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곡자 안익태는 친일파이자 친나치주의자였다. 게다가 그의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라면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애국가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는 임시방편이며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임진택 씨의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연재를 통해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안익태 애국가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제대로 된 애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 본다.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김구도 몰랐고 이승만도 속은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傳聞)증거에 대한 검토
10.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시상(詩想)
11.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2.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1. '올드랭 곡조 애국가'와 '안익태 곡조 애국가'
지난 글에서 나는 도산 안창호의 선택(選擇)과 앙양(昂揚)으로 해서 '동해물과 애국가'가 보통명사 '애국가'에서 고유명사 <애국가>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애국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국가(臨時國歌)로서 위상을 갖게 되었다고 정리한 바 있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이때의 애국가 곡조는 누구에 의해 작곡된 특정한 곡조가 아니라 일찍이 찬미가(讚美歌)로 불리던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에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해서 부른 노래라는 사실이다. 이 '올드랭 곡조 애국가'(동해물과 노랫말 + 올드랭사인 곡조의 애국가)는 1907년경 출현하여 3.1 만세운동 때 백성들의 심금(心琴)을 울리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공식 <애국가>로 채택된 이후 1945년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될 때까지 40년 가까이 각지의 독립군들과 해외 동포들 사이에서 널리 불렀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민간에 깊이 스며들어 태극기와 함께 조선민중(대한사람)들 마음속에 내장(內藏)되어 있었다. 1945년 일제가 항복하고 해방 소식이 알려지자 곧바로 라디오방송을 통해 울려 퍼진 애국가도 이 '올드랭 곡조 애국가'였으며, 온 나라 백성들 모두 뛰쳐나와 '독립 만세'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목 놓아 불렀던 노래도 이 '올드랭 곡조 애국가'였다.
내가 이 상황을 강조하는 이유는 3.1 만세운동에서 조국광복에 이르기까지 독립투쟁 전선에 영감(靈感)과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민족해방의 감격과 환희를 온몸으로 담아냈던 노래는 '안익태 곡조 애국가'(동해물과 노랫말 +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아닌 '올드랭 곡조 애국가'였다는 사실을 환기(喚起)시키기 위함이다.
이 말을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올드랭 곡조 애국가'가 자기 역할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듯, '안익태 곡조 애국가' 역시 자기 역할을 다 했으면 (이제 더 이상 그 역할을 맡을 자격이 상실됐다면) 그만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명제(命題)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빌려왔을지언정 자기 역할을 다 하고 간 '올드랭 곡조 애국가'와 마찬가지로, 비록 한국인이 작곡한 것이라 해도 우리 국가(國家)와 국민이 '안익태 곡조 애국가'에 대해 고유명사 <대한민국 애국가>로서 영구 독점권을 부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서이다.
2. 안익태의 미주(美洲) 유학과 애국가 작곡
조선청년 안익태가 미국으로 음악 유학을 간 것은 1930년 9월경으로 알려져 있다. 1906년 평양에서 출생한 그는 소년 시절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 서양음악을 접하게 되었는데, 특히 첼로라는 희귀한 악기에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 후 1921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1930년 동경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가을 도미(渡美)하여 신시내티 음악원에 들어가 첼로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1932년경부터는 작곡과 지휘에 관심을 갖고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원과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척박한 식민지 땅에 태어나 머나먼 타국에서 연주자로, 작곡자로 활동하며 입지(立地)를 넓혀간 그의 역량과 의욕이 대단했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그의 음악적 자질(資質)과 소양(素養)이 특별히 뛰어났다는 것은 만난 사람들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이러한 그가 '남의 나라 이별 곡조로 애국가를 부르던' 미주(美洲) 동포들에게 '대한청년이 새로 작곡한' 새 악보를 내놓은 것은 1935년 12월경의 일이었다.
애국가를 작곡한 과정과 사연에 대해서는 언론인 김경래 씨가 지은 <안익태, 그 영광과 슬픔>이라는 책(1966년 첫 출간할 때 제목은 '코리아 판타지,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이었는데, 이후 '위대한 한국인 안익태', '애국가와 안익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또록' 등으로 제목을 바꿔 재출간되었다가 2006년에 최종적으로 <AHN EAKTAI, 그 영광과 슬픔>이라는 제목의 개정판이 나옴)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바 이 책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아울러 허영한 교수가 쓴 '미주 한인학생회보를 통해 본 안익태의 미국 유학 시절'이라는 글 등 또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여 당시의 장면을 나름대로 구성해보면 이렇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안익태는 좀 더 넓은 세계에서 자신의 음악가로서의 꿈을 펼치기 위해 미국행을 선택한다. 미국에 도착한 안익태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였다. 거기 생면부지(生面不知)의 황사선 목사가 혈혈단신 바다를 건너온 데 대한 청년음악가 안익태를 반가이 맞았는데, 안익태는 황 목사의 배려로 이십여 명 동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첼로 연주를 선보였다. 그런데 안익태는 그날 그 교회당에서 태극기를 난생 처음 보았고, 무엇보다 감명을 받은 것은 그 태극기 앞에서 동포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광경이었다. 모두 일어서서 절절하게 조국을 향한 염원을 노래하는데 가사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고 곡조는 잉글랜드 민요(또는 스캇취 술노래) '올드 랭 사인'이었다.
