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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 "조국을 죽음으로 이끄는 두 개의 길, 증오와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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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 "조국을 죽음으로 이끄는 두 개의 길, 증오와 용서"

[화제의 신간] '글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의 두려움

우리는 해방 직후 일제 부역자들에 대한 '숙청'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계속되는 외세 의존과 정체성 혼란이었다. 반면에 프랑스의 독일 부역자 청산을 다룬 <지식인의 죄와 벌>(피에르 아술린 지음.두레 간)은 '숙청' 대상 중에서도 '글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의 두려움'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소위 '지식인'이라는 부류의 숙청 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주목된다.

***까뮈 "조국을 죽음으로 이끄는 두 개의 길은 증오와 용서"**

월간지 <리르>의 편집장을 지냈고 전기작가로도 유명한 저자 피에르 아술린은 신문이나 일기, 회고록, 재판 기록 등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숙청에 따르는 문제점을 객관적 시각으로 비판하면서도 왜 유독 지식인들이 더 혹독한 숙청 대상이 되었는가를 파헤쳐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해방후 프랑스에서 지식인들이 다른 부류들보다 더욱 철저하게 숙청된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생각과 신념을 퍼뜨리는 일은 가장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그러나 더욱 현실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지식인들의 부역은 우선 글과 말로 남아 '증거'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자와 작가들은 그들의 인지도 때문에 타깃이 되기가 쉬었다. 그들은 막강한 금권력의 비호를 받지도 못했고, 국가 재건에 필요한 경제적 관건도 되지 못했던 만큼, 더욱 명백한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저자는 숙청이 목표가 아니라 수단으로 변질되고, 숙청의 원칙도 모호했으며, 재판이 불공정한 사례가 부지기수였다는 숙청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기도 한다.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 치하에서 해방된 1944년 8월부터 2년간에 걸쳐 이뤄진 숙청 과정에, 카뮈와 함께 저항문학 운동에 참여했으며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은 모리악은 <르 피가로>지의 사설을 통해 "죽음의 쳇바퀴를 돌리는 대신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 작가로 <투쟁>지를 통한 활동으로 당시 최고의 권위를 갖고했던 카뮈는 신랄히 응수했다.

"조국을 죽음으로 이끄는 두 개의 길이 있는데, 증오와 용서의 길이라는 것이다. 나는 증오에 대해서는 일말의 애착도 없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반역자를 사랑할 줄 아는 모리악을 존경하지만, 시민으로서의 나는 모리악을 불쌍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우리에게 반역자와 졸개들의 나라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회를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나는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의를 좌절시키는 자비를 거절할 것이다."

요컨대 숙청은 진실.정의.미래의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숙청은 역사적 진실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고, 정의의 승리를 부르짖기 위한 것이었고, 프랑스의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숙청의 모든 정당성이 근거하고 있었다. 치욕의 역사를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1944년 9월9일자 <프랑스 문예>를 통해서는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우리는 모든 과거의 불행은 반역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오늘 또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면, 주모자들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다. 어제의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곧 내일의 죄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러나 카뮈도 숙청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뒤 숙청은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1945년 8월30일자 <투쟁>지 사설에서 "숙청이라는 낱말 자체가 이젠 역겨울 정도이다. 사태가 추악하게 발전해버렸다"고 토로했다. 숙청의 주역들이 증오와 비양심 사이에서 중용 지대를 찾아내지 못했고, 심리과정에서 정치문제가 무분별하게 개입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식인과 지성인의 차이**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숙청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지성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지식인의 무거운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성인'은 19세기말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 전까지만 해도 '지성인'이라는 낱말은 없었다. 당시 사회지도층 인사인 성직자와 학자들을 가리켜 '지식인'이라고 지칭했다. 1890년대에 들어 몇몇 우파 지식인들이 좌파 지식인들을 비난하는 의미로 '잘난 체하는 자'라는 신조어로 '지성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을 때 좌파 지식인들이 이 신조어를 받아들여 '지성인들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그 의미가 우파 지식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일반어로 확대됐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최초의 지성인으로 드레퓌스 사건의 주역인 에밀 졸라를 꼽지 않는다. 한 세기를 훌쩍 거슬러 올라가서, 무고하게 사형선고를 당한 툴르즈 시민 칼라스를 구명하기 위해 3년 동안이나 발벗고 나섰던 철학자 볼테르를 '지성인의 대부'라 일컫는다.

