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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벗겨진 안익태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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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벗겨진 안익태의 거짓말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④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는 친일파이자 친나치주의자였다. 게다가 그의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라면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애국가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는 임시방편이며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임진택 씨의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연재를 통해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안익태 애국가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제대로 된 애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 본다.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하나씩 벗겨진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傳聞)증거에 대한 검토
10.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시상(詩想)
11.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2.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1. 안익태에 대한 칭송(稱頌)과 숭모(崇慕)의 배경

안익태씨에 관해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존경과 칭송(稱頌)의 근거는 그가 애국가 작곡자라는 사실 그 자체에서 비롯되지만, 구체적으로는 1955년 3월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에 특별초청을 받고 스페인에서 귀국하여 엄청난 환대를 받은 데에서부터 연유한다. 이승만 대통령 80회 탄신 경축음악회는 서울 시공관(市公館)에서 열렸고,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단한 규모로 ‘大오케스트라와 혼성합창을 위한 환상적 교향곡 코리아’를 연주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포상을 수여했다. 그 때 안익태는 이승만에게 자신의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 악보를 선물했는데, 두꺼운 관현악보의 첫 장에는 지난 10여년 동안 순회 연주한 연도(年度)와 유럽 각국 도시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때부터 안익태라는 이름은 우리 국민들에게 애국가뿐 아니라 대규모 교향곡 ‘코리아판타지’를 직접 작곡하여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국위를 선양한 애국자로 각인되었다.

안익태씨는 1960년 3월 다시 이승만 대통령 탄신 8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재차 귀국하여 연주회를 가졌는데, 그 직후 4.19 혁명이 일어나 대통령 이승만은 하야(下野)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리고는 1961년 5월 박정희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안익태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를 면담하고 대단히 획기적인 프로젝트를 성사시켰으니 이른바 ‘서울국제음악제’이다. 세계음악의 변방(邊方) 한국에서 펼쳐진 이 국제규모의 음악제는 안익태씨가 국제적 위상과 역량을 자랑한 또하나의 계기이면서 동시에 그의 독단적 언행으로 해서 국내 음악인들과 불화를 빚은 행사이기도 하다. 서울국제음악제는 1962년 ‘5.16혁명 1주년 축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첫 회 행사를 시작해서 우여곡절 끝에 1964년 제3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데, 바로 이 1964년 행사에서 예기치 않은 ‘애국가 곡조 표절 논란이’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이듬해인 1965년 안익태씨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생을 마감한즉, 앞서의 존경과 칭송의 감정은 바로 연민과 숭모의 심정으로 바뀌어 그를 기리는 사업들이 준비되는 바, 그 중 하나가 1966년 언론인 김경래씨가 저술한 ‘코리아환상곡 -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서울, 현암사, 1966)’이라는 책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 책은 제목을 달리하여 여러 번 재출판되었다가 2002년 안익태기념재단이 같은 제목으로 재출간하고 2006년 개정판을 펴냈다). 우리 국민들의 안익태씨에 대한 칭송과 숭모의 마음은 대체로 이 책에 담긴 사연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이에 바탕하여 안익태라는 인물은 어린이들에게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지고(至高)의 애국자 · 위인(偉人)으로 새겨지게 되었다.

우리 국민들은 오랫동안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에도 별로 관심 갖지 않은 채, 작곡자 안익태씨가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작곡가이며 지고의 애국자인 것으로 알고 열렬히 애국가를 불러왔다. 1964년 제3회 서울국제음악제 이후 1976년에 애국가 표절문제가 재차 대두되었을 때도 이 문제는 일부 음악인들 사이에서만 논란이 되었지 일반 국민들에게는 별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표절문제가 당시에는 중대한 하자(瑕疵)로 인식되지 않았던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고, ‘불가리아’라는 나라가 너무 생소한 나라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잠시 수면 위로 떠올랐던 표절문제가 다시 가라앉은 후, 1994년 여름 ‘역사비평’이 특별기획한 ‘통일조국의 국가(國歌)를 생각한다’라는 특집에서 애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과 통일 이후 국가(國歌)에 대한 전망을 논한 것 말고는, 애국가 작사자 논쟁이나 곡조 표절문제는 유야무야(有耶無耶) 지나간 일로 되어버렸다. 이는 1955년 이후 표면상으로는 ‘작사자 미상(未詳)’이지만 실제로는 친일파 윤치호 작사설이 득세함으로써 애국가의 온존(溫存) 문제가 ‘먹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가 된 상황을 은연중에 반영한다.
애국가 작사자 문제는 이 연재글의 후반부에 충분히 상론하겠거니와, 어떻든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작사자 논란의 한쪽 당사자인 윤치호의 친일문제는 간헐적으로라도 제기되어온 반면, 안익태의 신상문제는 어디서도 의심받거나 거론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영원히 감춰질 줄 알았던 안익태의 은폐된 행적이 200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그 증거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치 알랭 드롱이 주연한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마지막 장면처럼...