안익태는 이때부터 애국가를 자기 손으로 작곡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황 목사로부터 애국가 가사를 소중히 받아 적었는데, 황 목사는 그 가사가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라고 하면서 가사의 연유(緣由)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안창호 선생이 가사를 지으면서 이틀씩 금식기도를 했다는 것, 삼천리 금수강산에 하나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대한 만세'라는 구절을 넣었다는 것, 애국가의 작사 동기가 대한 민족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등). 안익태는 같은 고향, 같은 가문의 어른인 안창호 선생이 지은 가사라는 말을 듣고 반드시 작곡을 해내고 말겠다는 각오를 더욱 다지게 된다.
그 후 안익태는 신시내티 음악원에 들어가 첼로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1932년경부터는 작곡과 지휘로 관심을 돌려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원과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수학(受學)한다. 필라델피아 유학 시절 안익태는 애국가를 창작하기 위해 무려 40여 개국의 국가(國歌)를 수집하고, 세계 각국의 민요·가곡·성가곡을 모아 비교하며 작곡에 착수한다. 그리하여 앞의 두 소절은 진즉에 필하였으나 후렴 부분 두 소절이 막혀있던 차, 어느 날 아침 불현듯 악상이 떠올라 드디어 애국가를 완성하게 된다. 안익태는 새로 창작한 이 애국가 곡조를 1935년 12월 28일 지성(?) 한인 예배당에서 직접 연주하여 발표한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 해 1936년 3월 26일자 미주 신한민보에 안익태는 본인 명의로 '대한국 애국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투고한 바, 그 기고문(寄稿文)에 애국가에 관한 안익태의 생각들이 이렇게 드러나 있다.
"약 5년 전 미주 상항에 도착하여 많은 감상과 인상을 가졌는데 특별히 제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상항 한인 예배당 강당 위에 걸린 대한국의 태극기와 제일성에 처음 부른 대한국 애국가였습니다. (중략) 저대로 부르는 애국가 음악 곡조는 처음 스캇취의 술노래였는데 그 후 구주 여러 나라에서 별별히 불렀는 바, 어떤 나라에서는 사랑가로도 부르고 어떤 나라에서는 이별가로도 부르는데 참으로 신성한 대한국 애국가로서 그 곡조를 사용함은 대한국의 수치인 줄로 자각하였습니다. (중략) 과거 5년간 구심근작하여 약 2년 전에 처음 절은 필하였습니다만은 후렴은 필하지 못하고 지나는 중 지난 11월 하루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실로 하나님의 암시로 후렴 전부를 근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안익태 작곡의 '대한국 애국가' 악보가 인쇄되어 재미 동포사회에 보급되기 시작한다.
3. 애국가 작곡에 관련한 안익태의 발언에서 생겨나는 의문들
앞항에서 요약된 글은 김경래 씨가 주로 안익태의 구술과 인터뷰 등에 바탕하여 저술한 '안익태, 그 영광과 슬픔'에 나오는 내용과 미주 신한민보 등에 게재된 안익태 자신의 칼럼 등에서 내가 특별히 주목한 내용을 골라 재구성한 것인데, 이 중 '빼박(빼도 박도 못할 팩트)' 몇 가지를 추려서 의문을 제기하고자 하는바, 각각의 팩트를 주목하는 이유를 부언(附言)하면 다음과 같다.
