 이날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제 2차 시국 선언문이 발표됐다. 이날 시국 선언에는 천주교 사제와 수도자 5005명이 참여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특히, 이들은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인 투표에 적극 참여해 '강의 생명'을 약속하는 후보들을 식별하고 선택할 것"이라며 "투표를 통해 4대강 사업에 대해 분명히 심판할 것이며, 이는 사제들의 정치적 개입이 아닌 신앙인의 의무이자 정의의 실천"이라고 강조했다.
사제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각 지역의 천주교 성당에 게시된 '4대강 반대' 현수막과 서명 운동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규정한 것을 언급하며, 이 같은 활동을 중단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우리는 가장 큰 선거법 위반은 정부가 선거 기간 중에도 강행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이라고 단언한다"며 "정부와 선거관리위원회는 종교계와 시민단체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중단하고, 지금 당장 4대강 사업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천주교연대는 지난달 26일부터 매일 저녁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진행해온 '생명·평화 미사'를 이날을 마지막으로 중단하고, 한강·낙동강·영산강·금강 등 4대강 공사 현장에서 기도회와 강 순례를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이날 전국의 사제와 신도들에게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생명·평화 미사'와 '한 끼 단식 기도회'를 봉헌할 것을 요청했다.
보수 단체 집회 동시에 열러…"사제들 좌파 선동 중단하라" 이날 사제 선언이 발표된 명동성당 들머리 맞은편에서는 천주교연대를 규탄하는 보수 단체의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천주교 평신도 모임'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단체 회원 30여 명은 '선동적 정치 행위, 천주교의 가르침인가', '생명 보호-좌경 위장 이념 규탄한다',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게 해달라'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집회를 진행했다.
'천주교 평신도 모임'은 지난 3월 천주교 주교회의의 4대강 반대 선언 직후에도, 일부 보수 언론에 주교회의의 결정을 규탄하는 지면 광고를 게재해 논란이 돼 왔다. 당시 천주교계 안팎에서 '교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관변 유령 단체'라는 의혹이 제기됐던 이 단체가 시국 미사에 맞춰 모습을 드러낸 것.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사제들의 좌파적인 선동에 반대하는 평신도의 모임"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이 단체 회원들은 소속 교구와 성당을 묻는 질문에는 하나같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30대 참가자는 "나는 얼떨결에 끌려 나왔으니 단장에게 물어보라"라고 말했지만, 그가 지목한 '단장' 역시 "소속 교구와 성당은 밝힐 수 없다"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이들은 "신고 없이 집회를 진행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경찰의 해산 명령에도 30분가량 집회를 진행하다, 해산 명령이 되풀이되자 오후 4시 30분께 자진 해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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