2. 독일 베를린에서 발견된 ‘만주환상곡’ 필름

2000년 5월, 국내 전문 공연예술잡지인 <객석>에 베를린 통신원 진화영이 보내온 어떤 기사가 게재되었다. 안익태에 관련된 글로, 제목은 ‘한국인 최초 '베를린 필 지휘,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이었다. 내용인즉슨 독일연방 문서보관소 산하 영상기록보관소에서 어떤 낡은 필름을 발견했는데, “안익태씨가 베를린필을 지휘하여 ‘만주환상곡’이라는 작품을 연주하고 있으며, 선생의 열정적인 지휘 모습에 나치 고위 관료들과 일본 황실의 가족들도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 자료1. 만주환상곡을 감상하는 나치 관료들과 일본 고관들 모습 (출처 : 인터넷 캡처)
▲ 자료1. 만주환상곡을 감상하는 나치 관료들과 일본 고관들 모습 (출처 : 인터넷 캡처)


그 영상은 만주국 건립 10주년 기념 축하 음악회를 필름에 담아낸 7분 분량의 문화영화였는데, 이 음악회는 1942년 9월 베를린필하모니 홀에서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의 지휘로 연주된 것으로, 필름에 담긴 부분은 에키타이 안이 만주국 건립 10주년 기념을 위해 직접 작곡한 ‘大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위한 축전음악–만주국’(약칭 만주환상곡)의 합창 대목이었다.

이 필름은 너무 오래된 것이라 이미 낡고 구형(舊型)이어서 판독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개인 신분으로는 복사와 대여가 불가능했으므로 한국인들에게 바로알려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6년 3월, 베를린 훔볼트대학에 유학중이던 음악학도이자 연극학도인 송병욱이 이 필름을 어렵사리 입수하여 해독(解讀)한 내용을 <객석>에 기고(寄稿)함으로써 일반에 처음 공개되었다.

▲ 자료2. 일장기와 만주국기가 걸려있는 ‘만주환상곡’ 연주회장 (출처 : 인터넷 캡처)


송병욱에 의하면 ‘만주환상곡’은 1942년 만주국 창설 10주년 기념행사 일환으로 베를린필하모니 공연장에서 초연된 작품이며, 필름 자막에는 작곡과 지휘에 에키타이 안, 연주단체는 베를린 大방송악단, 합창은 라미합창단, 그리고 텍스트(합창 가사)는 에하라 고이치로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송병욱이 분석한 ‘만주환상곡’의 비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가장 놀라운 사실은 ‘만주환상곡’의 제4악장 피날레에 나오는 합창 선율이 우리가 오늘날 자랑스럽게 알고 있는 ‘한국환상곡’ 제4악장의 합창 선율과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선율이 같다? 그렇다면 두 개의 작품은 똑같은 선율에 어떤 다른 가사를 놓았을까?

참고로 ‘한국환상곡’의 제4악장 합창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라”
“화려한 강산 한반도, 나의 사랑 한반도 너희뿐일세”
덧붙여 1942년 일본 외교관(나중에 그의 정체는 다르게 밝혀진다) 에하라 고이치가 썼다는 ‘만주환상곡’ 텍스트(합창 가사)는 다음과 같다.

“10년 세월 제국은 무르익었네, 우리는 일본과 굳게 연결되었네”
“신성한 목표 속에 하나의 심장으로, 독일이여 이탈리아여 분투하자”

이러한 전제에서 송병욱은 날카롭게 핵심적 문제를 제기한다.

"만주환상곡 합창부분 선율은 ‘한국환상곡’ 합창 선율과 같은 음곡이다. 그런데 ‘한국환상곡’ 합창부분은 이 작품 전체 악곡을 통틀어 가장 늦게(적어도 1954년 이후) 첨가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선율이 1942년에 이미 작곡되어 ‘만주환상곡’에 쓰였을진대, 안익태는 만주·일본 찬양을 위해 사용한 합창 선율을 그대로 다시 한반도 찬양 합창 선율로 사용한 것 아닌가?"
송병욱의 분석에 힘입어 이 사실을 나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안익태의 ‘한국환상곡’ 합창부분은 일본·독일·이탈리아 추축(樞軸)동맹을 고무하는 프로파간다 작품 ‘만주환상곡’ 합창부분의 자기표절이다. 이는 마치 일제 때 ‘천황만세’를 열렬히 외치던 자가 광복 후 이를 숨기고 ‘대한만세’를 뻔뻔히 외치는 것과 같다."

