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
전태일 열사는 다른 무엇보다도 '희망'을 강조했다. 2005년 새해가 밝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정치·경제·사회 어디서도 희망의 신호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또 어디로 가는가? 이런 고민과 사색에 도움이 될 법한 색깔이 다른 세 권의 책을 소개한다.
***과거 : '탐욕'과 '거세된 민주주의'의 역사**
김동춘 교수는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창비 펴냄)에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 국가 중 '제1차 미국화(냉전)'와 '제2차 미국화(지구화)'가 공존하는 유일한 나라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지난 6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미국을 닮고자 노력해왔으며, 자의반 타의반 미국식 표준에 모든 것을 맞추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미국은 이미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프레시안>에 국제정치경제학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홍기빈씨가 번역한 세계적인 정치사상가 닐 우드(1922~2003)의 유고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개마고원 펴냄)는 미국의 실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돕는다. 닐 우드는 <계급으로부터의 후퇴>(창비 펴냄)의 저자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좌파 정치학자 엘렌 메익신스 우드의 남편으로 본인 역시 20세기 후반 가장 뛰어난 정치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저명한 좌파 정치학자이다. 이 책은 그가 2003년 운명하기 전에 미국과 캐나다 시민을 비롯한 세계 시민들에게 오늘날 자본주의와 미국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쓴 에세이다.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 이 에세이에서 닐 우드는 자본주의와 미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특징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그것에서 비롯된 미국의 실체를 폭로하고 있다. 특히 그는 미국이 '탐욕'이라는 자본주의적 심성에 바탕을 둔 '거세된 민주주의'로 치장된 나라라고 비판하고 있다.
닐 우드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흥미롭게도 자본주의 사회가 확립될 때까지 오랫동안 '탐욕(avarice)'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분열과 쇠퇴를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으로 간주돼 호된 비판을 받아왔다. 심지어 애덤 스미스조차도 그의 <도덕감정론>(1759)과 <국부론>(1776) 곳곳에서 부자들의 탐욕과 상인 및 제조업자의 자기 이익만 좇는 행태에 대한 분노에 찬 언급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인류 문명을 지속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계됐던 '탐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익(interest)'이나 '이윤(profit)'이라는 가치중립적인 말들로 변화해 그 위험을 숨기면서 사회 구성원들의 심성에 깊숙이 뿌리 내리게 됐다. 그 과정에서 '사회의 포괄적 평등'을 그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송곳니가 뽑히고 변질된 채" 가장 탐욕스러운 이들의 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절차로 전락하고 말았다. 닐 우드는 미국이야말로 그것이 가장 구체적으로 구현된 나라이며, 지금의 미국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현재 : 당신은 어떤 세계에 살고 또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가?**
역사적 통찰에 입각한 닐 우드의 통렬한 비판에 정신이 번쩍 든 이들은 지금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를 느낄 것이다.
이런 고민의 길잡이 역할을 해줄 만한 책이 바로 최근에 출간된 독일의 저널리스트 아르민 퐁스가 엮은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가>(정유성 옮김, 한울 펴냄)와 그의 전작 <당신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1, 2>(김희봉·이홍균·윤도현 옮김, 한울 펴냄)이다.
<당신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는 앤서니 기든스(근대사회론), 울리히 벡(위험사회론), 대니얼 밸(후기산업사회론), 아미타이 에치오니(책임사회론), 클라우스 오페(노동사회론), 로널드 잉글하트(포스트모던사회론) 등 현대 사회에 대해서 다채로운 이론적 접근을 펼쳐온 24인의 다양한 시선을 통해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전개하고 있다.
앞의 책이 독일과 영어권 국가의 사회과학자에 치우친 한계를 가진다면 최근에 나온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가>는 미국(벤자민 바버), 일본(오마에 겐이치), 영국(티모시 가튼 아쉬), 불가리아(일리아 트로야노프), 이스라엘(나탄 스나이더) 등 다양한 문화권의 10인의 시선을 통해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나름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간략한 설명과 인터뷰로 이뤄진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총 서른세 가지의 시선을 통해 지금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지금까지의 실천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또 미래는 어떻게 다가올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서로 비교해보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현재를 명확히 살피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나름의 공부길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이들의 내면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아르민 퐁스는 교과서에 나올 법한 구태의연한 질문을 탈피해 '좋아하는 소설', '존경하는 사람', '평소 즐기는 게임' 등의 질문을 해 흥미로운 답변을 이끌어낸다. 이들의 지적이고 이색적인 답변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공감을 준다.
***미래 : 우주에 대한 경외와 자연에 대한 겸손**
미래에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최근에 다시 출간된 3~40대에게 아주 익숙할 다음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을 듯싶다. 지난 1980년대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를 열광시켰던 칼 세이건(1934~1996)의 <코스모스>(사이언스북스 펴냄)가 서울대 천문학과 홍승수 교수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됐다.
전 세계 60개국에 방송되어 6억 시청자를 감동시킨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바탕으로 칼 세이건이 쓴 이 책은 출간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코스모스>를 읽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과학의 세계에 뛰어들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칼 세이건이 이 책에서 펼쳤던 우주의 기원과 신비 즉 '우리가 곧 누구인지'를 해명하기 위해 지금도 연구실의 불을 밝히고 있다.
1981년에 학원사에서 펴낸 판에서 빠졌던 사진들이 추가되고 흑백 이미지가 원색 도판으로 바뀐 5백여쪽의 이 책을 다시 읽다 보면 새삼 칼 세이건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과학적 합리성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학자 칼 세이건의 가장 유명한 책, <코스모스>의 핵심 메시지가 바로 "우주에 대한 경외와 자연에 대한 겸손"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이 책의 맨 마지막 장이 '인류의 자멸'에 관한 성찰에 할애돼 있는 것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칼 세이건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구를 수백번도 더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게 된 인류가 '우주적 시야'를 갖기를 소망한다. '우주 한 구석에 박힌 작은 존재'가 이토록 교만을 떨 수 있게 된 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만의 업적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 세이건의 소설 <콘택트>(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외계 생명체와 만날 역사적 임무를 띤 주인공은 외계 생명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다. "어떻게 자멸하지 않고 고도의 문명을 지속할 수 있었는지를 꼭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멸하지 않고 이 문명을 지속할 수 있을까?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인류와 지구에 충성하고 또 그것을 대변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대변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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