바로 이 점에서 지성인의 고유한 의미를 잘 엿볼 수 있다. 사르트르가 '<지성인을 위한 변론>에서 명료하게 정의했듯이, 지성인은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에 뛰어드는 자"이다. 무엇이 지성인으로 하여금 남의 일에 뛰어들게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정의와 자유, 선과 진실, 즉 인간 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유린당하거나 문제시 될 때, 지성인은 방관자의 자세를 버리고 남의 일을 자기 일로 간주하고서 정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선과 진실의 승리를 위해 투쟁에 나선다.

말하자면 지성인이란 개인적인 이익이나 사사로운 집단 이기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의'를 존중하고 지키기 위해, 모든 종류의 권력에 대항해 핍박과 수난을 무릅쓰고 투쟁하는 가시밭길을 스스로 택하는 자이다.

미셸 비녹 등 일군의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1898년 드레퓌스 사건에서부터 시작해서 1980년 장 폴 사르트르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20세기 프랑스를 '지성인의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그만큼 지성인들이 20세기 프랑스의 정치.사회.문화.교육.언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드레퓌스 사건과 사르트르의 죽음이라는 두 시점을 상기한다면 '지성인'은 여든 두 해의 화려한 삶을 살다 간 한 인간과 같다"고 말한다. 이후에는 참다운 지성인은 보기 힘들다는 의미일까.

***대표적인 부역문학가 라 로셀의 비극**

아무튼 저자는 이 책의 제3장 '지성인과 책임'에서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가?"라면서 글 쓰는 작업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섬뜩한 경고를 날린다.

저자는 프랑스의 숙청 과정에서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면 그것은 "이념을 먹고 사는 인간, 즉 원칙적으로 지성계에서 일하는 자는 글을 쓰는 바로 그 순간에 자기의 글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또한 유행과 체제를 넘어서서 자기 글에 대해 치욕을 느낄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에 가서도 자기가 썼던 문장들 가운데 하나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만 할 것이다. 글을 쓰는 순간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자기 글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만 하고, 얼굴을 붉히지 않고서 다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태도는 평화시에는 순진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최대한의 의미를 갖게 된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독일 점령 치하 4년간 대표적인 지성지인 <신프랑스지>의 발행인을 맡아 친독지로 변질시키며 대표적인 부역 문학가로 활동했던 드리외 라 로셀의 비극은 상징적이다. 그는 스스로 부역자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인물이었다. 점령 2년 뒤 그는 "작가는 반대편 작가들의 죽음을 바라서는 안된다. 반면에 작가는 자기가 한 말의 결과로 인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아라공과 엘뤼아르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건 그들의 일이다. 나는 그들을 노리지 않을 것"이라고 부역자로서의 고뇌를 표현했다.

저자에 따르면, 훗날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진 바로 그는 점령군 당국에 개입해서 앙드레 말로, 장 폴랑, 가스통 갈리마르 그리고 아라공에게 어떤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장 폴랑을 감옥에서 꺼내주기도 했다.

저자는 "바로 그런 인간이었기에, 그는 자기가 져야 할 책임에 대해 너무나 선명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라면서 "그는 전적으로 참여했다가 전적으로 패배한 자였다'고 말한다.

그는 그마나 진정성을 지키려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동료들이 암흑기에 이중 플레이를 했었다고 애써 주장하던 시점에 그는 "우리는 패배했기 때문에 반역자이다. 이것은 당연한 법칙이다"면서 "내가 부역자의 자존심에 충실하듯이,레지스탕스의 자존심에 충실하시오. 내가 속이지 않듯이, 속이지 마시오. 내게 사형을 내리시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플레이를 한 것이고, 나는 졌소. 나는 죽음을 요구하오"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숙청사는 이처럼 '자기합리화'에 급급했던 일제 부역세력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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