3. 사실과 왜곡의 공존 – 안익태를 둘러싼 거짓말

2006년은 안익태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안익태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2006년 평양 출생이라는 설이 맞는 것 같다.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정부가 앞장서 선양(宣揚) 사업을 벌였고 음악계에서도 기념사업을 벌였을 터이다. 앞서의 송병욱씨 원고도 공연예술 전문지 <객석>이 안익태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마련한 특별기획이었다. 그러니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를 재조명하고자 한 것이 본의 아니게 감춰진 비밀을 들춰내는 결과를 낳은 셈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같은 해(2006년), 음악학자 이경분 교수(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는 안익태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독일로 향한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의 자료를 발굴하기 위해서다. 나치 시기 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베를린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서 수많은 키워드 중 안익태 관련 정보를 검색하였으나 원하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알아낸 것은 나치 시기 일본과 독일 간의 문화교류에 관한 문서는 베를린이 아닌 코블렌츠 국립문서보관소에 따로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코블렌츠까지 또 가서, 어렵사리 찾아낸 분류번호 R 64 Ⅳ 문서를 열어본즉, 안익태는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으로 거기 숨어있었다.

이경분 교수는 베를린과 코블렌츠 문서보관소에 이어 안익태의 사부(師父)로 알려진 슈트라우스 문서보관소, 그리고 안익태가 여러 차례 연주한 경력이 있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문서보관소까지 가서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내고 그 답사(踏査)의 결과를 이듬해(2007년)에 한권의 책으로 엮어 내놓았다. 책 제목은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 자료3. 이경분 저, ‘잃어버린 시간’, 2007년,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책에 담긴 관점이 모두 새롭고 놀랍거니와, 이 잃어버린 6년의 기간 동안 ‘에키타이 안’의 존재와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1940년대 초 에키타이 안의 화려한 유럽 순회연주는 ‘일독회(日獨會)’(일본과 독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성격의 문화교류단체)의 계획과 지원에 의해 성사된 것들이다.

② 안익태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계는 오래 전부터 사제간이 아니고, 1942년 슈트라우스 작곡 ‘일본축전곡’을 에키타이 안이 지휘하게 된 무렵부터 시작된 관계일 뿐이다.

③ 에키타이 안은 ‘만주환상곡’ 합창 부분 작사자인 만주국 외교실세(駐 베를린 만주공사관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 상당기간 함께 기거하였다.

④ 에키타이 안은 당시 일·독 동맹을 위한 종군(從軍) 지휘자 역할에 앞장선 고노에 히데마로(일본제국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의 대타(代打) 역할로 시작했으나 음악적 역량을 인정받아 곧 경쟁상대가 되었다.

⑤ 에키타이 안은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동맹국의 문화교류 행사에 일본측 대표 음악가로 참석했다. 그 대표성은 고노에 히데마로의 위상과 같은 것으로, 로마 연주에서는 무솔리니의 격찬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이경분 교수가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 내용은 유럽 지역에서의 ‘한국환상곡’ 연주 사실여부(事實與否)에 관한 대목이다. 이교수는 당시 에키타이 안의 기획·홍보를 담당했던 매니지먼트 한스 아들러가 제작한 홍보용 팸플릿을 입수한 바, 거기에 실린 1940년도 동유럽 4개 도시(부다페스트, 부쿠레슈티, 소피아, 벨그라드) 연주 비평문이 언론인 김경래 저서의 안익태 전기(傳記)에도 똑같은 순서로 실려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스 아들러 홍보 팸플릿에는 지휘자가 일본인 에키타이 안으로 나와 있으나, 김경래 저서 전기에는 지휘자가 한국인 안익태로 나와 있고,(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4개 도시에서 연주한 주요 레퍼토리가 한스 아들러 홍보 팸플릿에는 에텐라쿠(越天樂)와 교쿠또(極東)로 나와 있는데, 김경래 저서 안익태 전기에는 어느 도시에서나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한 것으로 나와 있다는 것이다.

