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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완역 <열하일기> 출간, "입말 쏙쏙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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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완역 <열하일기> 출간, "입말 쏙쏙 들어와"

[새책] 사후 2백년 앞두고 <열하일기>, <박지원 시문집> 출간

조선 후기 주류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한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대표작 <열하일기>가 읽기 쉬운 우리말 번역본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됐다. 좋은 우리말·글 보급해 앞장서온 보리 출판사는 최근 북한 문예출판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열하일기> 3권과 박지원의 시문집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를 출간했다.

***남쪽에는 '서구 사상가' 눈으로 덧칠한 해설서만, 북한은 1950년대 완역본 출간**

'허생전', ‘호질(虎叱)' 등을 교과서에 배운 까닭에 박지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근대를 열어젖힌 걸작'으로 평가받는 그의 <열하일기>를 사람들이 직접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1968년 민족문화추진회가 발간한 고전국역총서본과 1983년에 나온 윤재원 번역의 박영사판 등 몇몇 번역본도 지금은 모두 절판돼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최근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들뢰즈와 가타리 등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책이 화제가 됐는데도, 서구 사상가의 눈으로 덧칠된 <열하일기>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진짜 박지원의 육성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런 한심한 현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북한에서는 이미 1950~60년대 국가 차원의 대대적 학술사업으로 고전 문학작품을 현대어로 옮기는 작업을 해 '조선고전문학선집' 1백권을 출간했다. 특히 조선과학원 고전연구실 소속의 학자 리상호의 번역으로 1955~1957년까지 <열하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역해 출간을 했다. 남북한 통틀어 최초의 완역이었다.

보리 출판사는 리상호와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나는 껄걸 선생이라오>)의 유려한 번역을 현재의 우리말 표기법에 따라 손질한 뒤, 지도와 여행일지, 연암의 연표와 해설논문 등을 덧붙여 이번에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호질(虎叱)을 '범의 꾸중'으로 옮겨, 입말 살린 번역 눈에 쏙쏙 들어와**

완역본이 1천9백여쪽에 이르는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정조4년(1780)에 청나라 황제의 칠순 잔치 축하 사절단 일원으로 압록강~베이징~열하(지금의 허베이성 청더·承德)까지 3천리 중국 여행을 다녀온 뒤 4년 동안 26권 10책으로 펴낸 기행문집이다.

<열하일기>는 코끼리부터 티벳 불교까지 여행 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가감 없이 싣고, 옛 문헌과 같은 좁은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는 당시 조선 사회와 사대부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거침없는 풍자를 쏟아내 당대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정조로부터 옛 글의 권위를 허물고 선비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문체반정'의 주범으로 몰려, 그 후 1백여년간 금서처럼 필사본으로만 떠돌았다.

이번에 소개된 번역본은 '호질'을 '범의 꾸중'으로 옮기는 등 우리말 입말을 최대한 살려 번역해 청소년들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특히 리상호는 잔주르다, 덩둘하다, 날탕패와 같은 토박이말을 번역에 살려 쓰고, 보리 출판사가 교정을 하면서 찌꺼기, 자채기, 모꼬치, 물역 따위의 북에 남아 있는 우리말을 그대로 살려 원본과는 다른 우리말의 상찬으로 <열하일기>를 탈바꿈해 놓았다.

이렇게 최대한 우리말을 살려 번역을 해놓은 탓에 당대 사대부들에 대한 질타와 박지원의 철학에 더욱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 박지원이 세상을 떠난 지 2백년이 되서야 일반 사람들도 그의 육성을 온전하게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소위 사대부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오랑캐 땅에 나서 자칭 사대부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아래위 입성을 소복으로 한다는 것은 이것이야 상복이 아닌가? 머리를 쥐어 묶어 삐쭉하게 쪼았으니 이거야 남방 오랑캐의 북상투가 아닌가? 무엇이 예법이란 말인가?……내가 세 가지 계책을 말하였으되 너는 한 가지도 들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러고도 네 입으로 조정의 신임 받는 신하라고 하니, 대체 신임 받는 신하 꼴이 이렇단 말인가! 이 죽일 놈 같으니!"('허생전' 中)

"옳다! 이렇게 난 후에야 이용(利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요, 이용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있은 후에야 그 질서를 바로잡을 것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몰라 생활 자료가 근본 부족하면서 억지로 잘살겠다고만 한다면 어떻게 그 도덕과 질서를 바로잡을 것인가?"('6월27일 일기' 中)

***1950~60년대 북한 번역본 1백권 남쪽에도 소개돼**

보리 출판사는 이번에 나온 박지원의 책에 이어 앞으로 이규보 작품집 등 2006년 말까지 '조선고전문학선집' 1백권을 ‘겨레고전문학선집'이란 이름으로 계속 출간할 예정이다. '조선고전문학선집'은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1950~60년대 우리 고전을 선별해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것이다.

남쪽이 못한 일을 북쪽에서 앞서 했고, 이 소중한 성과를 이제 한겨레가 모두 공유하게 됐으니 부끄러워할망정 기쁨까지 감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나올 다른 고전들도 주목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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