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올 해는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이고, 6·25전쟁 70주년이자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보훈의 역사는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라는 가치와 이를 통해 시민적, 평화적 발전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가치와 의미를 짚어보고자 <프레시안>은 보훈교육연구원과 함께 기획연재를 진행합니다. 이를 통해 보훈의 역사, 사회적 의의, 평화지향성 등을 사회적으로 함께 생각해 보고 방향을 정립해 보는 기회의 장을 갖고자 합니다. 편집자.
2018년 한 방송국에서 제작한 드라마('미스터 션샤인')가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 드라마는 구한말 실제로 한 외신기자가 의병들을 인터뷰했던 장면을 극중에 삽입하면서 시청자들을 더욱 몰입하게 만들었다. 이전에 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이 사진이 드라마 장면과 겹쳐지면서 그 일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인 양 느껴지는 이상한 경험도 하였다.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가 있기 몇 해 전을 배경으로 당시 혼돈의 시대를 그린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이름도 채 알려지지 않은 의병들이었다. 나라를 구하려고 몸 바친 의병들을 망각의 세월에서 끄집어내 보여주면서 역사의식을 고취했다는 점에서 지금도 그 가치를 인정하고 싶다.
의병(義兵)이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들과 대항하여 싸웠던 사람들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런 의병들이 계속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의병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계기는 을사늑약(1905)이다. 흔히 을사조약으로 불리는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은 국권을 강탈당해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다. 이런 을사늑약 소식이 전해지자 경향(京鄕)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은 이와 같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주권수호를 호소할 목적으로 1907년 6월 헤이그(Hague)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파견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순종을 즉위하게 하였다. 이어 7월에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 한국의 내정권마저 장악하였다. 이어서 한국 식민지화의 최대 장애였던 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8월 1일부터 약 한 달에 걸쳐 단행하였다. 이때 상당수의 한국 군인은 군대 해산에 반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뒤 의병에 합류하였고, 이로써 전국적으로 확대된 의병항전은 대일 전면전의 성격으로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해산군인들이 의병으로 합류함으로써 의병운동 발전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었지만 예전 역사처럼 의병의 중심은 역시 보통 서민들이었다. 드라마 상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이들은 인력거를 끌다가, 도기를 굽다가 무장한 일본군을 향해 총을 들고 나섰다. 의병이라고 하면 용감하고 대단한 사람들일 줄 알았는데 그들 역시 소심하고 두려웠으며, 자기의 일상을 간절히 지키고 싶었던 그냥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절절히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항전은 1909년 9월,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밀려 그 기세가 누그러진다. 그러다가 한일합병(1910) 이후부터는 의병들이 지하로 스며들거나 만주·러시아 또는 구미(歐美)지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 독립군으로 전환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이 시기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의병의 후예들은 그 정신을 이어가며 끈질긴 저항을 지속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들을 보여준다. 특히 3·1운동(1919) 이후에 만주지역에서의 활약이 눈에 띈다. 이 와중에서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무찌르고 승리한다. 이것이 의병의 후예인 독립군이 거둔 사상 첫 승리인 '봉오동 전투'이다.
이 봉오동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보복을 한다고 1920년 10월 엄청난 수의 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출병했고, 이를 알아챈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들은 백두산 근처의 화룡현 청산리로 이동하였다. 전투를 위해 모인 독립군의 총병력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병력과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등 2천 8백 명 정도였다. 독립군 부대로서는 최대 규모였지만 일본군에 비하면 1/20 수준이었고, 철저하게 훈련받은 일본군에 비해 독립군은 보통의 서민으로 구성된 민간인 부대였다. 그럼에도 10월 20~23일까지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 전투'이다. 이처럼 의병부터 시작하여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독립정신이 광복을 달성하는 밑바탕이 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 특히 국외 안장 독립유공자 유해 봉환을 추진한다. 이 중에는 평민 출신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도 포함된다.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스탈린 정부 시절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돼 현재의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숨졌다. 이런 독립유공자 유해 봉환은 일제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헌신한 이들의 희생과 노고를 제대로 기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올해 2월 착공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2021년 완공할 계획이다.
위에서 거론한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는 이런 문구가 떴었다. '굿바이 미스터 션샤인, 독립된 조국에서 씨유 어게인.' 불꽃처럼 살다 간 우리 의병 조상들이 이런 계기를 통해 2020년 독립된 조국에 다시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돌아온 의병들이 주위를 돌아봤을 때 그들이 꿈꾸던 조국의 모습과 일치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
필자 서운석 박사(행정학)은 보훈교육연구원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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