▲ 자료4. 한스 아들러가 제작한 ‘에키타이 안’ 홍보용 팸플릿 레파토리 출처 : 이경분 저 <잃어버린 시간> 142p, 독일 코블렌츠 국립문서보관서 소장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1955년 안익태가 귀국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증정(贈呈)했다는 1954년 판 ‘코리아 판타지’ 악보 첫 장에 자필(自筆)된 연도(年度)와 연주장소 역시 신뢰하기 어렵게 된다. 그 삼엄한 독일 나치시대에,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일본 영사관과 일독회의 협조 없이는 공연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치 고위 관료와 일본 · 만주 및 동맹국 고위 관리들이 주로 참석한 정치적 성격의 음악회에서 일본곡 아닌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축 동맹국들의 도시였던 로마 · 벨그라드 · 소피아 · 부쿠레슈티 · 빈 · 바르셀로나 · 마드리드 · 베를린 · 취리히 · 함부르크, 그리고 나치 점령하의 파리까지, 전화(戰火)에 휩쓸린 유럽의 도시들에서 유수한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하여 연주한 것은 사실이나, 레퍼토리는 ‘코리아 판타지’가 아니었다.

안익태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증정한 자필 연주기록은 이경분 교수의 표현을 빌면 ‘사실과 왜곡이 공존한’ 거짓말이었다.

▲ 자료5. 1954년판 ‘코리아 판타지’ 안익태 자필 악보의 첫장. 출처 : 이경분 지음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128p, 독립기념관 소장


4. 안익태와 일본 정보총책 에하라 고이치의 동거(同居)

이 연재글의 첫 회에서 내가 애국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작년에 출판된 이해영 교수(한신대 국제관계학부)의 책 ‘안익태 케이스’를 읽고서였다고 고백한 바 있는데, 이제 그 책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이경분 교수는 음악학자이자 교육학자이지만, 이해영 교수는 정치사상 전공 국제정치경제학자이다. 안익태를 바라보는 시점(視點)이 다르다. 책의 부제도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이다. 이해영 교수는 이에 더불어 인문학적 · 예술(음악)적 소양까지도 뛰어나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이 책을 추천하면서 다음과 같이 상찬(賞讚)하였다. “‘안익태 케이스’는 충격적이고 문제적이며 논쟁적이다. 우리의 국가상징인 애국가가 부당하고 부적격하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활동무대였던 유럽 현지까지 샅샅이 뒤지며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제기한 저자의 ‘합리적 의심’은 우리 모두에게 역사적 삶의 냉철한 책무를 요구하고 있다...”

▲자료6. 이해영 지음, ‘안익태 케이스–국가상징에 대한 한 연구’, 2019년, 도서출판 삼인

이해영 교수의 탐구에서 내가 주목한 대목은 베를린에서 안익태가 한동안 함께 기거했다는 에하라 고이치의 정체를 추적한 내용과, 독일협회(獨日協會=日獨會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와 나치독일의 정치적 연관성을 정밀분석한 내용이다. 무엇보다 이해영 교수는 단지 안익태의 실체를 밝혀내는 데 멈추지 않고 ‘비애국자의 애국가’라는 모순을 직시함으로써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를 어찌해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고 볼 수 있다. 사실은 나 역시 지금은 연출가이자 판소리꾼이지만 원래 대학시절 전공은 외교학(국제정치학)이었다. 그러니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이해영 교수는 에하라 고이치의 실체를 추적하는 데 도움 된 자료가 독일의 한국학자 프랑크 호프만이 발굴·제시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美CIA가 기밀 해제한 美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U.S. Army, European Command, Intelligence Division)의 문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전시 독일의 외교 및 군사정보 활동보고서(Wartime Activities of the German Diplomatic and Military Services during World War Ⅱ)>라는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이 기밀문서에 의하면 에하라 고이치는 표면상으로는 駐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정보기관의 독일 총책이었다. 아울러 이 사실과 함께 에하라 고이치가 1938년 만주국 파견 외교관으로 베를린에 부임하기 바로 전 직책이 만주국 하얼빈市 부시장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① 에하라 고이치는 분명 일본인인데 駐獨 일본 대사관(영사관)의 외교관이 아니라 만주국 외교관이라는 점

② 만주국은 1932년 일본의 괴뢰국으로 건립된 나라이며 거기 상주한 관동군은 우리 독립군 살육에 앞장섰다는 점

③ 하얼빈은 1936년부터 일본 육군 관동군 소속 731부대가 세균전·생체실험을 목적으로 비밀리에 주둔한 지역이라는 점

④ 독일로 파견된 에하라 고이치는 순수한 외교관이 아니라 위장한 타이틀 뒤에 숨어 활동하는 스파이 총책이었다는 점

⑤ 에하라 고이치의 직책은 표면상 2인자이나, 일본인으로서 만주계 하얼빈 시장이나 駐베를린 만주 공사(公使)보다 정치적으로 실세였다는 점 등등...

