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오면 평생 기사, 사무원 소리를 들어야 한다. 못 배운 설움을 떨쳐보려고 학사, 석사 심지어 박사 학위를 따 보아도 회사에서 인정을 안 해주니 가슴에 응어리가 안 지겠느냐."
1966년 설립돼 한국 과학기술 연구개발(R&D)의 상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16년만의 파업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이런 갈등의 배경에는 현 김유승 원장의 시대착오적인 반(反)노동조합 정서와 학력주의가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눈총을 받고 있다.
***과기노조 KIST지부, 27일부터 15일째 파업중**
전국과학기술노조(위원장 직무대리 최영섭) KIST지부는 지난해 12월24일 경고 파업을 시작으로 27일 전면 파업에 돌입해 11일로 15일째를 맡고 있다. 전체 정규직 6백여명중 기능직 1백40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KIST지부는 현재 1백10~1백15명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지난 6일 오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하는 과학기술인 신년 인사회 행사장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갖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과학기술부 최석식 차관은 직접 나서 김유승 KIST 원장에게 노조와의 대화를 종용했으나, 그 후 1주일이 가깝도록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 노조는 ▲결원보충 및 신규인원 충원 ▲직원들의 직급 통합 ▲신입직원 교육시간 확보 ▲당직제도 개선 ▲미승인 학위취득제도 개선 ▲각종 위원회 참가(참관) 등을 요구하고 있으나, 김 원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노조가 경영의 영역을 침범하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며 대화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 정규직 규모 절반으로 줄어, 노동강도 세 과로사하기도**
하지만 현재 KIST지부가 요구하고 있는 각각의 항목들은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는 게 과학기술 관련 국·공립 연구소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대표적으로 경영진이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결원보충 및 신규인원 충원' 문제의 경우만 보아도, 현재 KIST의 시설을 관리하는 시설과는 정규직 28명과 비정규직 6명을 포함해 총 34명이 근무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 43명이었던 것이 10명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경비 업무를 맡아보는 안전실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외환위기 이전 36명이었던 것이 현재는 정규직 8명과 비정규직 14명을 포함해 총 22명이 주·야간 2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KIST는 그 규모가 크고 건물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건물이 노후화돼 있어 시설 관리와 경비 업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설이 노후화된 만큼 직원들의 숙련도가 업무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KIST는 외환위기 수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정규직 수준을 유지하면서 필요인력은 마지못해 비정규직으로 충당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2004년에는 경비 업무를 보는 안전실 직원이 과로사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KIST의 노동 강도는 파견 나오는 비정규직 사이에서도 악명 높아, 최근에는 경비 업무를 맡아 본 한 비정규직이 2년간의 KIST 생활을 그만두면서 경영진에게 보내는 편지가 공개되기도 했다.
이 비정규직은 편지에서 "비정규직들 사이에서 KIST에서 일한다고 하면 '와!'라고 부러워하지만 막상 같은 업무를 보는 다른 회사 비정규직과 월급과 노동 조건을 비교해보면 참 말하기 힘들다"며 "월급에서도 큰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노동 조건이 비교할 수 없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내가 근무하는 동안에도 여러 사람이 단기간(6개월)에 이직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도 KIST의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강택관 (47) KIST지부장은 "결원을 당장 한꺼번에 충원하거나 정규직을 대폭 늘려달라는 요구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며 "결원 충원시에는 정규직으로 확충하고 그 기간도 기관의 사정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하자는 게 우리 입장"이라고 하소연했다.
***"입사할 때 고졸이면, 박사 학위 따도 평생 '기사', '사무원'"**
과기노조에서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KIST지부에 파견온 이광오 총무국장은 "처음에 지부의 요구를 보고 파업까지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노조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김 원장의 반(反)노조주의와 뿌리 깊은 학력주의가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특히 KIST지부는 대부분의 노조원들이 기능직으로 돼 있어서 김 원장이 직원을 대표하는 노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이면에는 기능직들 대부분이 입사할 당시 고졸 출신이라는 게 학력차별주의가 깔려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현재 KIST는 연구직, 행정직, 기술직에 기능직이라는 직군을 따로 유지하고 있다. 즉 입사할 당시 고졸 학력을 가진 이들을 기능직으로 분리해 기술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은 '기사'로,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은 '사무원'으로 규정해 따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경력이 15년 이상 돼 KIST의 행정, 기술 업무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입사할 때 고졸 학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퇴직할 때까지 '기사', '사무원'으로 불리는 실정이다. 대졸 학력을 가진 행정직과 기술직이 경력이 쌓일수록 선임 연구원, 책임 연구원으로 직급이 올라가는 것과 대조적이다.
강택관 지부장은 "못 배운 게 한이라고 대부분 회사를 다니면서 공부를 해 대부분의 기능직 직원들이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있고 일부는 석사 심지어 서너 명은 박사 학위까지 가지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도 경영진은 입사할 때 고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직급 명칭 통합은 절대 안 된다는 말만 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미 대전의 화학연구원의 경우 2005년부터 기사, 사무원의 명칭을 행정직, 기술직과 통합하기로 노사가 합의했다.
경영진은 어처구니없게도 기능직들이 대졸 신입사원들이 행정직이나 기술직에 입사할 때와 똑같은 자격 요건을 갖출 경우 제한적으로 직종 변경을 해줄 수 있다고 회유하고 있다. 이 경우 4~50대의 기능직 직원들이 대졸 신입사원에게 요구하는 영어 성적을 제출해야 하는 등 사실상 불가능함을 노린 것이다.
***"근로기준법에도 '학력'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는 규정 없다"?**
지난 7일 노조와 만난 김유승 원장과 경영진은 "국가 연구개발 기관의 특성상 학력차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며 "근로기준법에도 '학력'을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는 규정은 없다"며 학력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 노조원은 "'고졸밖에 안 되는 너희들과 대화하기 싫다'는 얘기로 들려서 아주 속상했다"며 "고졸 대통령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가 연구개발 기관이 학력주의를 주저 없이 내세우는 게 말이 되느냐"고 30년 못 배운 한을 다시 한번 토로했다.
평생 못 배운 설움을 30년 몸 받친 직장에서 받는 이들의 연말연시는 그 어느 때보다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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