팩트① 안익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
- 이는 안익태가 숭실 학생시절부터 3.1운동에 가담하였다는 등 그를 과도하게 애국자로 미화(美化)한 김경래 씨 자신의 글과 자기모순(自己矛盾)되는 것으로, 이 사실은 일본 유학생이던 안익태가 미국에 도착해 동포들의 민족애를 목격하기 전까지는 식민조국의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미국에서는 동포들의 민족적·기독교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생활하다가 유럽으로 간 후에는 조국의 현실과 미주 동포들의 충정을 외면하고 친일·친나치 프로파간다에 부역하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팩트② 황사선 목사는 안익태에게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 선생이라고 하며 가사의 연유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 애국가 윤치호 작사설의 물적 증거 중 하나가 1910년 9월 미주 신한민보에 게재된 '국민가'(노래 가사가 현행 애국가와 거의 같다) 노랫말에 작사자가 윤치호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보다 20년 후인 1930년대에 신한민보와 긴밀한 관계였던 '대한인 국민회'에서 생성된 전문(傳聞)증거는 물적증거보다 증거력이 더 있다고 봐야한다. 특히 황사선 목사의 전언(傳言) 중 안창호 선생이 가사를 지으면서 이틀씩이나 금식기도를 했다는 대목은 '꾸며내기 어려운' 내용으로, 이러한 정황이 다른 증언에 의해 교차검증(cross check)된다면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팩트③ 필라델피아 유학 시절 안익태는 애국가를 창작하기 위해 수십 개국의 국가(國歌)를 수집하고 세계 각국의 민요·가곡·성가곡을 모아 비교하며 작곡에 임했다.
- 이는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에 관련하여 뜻밖의 시사점(示唆點)을 주는 대목이다. 1976년 중앙대 이유선 교수에 의해 애국가 곡조 표절설이 재차 대두되었을 때, 논쟁의 초점이 안익태 씨가 애국가 작곡 이전에 불가리아를 간 사실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잘못 흘러갔고, 이 부분에서 이유선 교수의 오류가 드러나 논쟁에서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팩트③은 어떤 문제에 있어 상황적 개연성(蓋然性)이 갖는 타당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표절의 관건(關鍵)은 음악 자체의 유사성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해준다.
팩트④ 애국가를 작곡하는 과정에서 안익태는 5년간 마음을 집중하여 2년 전 처음 절은 필하였으나 후렴은 필하지 못하고 지나던 중, 1935년 11월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하나님의 암시로 후렴 전부를 최근에야 작곡하였다.
- 이 발언 역시 안익태의 애국가 곡조 표절설에 연관하여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애국가는 4소절 16마디로 구성된 작품으로 A-B-C-B의 전개를 갖는다. 처음 절이라 함은 A와 B를 말하는 것이고, 후렴은 C와 B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익태 씨는 첫째 소절과 둘째 소절(넷째 소절 포함)의 작곡에 3년이 걸렸고, 셋째 소절을 작곡하는 데 2년이 걸렸다고 실토(實吐)한 셈이다. 나는 작곡에 소요(所要)된 기간이 길었음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안익태 씨가 먼저 필하였다는 A와 B가 바로 불가리아 민요와 매우 유사한 대목이고, 나중에 작곡했다는 후렴 C만 유사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4. 안익태의 또 다른 얼굴, '에키타이 안'
황사선 목사를 비롯해서 미주(美洲)의 애국적 동포들은 '대한국 애국가'를 작곡한 청년 안익태의 열정과 실력을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천재 음악가 안익태의 꿈은 미국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었다. 그 당시 세계 음악의 중심지는 유럽이었고, 무엇보다 그는 연주자보다는 지휘자나 작곡가로 성공하고 싶었다. 그는 1936년 6월경 유럽 지역을 일시 탐방하여 그곳에서의 유학 생활과 음악 활동에 대한 탐색을 시도한다. 안익태의 유럽 연주 활동에 관해서는 음악학자 전정임 박사가 <안익태>라는 저서에 상세히 기술해 놓았거니와, 당시의 국내 신문기사들과 미주 한인학생회보 기록을 참조하여 그 행적을 좇아가 보면 이렇다.
안익태는 먼저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가서 1주일 동안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베를린 국립음악학교 교수였던 파울 힌데미트를 면담하여 지도를 받았고, 6월 말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하여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빈 국립오페라극장 감독인 바인가르트너로부터 3개월가량 지휘법을 배운다. 빈에 체류하는 동안 9월에 안익태는 바인가르트너의 추천으로 부다페스트 교향악단 객원 지휘자로 유럽 무대에 데뷔해서 방송도 타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러한 활동이 당시 국내 신문들(<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이따금 기사화된 것을 보면, 안익태는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자신의 활동을 국내에 지속적으로 알리는 일에 무척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10월경 미국으로 돌아온 안익태는 1937년 6월 템플대학을 졸업한 후, 같은 해 11월 미국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유럽으로 향한다. 전정임의 연구에 의하면, 두 번째 유럽행은 더 이상 유학생 신분이 아닌 직업음악가로서 유럽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출발이되 그것이 유럽에서의 영주(永住)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안익태 씨가 파리를 비롯한 유럽에서의 연주를 마치고 명년 8월에는 조선에 돌아올 예정"이라고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빙하는 또 다른 자료가 있다. 1937년 10~11월 미주 한인학생회보에 실린 안익태의 동정(動靜) 소식이다.