한 가지만 더 소개하고 가자. 안익태와 에하라 고이치의 관계에 대해 이해영 교수가 발굴한 가장 확실한 ‘빼박’(빼도 박도 못할 자료)이 바로 에하라 고이치 자신이 남긴 수필이다. 2차대전 종전(終戰) 후 일본으로 돌아가 목숨을 부지한 에하라 고이치가 이번에는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예술 관련 잡지들에 자신의 옛일을 회상하는 글들을 기고한 바, 그 중 ‘안익태 君의 편모(片貌)’라는 수필이 있다. ‘안익태 케이스’ 부록으로 그 전문(全文)이 번역되어 수록되어 있는 바, 유의미한 대목을 축약해 약간의 의역(意譯)을 가미해 소개하면 이렇다.
"1941년 가을 명치절 아침,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일본 공사관에서 천황 생일 축하의식을 가졌는데, 기미가요 제창 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흰 넥타이를 맨 청년이 있었다. 식후에 T공사로부터 그가 유럽 유학 중인 지휘자 겸 작곡가인 안익태 君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그 날 저녁 안 군의 초청으로 왕립 음악당에 가서 그가 지휘하는 연주를 감상했는데, 곡목은 자작곡인 에텐라쿠(越天樂)와 베토벤 교향곡 6번(전원교향곡)이었다..... 안 군은 동경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苦學)하다가 유럽 유학의 기회를 얻었는데, 유학기간이 지난 뒤 전쟁으로 인해 미국 후원자의 송금이 불가능해지자 유럽에 더 머물고 싶었던 안 군이 나에게 상담을 받고자 찾아왔다. “어찌되든 내 집에 오면 방법이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 당시 그는 중국의 멜로디를 따, 나의 작사 부분을 교향곡 말미 합창 부분에 넣어 한 시간 정도의 연주가 요구되는 축전곡을 만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근무처로 전화벨이 울렸다. 베를린 필하모니의 매니저였다. “신인 소개 차원에서 안 군에게 지휘를 맡기고 싶은데 어떨까요?” 나는 다소 의외였다. 회(會)쪽에서 “바로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에게 의뢰하는 길만이 유일한 때였기 때문이다..... 안 군은 베를린 외에도 유럽 각지에서 지휘봉을 휘둘렀다. 1944년에는 파리의 샤요궁에서 3일간 ‘베토벤 축제’를 지휘했다. 그 후 그는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가서 베를린이 함락되는 날까지 나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하라 고이치의 안익태 군 편모에 대한 회상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단서들을 발견하였다.
① 1941년 가을 루마니아 일본 공사관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으로 보아 안익태는 벌써부터 일본 천황 생일에 일본 공사관에서 기미가요 피아노 반주를 할 만큼 그 이전에 일본측과 밀접하였다.

② 그 무렵 안익태의 주요 레파토리는 ‘코리아 판타지’ 아닌 에텐라쿠(越天樂)였으며, 기존 작곡가 중에는 베토벤을 가장 선호했다.

③ 안익태는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활과 연주활동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스스로 에하라 고이치를 찾아갔다.

④ 안익태는 중국의 멜로디를 따서 만든 어떤 교향곡 말미 합창 부분에 에하라 고이치가 작사한 부분을 넣어 한 시간 분량의 축전곡을 만든 바, 이것이 ‘만주환상곡’이다.

⑤ 당시 독일협회(獨日協會)의 추천이 없이는 유수한 악단의 지휘자로 발탁되는 것이 불가능했음에도 안익태는 에하라 고이치의 강력한 추천으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지휘 의뢰를 받을 수 있었다.

⑥ 1944년 파리에서의 베토벤 축제를 지휘한 후 안익태가 스페인으로 도피한 것은 함께 기거했던 에하라 고이치로서도 의아할 만큼 매우 급박한 상황에서 행해진 것이다.
얘기가 좀 길어진 것 같아 오늘은 여기서 멈춰야겠다. 오늘 내가 피력한 요지는 안익태씨가 끝내 숨기고, 안익태를 기념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감추어온 비밀과 거짓말이 늦게나마 하나씩 하나씩 벗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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