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좋으니 마실이나 갈까?**
새벽에는 영하 십도로 떨어지고 눈도 살짝 왔지만, 늦은 아침을 먹는데 해가 쨍 난다. '날도 좋으니 운동 삼아 마실이나 갈까?' 우리 마을 뒷산을 넘어 산길로 한참을 가면 나오는 푸근이 네가 떠오른다. 산 속에 전기도 전화도 들어오지 않는 외딴집이라 눈 쌓이기 전에 한번 다녀와야지 벼렸으니 오늘 가자.
푸근이 네에 가겠다고 나서는데, 어? 아무도 같이 가겠다는 이가 없다. 탱이 얼굴을 쳐다보니,
"차타고 가? 걸어 가?
"운동 삼아 걸어가려고."
대답이 없다. 걸어가고 싶지는 않은가보다. 상상이는 친한 동생인 푸근이네 집이니 앞장 설 줄 알았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 상상이를 보고,
"안 가냐?"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걸어서 가긴 좀……. 춥잖아요."
이리 저리 뜸을 들이며 함께 갈 동지를 모으느라 노력했지만 결국은 혼자다. 장갑은 두 겹으로 끼고, 등산양말을 신어 완전무장을 하고 나선다.
***자전거 타고 마중 나온 푸근이**
혼자서 산길을 허위허위 올라간다. 이웃집을 먼발치에서 하나 둘 지나치고 산으로 오른다. 억새가 날리는 모습도 보이고, 묵은 논에 물이 언 것도 보이고, 길 위에 내 그림자도 보인다.
산모퉁이를 도는데 저쪽에서 뭐가 나타난다. 뭐지? 맨손으로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내려온다. 누구지? 비탈길을 내려오던 자전거가 나를 휙 지나쳐 선다. 등 뒤에서 푸근이가,
"아줌마에요? 혼자 와요?"
푸근이가 마중을 나왔나 보다. 우리 식구가 다 올 줄 알았는데 혼자서 오니 못 알아볼 뻔했단다.
"상상이 형은 안 와요?"
"그럼 형은 뭐해요?"
실망이 커서 자꾸 서운한 소리를 한다.
"우리 엄마가 아줌마네 식구 모두 오면 동치미 냉면 할라고 했는데......"
"글쎄 걸어간다니까 아무도 안 가겠다 하더라."
"왜 걸어 다니는 걸 싫어하냐?"
여덟 살 푸근이는 우리 집까지 걸어온 적이 여러 번 있다. 그것도 여동생 푸름이를 데리고. 그러니 걸어오지 못하겠다는 게 이해가 안 가지. 그러나 어쩌랴, 푸근이는 힘없이 자전거를 돌려 나와 함께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마루를 넘어 임로가 셋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왔다. 거기서 오른쪽 길로 가야 푸근이 네다. 그런데 푸근이 숲 사이 작은 길을 가리키며,
"이 길로 가도 되는데……. 좀 돌아가요."
"어! 여기도 길이 있네, 그럼 그 길로 가 보자. 한번도 안 간 길이라 재미있겠다."
그 길은 숲 사이로 난 울퉁불퉁한 비탈길이다. 자전거를 탄 푸근이는 그 길로 내려간다. 그러다 넘어졌다.
"우리 아빠는 이런 길도 자전거 잘 탄데요."
"그래? 좋겠다. 나는 겁난다."
"나도요, 이런 길을 타면 엉덩이가 쾅쾅거려 어휴~."
자기 엉덩이를 문지르며 아픈 시늉을 한다.
이번에는 자전거를 끌고 가던 푸근이가 다시 꽝당 미끄러진다. 얇게 깔린 눈을 쓸고 보니 거기 얼음비탈이다. 제법 미끄럼을 탈만하다. 올해는 아직 눈썰매를 못 탄지라 얼음위에 앉아 미끄럼을 탔다. 잘 미끄러지지 않아 손으로 밀어가며 내려갔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푸근이도 탄다. 푸근이 몇 번 타더니 잠바를 벗어 엉덩이에 깔고 타다, 장화에 눈이 들어가 젖었다고 양말바닥으로 탄다. 아차, 갈 길이 먼데.
"너 그러다 언다. 그만 가자."
푸근이 그래도 두어 번 더 타더니 일어서며,
"으, 춥다."
부르르 떨며 잠바를 털어서 입고, 장화를 신고, 이때까지 자전거에 싣고 다니던 모자, 장갑을 낀다. 집에 얼른 가야겠다. 푸근이에게 먼저 가라고 자전거는 내가 끌고 뒤쫓아 가겠다고 했지만, 푸근이 나와 함께 걸어간다.
"우리 물 얼었어요."
"그럼 샘에서 떠다 먹겠네."
산골에는 한겨울에 물 어는 일이 예사다. 푸근이 옷을 버렸으니, 이 겨울 물을 떠다 밥 해 먹는 푸근이 엄마에게 빨래거리를 안겨줘 미안하다.
한참을 내려오는데 터널이 있다. 길 양쪽 나무끼리 만나 이룬 터널. 잎이 한창일 때는 정말 터널 같겠다. 터널을 지나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로 갈라져 올라간다. 길이 가팔라 숨소리도 거칠다.
드디어 푸근이네 집에 다다랐다. 푸근이 엄마는,
"언니 혼자에요? 나는 식구 다 오는 줄 알았는데……."
