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아이들' 연재를 시작하는 글을 읽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동네는 인터넷 전용회선이 들어오지 못하는 산골이라 그때그때 답 글을 드리지 못하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은 정현이, 규현이입니다. 앞으로 글에서는 아이들 자신이 새롭게 지은 이름으로 올리겠습니다. 큰애는 '탱이', 작은애는 상상을 잘 한다고 '상상이'라 불러달라고 합니다. 필자.
***겨울 아침 햇살처럼 느릿느릿**
잠에서 깨어 안방 창호지 문을 열고 밖을 본다. 된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12월로 들어서니 아침 해가 앞산에서 뜨려면 8시가 넘어야 하리라.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이부자리에서 뭉갠다.
남편과 내가 책을 읽다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지? 이야기를 나누니 상상이도 잠이 깨는 모양이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이불을 푹 뒤집어쓴다. 머리에 덮인 이불을 장난삼아 젖히니, 상상이 머리맡에 두었던 책을 붙잡고 엎드려 읽는다. 우리 부부 약속이라도 한 듯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반듯이 하며 '자세!'한다. 엎드리지 말고 반듯이 앉으라는 말인 줄 알고, 상상이는 느릿느릿 일어나 이불에 다리를 묻고 앉아서 책을 읽는다.
오줌이 마려워 더는 못 참겠다. 일어나 옷을 입고 뒷간에 간다. 사람 기척을 알고 고양이가 마루 앞에서 이야옹, 뒷간 가는 길 닭장에서 수탉이 꼬꼬꼬, 그 소리에 맞받아 오리장 오리들이 꿱꿱거린다. '지난 밤 잘 잤냐' 하며 모이부터 챙겨줘야지 지나갈 수 있다.
건넌방 탱이는 어느새 일어나 자기 방에서 뭔가를 한다. 그동안 늘어지게 자곤 하던 탱이 올 가을 들어서 활기차지더니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탱이 하루 종일 꼼지락꼼지락 나름대로 바쁜 하루가 또 시작인가. 탱이는 평화롭게 지내고, 눈치껏 집안 일 돕고, 키도 엄마보다 크니 어느새 어른대접이다. 어디서 무얼 하든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해가 어느새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창호지 문을 모두 열어젖히니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따시다. 웅크렸던 어깨가 펴진다. 아, 해님이 최고야. 식구들 모두 일어나 움직이고 집안에 활기가 가득하다.
아침 밥 준비를 하는데 누구 하나가 '시작하자' 소리를 하니 식구들이 동그랗게 모여 아침 운동을 시작한다.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삼사십 분 운동을 한다. 지난가을 탱이가 배워와 우리 식구에게 가르쳐서 시작한 운동. 가을걷이 때는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에 하곤 했는데, 이제는 바쁜 일도 없으니 아침에 한다. 요즘은 상상이가 지도를 한다. 상상이는 하나 둘 리듬을 맞춰주고 남편과 내가 잘못된 곳까지 지적한다. 남편은 쑥스럽게 웃으며 상상이 지적을 받아들인다. 그 모습이 참 좋다. 부드러운 아버지!
운동을 다 하고 밥을 한다. 탱이는 오늘도 아침 샐러드를 만들고, 남편은 배추된장국을 끓이겠단다. 탱이는 어제 먹고 남은 고구마와 호도를 으깨고, 배추 대궁 몇 개를 썰어 버무린다. 상큼하고 싱싱한 샐러드가 금세 뚝딱. 남편은 내게 물어가며 배추 된장국을 끓인다. 거기에 묵나물 무치고, 생선 한 토막 지지고. 오늘도 아침 밥상이 넘쳐난다. 상상이 책에 푹 빠져 어찌 돌아가나 모르는 게 다행인가.
아침밥을 느긋하게 먹는다. 이야기를 해 가며 밥을 먹는데 상상이 중간에 일어나 나간다. 뒤가 마려운가 보다. 시원하게 비우고 먹으면 좋지.
***자기대로 보내는 낮 시간**
집안을 치우고 시계를 보면 한낮이다. 오늘은 무슨 일 할까 생각하며 차를 한 잔 마신다. 농사일이나 집안에 큰일이 있으면 온 식구가 달라붙어 하겠지만, 가을걷이를 마치고 메주, 김장까지 다 해 놓았으니 산골 겨울은 한가하다. 땅을 가꾸는 일을 하거나, 땔감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겨울잠을 자거나……. 상상이는 재작년 겨우내 오리를 돌보았다. 탱이는 작년에는 뒷산을 돌아다니며 고추 말목을 하루 두 개씩 해 왔는데 올해는 어떻게 보낼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은 해마다 달라지는데 올해는 아직 미지수다.
뒷밭을 정리하며 볏짚을 덮어준다. 일을 하노라니 먼 길에 동네 차들이 오고가고, 상상이는 마당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남편이 경운기에 산 흙을 퍼 담아 끌고 온다. 상상이는 제 아버지가 흙을 마당에 부리는 일을 돕는다. 자기 키만한 삽을 들고 열심히 한다.