"내년 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비엔나, 프라하, 더블린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출연할 것이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한국(조선)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안익태가 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던 유럽에 내처 머물렀는가 하는 의문이 있어야, 대체 어떤 조건과 타협이 있었길래 포화 속에서 연주 활동을 계속했는가 하는 답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벌어진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프로파간다 행위들이 '생계형' '소극적' 친일이었는지 아니면 '출세형' '적극적' 나치 부역이었는지를 판가름할 주요 단서(端緖)가 되기 때문이다.
1938년 2월 20일 안익태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이 더블린 게이어티 극장에서의 연주는 안익태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바, 그의 첫 관현악곡이자 대표작품인 '한국환상곡(Korea Fantasy)'이 이 곳에서 초연(初演)됨으로써 그의 음악 인생의 전기(轉機)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한국환상곡' 외에도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등을 지휘했다고 하는데, 청중들은 동양에서 온 젊은 지휘자의 정열적인 지휘에 환호를 보냈으며, 특히 '한국환상곡'은 그 곡이 지닌 동양적 분위기로 해서 아일랜드인들의 찬탄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가 통칭 '한국환상곡'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 작품의 당시 정식 명칭은 교향환상곡 1번 코리아(Symphony Fantasie No.1 Korea)였고 네 악장으로 나뉘었다고 하는데, 마지막 4악장의 주제가 바로 안익태가 작곡한 '대한국 애국가'였다. 이에 관해 그 당시 연주회 팸플릿에 실린 곡 해설을 후에 소개할 송병욱 씨의 번역을 빌어 한번 옮겨보자.
"4악장의 주제는 Mr.안 자신의 창작곡인 새 한국 국가(國歌)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국가(國歌)의 곡조로 올드 랭 사인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이 악장은 국가(國家)의 피압박, 1920년의 혁명을 묘사하고 있으며, 자유를 위한 행진곡으로 마무리된다."
1920년의 혁명이란 아마도 1919년 3.1혁명의 오류일 듯싶다. 하지만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믿고 싶은 것은) 자신의 첫 관현악 작품 안에 애국가 주제를 삽입하여 '한국환상곡'을 작곡하고 머나먼 북유럽의 섬나라 아일랜드에서의 초연을 열정적으로 지휘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안익태라는 음악가는 대한(조선)의 애국청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해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서 다시 한번 '한국환상곡'을 연주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안익태는 국권을 상실한 조선(대한)의 애국적 음악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1938년의 더블린과 부다페스트 연주 이후 1947년 스페인 마요르카에 정착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기까지의 긴 기간 동안, 안익태의 행적은 베일 속에 감추어진다. 국내 신문들의 간헐적인 기사에 의하면 안익태는 이 기간에 유럽 각 도시의 유수한 오케스트라들을 격찬 속에 지휘한 것으로 나온다. 한 예로 1940년 4월 30일에 있었던 로마 방송교향악단 지휘는 국내 도하(都下) 일간지들(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빅뉴스로 보도되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는데도 불투명하다?" "맹활약을 하고 있음이 널리 알려졌는데도 감추어졌다?" 왜일까? 그것은 당시 안익태의 연주 활동에 관한 정보가 단지 국내에 보도된 신문기사로만 남았을 뿐 정작 그 연주회들의 팸플릿과 레퍼토리는 공개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지휘할 때 사용했을 두꺼운 악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왜일까? 자신의 연주 활동을 국내 언론과 교포사회에 알리는 자기홍보에 그처럼 치밀하고 부지런했던 안익태에게 대체 어떤 비밀이 생긴 것일까?
최근에 와서야 밝혀진 것이지만, 1940년 로마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사람은 안익태가 아니라 에키타이 안이었다. 대한사람 '익태 안'이 아니라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이었다. 이후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한 사람도,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사람도, 베오그라드, 부다페스트, 소피아, 부쿠레시티, 하노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파리에서 지휘봉을 들고 연주한 사람은 조선(대한) 청년 안익태가 아니라 일본인 에키타이 안이었다.
안익태의 두 얼굴! 다른 한쪽 얼굴은 에키타이 안이었다.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의 이름으로 친일·친나치 행각을 벌인 이 기간을 음악학자 이경분 교수는 '잃어버린 시간'이라 아쉬움을 토로했고, 국제정치학자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 케이스'로 질타(叱咤)하였다. 애국가의 작곡자가 비애국자라고 하는 이 모순! 이제 어찌할 것인가?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을 비판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우리 국민이(우리 어린이들이)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계속 불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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