***"나도 신라 가 봤는데……."**
방에 들어가니 나무난로가 있어 더운 기운이 훅 느껴진다. 식구들 모두와 작은 상 둘레에 모여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한다. 지난달에 보고 못 보았으니 서로 소식을 전한다. 상상이는 뭐 하는지, 탱이는 뭐 하는지…….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 집이나 그 집이나 지내는 모습이 비슷하다. 늦게 아침 먹고 치우면 한낮이고. 잠깐 몸 움직여 일 좀 하면 해질녘. 불 때고 집안에 들어와 저녁 먹고, 긴긴 겨울밤에는 책 보고 놀고…….
집주인이 냉면을 준비한다고 나간 사이, 푸름이 책을 하나 가져와 보여준다. <어린이 지도책>이다. 이번에는 푸근이가 책을 하나 꺼내더니,
"이거 아저씨한테 말해 주세요. 도서관에서 빌린 거니까 도서관에서 빌려 보라고요."
책 제목을 보니 <가재>다. 푸근이네 집에는 가재가 산다. 그 덕에 지난여름 우리도 가재를 잡아 보았고, 푸근이 내게 가재 그림을 그려다 준적도 있다. 남편이 푸근이에게 가재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더니 그 생각이 났나 보다. 친절한 꼬마 선생님이다.
<가재>책을 뒤적이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들과 함께다. 책에 가재는 겨울잠을 잔단다. 푸근이에게,
"그럼, 겨울에는 가재 못 잡겠네."
"아뇨. 돌만 들추면 그 속에 있어 더 잡기 좋아요."
"그럼 지금 잡으러 갈까?"
고개를 젓는다. 하긴 나도 막상 나가려니 춥다.
다시 책에 실린 가재 사진을 보며 이야기하는데,
"가재 알이 맛있어요. 오독오독한 게 아주 맛있어요."
입안에 군침이 돈다. 푸근이는 뭐든 잘 먹고, 음식 맛을 기차게 잘 알고 그 맛도 실감나게 이야기 한다.
이번에는 푸름이가 가져온 어린이지도책에 있는 우리나라 지도를 펴고 셋이 엎드려 어디어디 가 봤는지 알아보기를 했다. 서울, 대전, 전주…….
"우리 사는데도 여기 나와요?"
"어디보자. (전주와 대전 사이를 손가락으로 찍으며) 여기쯤이겠다."
"나는 신라 가 봤는데."
"경주? 거기는 여기야."
"부산 가 봤니?"
"네, 우리 큰할아버지가 부산 살아요. 우리는 밀양도 가 봤어요."
냉면을 한 대접씩 먹었다. 푸근이 제 아버지보다 더 큰 그릇을 뚝딱 비웠다. 푸름이도 제법 많은 냉면은 다 먹었다. 가만 보니 푸름이 볼에 살이 통통하다. 이런 날에도 맨손으로 자전거를 타는 자기 오빠 따라다니며 놀다 보니 푸름이 건강 하나는 걱정 없겠다.
푸름이 휴대폰을 들고 와 사진을 찍는다. 휴대폰이 망가져 중고로 바꾸었는데 카메라가 들어있는 건가 보다. 내 얼굴을 찍어준다기에 휴대폰을 쳐다보는데 렌즈가 보이지 않는다. 렌즈가 어디에 있나 보는데,
"아줌마, 웃어야지."
내가 웃으니 푸름이가 사진을 한 장 찍는다.
"찍었다 찍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신기한가 보다. 휴대폰에는 내 얼굴이 가득 담겼다.
어느덧 4시가 다 되어간다. 슬슬 일어서야 할 때다. 산 속 겨울해가 떨어지기 전에.
일어서려 하니 푸름이가,
"자고 가."
그 소리에 마음이 살살 녹는다. 그만 자고 갈까 잠깐 흔들린다. 그래도 간다니까 푸름이가 귤 한 개를 내게 주며 가다가 목마르면 먹으란다. 그리고는 자기 엄마, 아빠에게.
"우리도 마중 나가자. 산책 가자."
다 함께 나왔다. 그 집 개 세 마리도 풀어 모두 여덟이 길을 나선다.
길에서 푸근이 엄마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면 푸근이 아빠가 가끔 맞장구를 치며 어른 셋이 이야기에 푹 빠져 걷는다. 푸근이는 야생마처럼 앞장서서 달리고, 푸름이 강아지 끈을 잡아끌다 제 오빠 뒤쫓다 한다. 한참을 가는데 푸름이 우리 셋을 세운다.
"여기 서. 사진 찍어줄게."
다시 한번 찰칵.
길은 끝없지만 푸근이 아빠가 이제 여기서 돌아가잔다. 그렇다 너무 멀리까지 배웅을 나왔다. 혼자 걸어 산길을 내려오려니 지는 해 속도처럼 발걸음이 빨라진다. 길을 나설 때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온 식구에게서 소중한 손님 대접을 받고 돌아오니 너무 좋다. 산골에서는 누구나 소중한 사람이 되나 보다.
(푸근이와 푸름이는 여덟 살 오라비와 여섯 살 누이다. 이 글에서는 이 오누이를 건강하고 넉넉해 ‘푸근이’, 싱싱하게 자라 ‘푸름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필자 소개**
무주 산골에서 자급 농사를 하며 자연에 눈 떠가고 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맛을 나누고 생각이 서로 이어지는 이와 만나고 싶어 틈틈이 글을 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을 두루 할 수 있는 전인이 되고 싶다. <자연달력 제철밥상>(들녘 펴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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