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분노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던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이 그후 변절해 친일행각을 벌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장지연, 일제강점후 친일파로 변신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김경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은 4일 장지연이 주필로 재직중이던 <경남일보> 1911년 11월 2일자 1면에 두 개의 일장기 그림 아래 당시 메이지(明治)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축하하는 한시가 실린 영인본을 공개했다.
한시는 "해가 부상에서 떠오르네. 혁혁한 태양이. 무지개와 북두성이 정기를 길러 천황께서 탄생하셨네. 보유에 오르신지 44년간 성수무강하셨네. 덕과 은혜가 두루 미치고 위엄이 널리 빛나네. 뭇 백성들을 어루만지니 우리 동양의 기초를 세웠네. 오호라 이러한 해가 만번이 되어 영원하리라"는 내용으로 돼 있다.
김 위원은 자료를 공개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신문들이 기명기사를 내지 않았던 관행에 비춰보면 장지연이 한시를 직접 지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경남일보는 그가 주필로 있던 언론사이며 문장의 수려함을 고려호변 장지연이 기재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고 주장했다. 장지연은 1909년 10월 창간된 <경남일보> 초대 주필을 맡아 1913년 3월까지 주필로 재직했었다.
김 위원은 또 "경남일보는 일왕 찬양시를 게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천장절 당일 휴간까지 하면서 경남 진주 수정봉 정상에서 1천개의 등화를 봉장한 가운데 축제를 진행하기까지 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은 경남일보가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11일자에 일제 강압에 의해 국권이 찬탈당한 데 분노해 음독자살한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햇다가 정간된 뒤 10일만에 복간되면서 신문논조가 친일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장지연 둘째아들, 조선총독부 관리로 출세**
김 위원은 <경남일보>의 일왕생일 축하 한시외에, 안중근 의사에 암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한 한시를 실은 1909년 11월 5일자 2면도 함께 공개하면서 장지연의 친일행적 의혹을 제기했다.
김 위원은 이에 앞서 3.1절인 지난 1일 <일제강점기 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라는 제목의, 경남 진주지역의 친일파를 포함한 유력인사 3천4백여명의 행적을 파헤친 책을 출간하면서도 여기서도 장지연과 관련, "언론계는 진주에서 창간된 지방지의 효시라고 일컫는 경남일보를 들 수 있다. 경남일보의 인물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1909년 창간 당시 장지연과 김홍조 등 중요관계자가 한일합병 후 모두 일제관공리나 협력자가 되고 말았다. 또한 해방 후 1946년 복간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초대 사장 허만채는 일제 때 경남도회 의원이었으며 2대 사장 문해술은 일제 때 진주경찰서 순사부장을 지낸 자였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김 위원에 따르면, 장지연의 둘째 아들은 조선총독부 판임관이 되어 부서기를 지내기도 했다.
장지연의 친일의혹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국가유공자 서훈이 박탈될 게 확실해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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