전화가 와서 뛰어 돌아왔다. 집에 온 김에 콩나물 길러먹자는 생각이 난다. 콩나물콩을 기를 때 밀 엿기름을 기르면 일머리가 맞으니 밀 엿기름도 길러야겠다. 광에서 콩나물콩 한 공기와 밀을 한 말 꺼내와 씻어 인다.
탱이가 오늘 점심 어쩌겠냐고 묻는다.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배가 고픈 사람이 탱이. 그러니 먼저 챙기곤 한다. 점심 메뉴가 김치볶음밥으로 정해지고 탱이가 앞장서서 마련한다. 누나가 밥상을 마련하니 상상이도 곁에서 한 몫 한다. 상상이 엄마가 하면 관심이 없다가도 누나가 하면 자기도 따라서 한다. 밥상이 다 차려지니 남편이 마루문을 열고 들어선다. 우리 집에는 밥상 텔레파시가 있다.
점심을 먹는데 우편배달부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상상이가 달려가 우편물을 받아온다. 오늘 신문이 우편물과 함께 온다. 모두 신문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안방 아궁이에 불부터 지핀다. 불을 피우는데 이웃집 아줌마가 잠깐 다녀가 배웅할 겸, 집 안팎을 돌아다보며 산책을 한다. 상상이는 스케이트보드를 가지고 길에서 온갖 묘기를 부린다. 집 앞 길이 며칠 전에 시멘트 포장이 되었다. 그동안 길이 울퉁불퉁해 스케이트보드, 자전거, 킥보드 모두 처박혀 있었는데 이제 활개 치며 돌아다닌다.
내일 불 지피기 좋게 뒷산에 잠깐 올라가 땔감 한 아름 해 오는데, 아까 전화 받는다고 그냥 뛰어간 채, 밭에 호미야 낫이 그대로 널려있다. 쯧쯧. 그러니 식구들이 자기들을 보살필 힘이 있으면 나 자신을 보살피라하지. 나한테 잔소리 안 하는 식구들의 내공이 새삼 크게 느껴진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아궁이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집안으로 들어오니 상상이가 이상하다. 어? 볼에 팥밭을 갈았다. 새로 포장된 비탈길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다 미끄러졌나 보다. 자기대로 소독약을 발랐단다. 그래도 쑥뜸을 뜨자고 했다. 상상이는 쑥뜸을 꺼리지만 이번에는 순순히 방에 가 드러눕는다. 자기도 걱정이 되는가 보다.
***저녁 시간은 책 보고 글 쓰는 시간-우리 식구는 동업자**
겨울밤이 얼마나 긴가. 여섯시도 안 되어 밖이 깜깜해 지니 식구가 모두 집안에 모인다. 저녁은 간단히 먹고 우리 식구 책 읽고 글 쓰고 고요한 시간을 보낸다. 상상이는 의자에 몸을 걸치고 책을 읽는다. 그러면서 날 땅콩을 까먹으며 혼자 웃어가며 혼잣말을 한다. 탱이는 책상에 앉아 뭔가를 한다.
내가 식구들에게 글 쓴 걸 봐달라고 '결제'를 부탁한다. 남편과 내가 자연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하고 출판사와 이야기가 오고가는 걸 지켜본 탱이가 우리보고 그냥 출판사를 하나 차리자고 했다. 그러다 출판사가 아닌 기획사를 차리기로 했다. 이름은 홍시기획. 탱이가 대표. 남편과 내가 '직원?' 상상이는 '글에 주인공'.
이 홍시기획은 어디 내놓을 게 아니라 우리 식구끼리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끼리라도 이렇게 이름을 붙이자 모두 자세가 달라졌다. 우리 식구는 동업자가 된 것이다. 누가 글을 쓰든 그 글을 식구들이 결제해 주고, 그렇게 해서 돈이 벌리면 조금씩 나눠 가지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한다. 홍시기획은 그런대로 굴러가 탱이에게 글 쓸 기회가 하나 둘 생기고 있다. 탱이가 글을 쓰면 봄 싹처럼 상큼하다. 탱이, 상상이 같이 자연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 몫을 하면 우리는 밀려나겠지.
아, 졸리다. 탱이 방에 불이 꺼진다. 상상이와 내가 씻고 잠자리에 들려니 남편은 벌써 잠이 들었다. 오늘 하루도 고요하게 흘러갔다.
오늘 하루를 쓰고 나니 식구들 하루가 아니라 내 하루 이야기가 되었다. 식구들이 하루 종일 함께 있긴 하지만 나는 내 일을 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사니 아이들이 무얼 했는지 잘 모른다. 이래도 되나?
***필자 소개**
무주 산골에서 자급 농사를 하며 자연에 눈 떠가고 있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맛을 나누고 생각이 서로 이어지는 이와 만나고 싶어 틈틈이 글을 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을 두루 할 수 있는 전인이 되고 싶다. <자연달력 제철밥상>(들녘 펴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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