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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차별의 근원인 '신분주의'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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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차별의 근원인 '신분주의'와의 전쟁

<신간> '신분주의'로 진단한 위기의 미국 정치.경제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마저 평등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의문이다. <신분의 종말>(로버트 풀러 지음.열대림 간)은 바로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모든 차별의 근원, ‘신분주의’**

미국 오버린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의 총장을 지낸 저자는 미국에서 인종차별과 남녀차별의 극적으로 개선돼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이 모든 차별의 근본이 되는 차별이 존재한다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신분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신분주의는 인종이나 성별처럼 평생을 따라다니는 차이뿐아니라 지위처럼 언젠가 바뀔 수 있는 차이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이나 남녀차별에 민감한 사람도 ‘가변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신분주의의 문제점에는 둔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적 존엄성을 침해하고 상처를 주는 점에서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도 신분주의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지위처럼 ‘가변적인 차이’는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 발전에 중대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국제 테러도 국가 단위로 신분주의에 의한 타국 국민에 대한 존엄성을 훼손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교육자로서 그는 오늘날 공부를 하지 않으려는 학생들이 많아지는 원인으로도 신분주의를 들고 있다. 학업성적에 따라 아이들을 일치감치 승리자와 패배자로 구분하는 바람에 공부에 대한 의욕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는 IQ검사라는 것도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인 ‘지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1천5백 미터 달리기에서 우승했다고 가장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 사회에 '능력주의'라는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 분야에서 능력을 보인 경우 이것이 일종의 신분으로 작동하면서 다른 분야에서도 우위를 제공해주는 한,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들의 교육열도 일류학교의 명성이 자기 자녀에게 우위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또하나의 신분주의라는 지적이다.

***신분주의에 물든 미국의 정치.경제**

저자는 1960년대 미국사회가 인종주의를 해체하지 않고는 나라가 붕괴될 도덕적 위기에 봉착한 것처럼 21세기의 미국 사회도 그 당시를 연상케 하는 도덕적 위기가 도래했다고 진단한다. 미국의 정치와 경제가 나라 안팎에서 심각한 신분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이제 비즈니스와 교육,외교 관계 등의 영역에서 신분주의를 가장 성공적으로 탈피하는 나라가 이번 세기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신분주의에 의해 노바디(Nobody)와 섬바디(Somebody)로 나뉘어 있다고 말한다. 노바디는 권력이 없는 자, 섬바디는 권력의 가진 자다. 권력은 신분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다.

***“만국의 노바디여 단결하라!”**

신분에 내재하는 권력의 남용이 신분주의다. 저자는 “신분주의는 노바디의 존엄성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며 섬바디의 영예를 더럽히는 오점”이라며 “만국의 노바디여, 단결하라! 우리가 잃을 것은 수치심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노바디 선언’을 역설한다.

신분주의는 우리 일상에 깊이 배어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조차 상대방의 신분을 판단하기 위한 탐색전에 돌입한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 겉으로는 부드러운 질문이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감춰져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상대방은 우리를 존경할 것인지 무시할 것인지를 판단한다.

신분은 자부심의 원천이자 수치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같은 신분이 이중으로 계산된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더 높은 지위가 부여되면 그 즉시 그는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새로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존엄성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누구나 ‘2차’를 원한다”고 말한다. 누군가 이런저런 일로 상처를 입은 적이 있으며,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심지어 아무런 잘못도 없는 구경꾼에게라도 되갚아줄 기회를 엿보게 된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도 이러한 ‘2차’의 연장선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전형적인 권력의 남용은 스스로의 입지를 유지 혹은 강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불리한 조건을 강요하는 데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는 사례이다. 사람들이 한 영역에서 확보한 신분을 다른 영역에서의 영향력을 담보하기 위해 사용하는 습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사회적 인정을 위한 경쟁은 공정해질 수 없다.

신분주의적 학대는 비영리 조직조차도 처음에는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결국은 그 구성원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타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내 말이 곧 법"인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요즘의 직장인을 노예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임금 노동자는 곧 임금 노예와 다를 바 없으며 보수를 받는 요즘 종업원들이 과거의 노예에 비해 크게 독립적이지도 않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부정적인 동기 부여-과거에는 채찍, 요즘은 좌천이나 실직-가 책임성 있는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 되는 긍정적인 동기부여에 비해 그 비중이 크게 낮아졌다는 지적도 있다.

그는 “그러나 노예 제도가 가진 아킬레스 건이 내재적인 비효율성이었듯 “내 말이 곧 법”이라는 식의 기업 경영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게다가 종업원들도 무조건 복종이 자신의 일자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아첨꾼은 이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없는 회사에서, 변화를 도모할 기회를 주지 않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육신이 음식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듯,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남들에게 기여한 것을 인정받음으로써 그 생명을 유지한다”면서 “물질적인 욕구가 채워지고 나면 사람들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바로 ‘인정’”이라고 말한다.

인정에 대한 굶주림이 점점 쌓여가면 영양실조에 걸린 우리의 영혼은 절망적인 상태로 접어든다. 인정에 굶주려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공격하는 부랑자는 더 이상 자신의 굴욕감을 참을 수가 없다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다.

인맥은 섬바디와 노바디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섬바디들은 아주 풍부한 인맥을 확보하고 있는 반면, 노바디는 그렇지가 못하다. 섬바디의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그의 비서에게서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질문을 받을 때, 비서는 당신의 소속과 신분을 한꺼번에 판단할 근거를 묻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민권운동은 신분주의 대항운동 돼야"**

저자는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는 게임에 공정성을 결여되면 존엄성을 침해당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강조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노바디로 취급하는 세상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노바디의 땅이 가혹한 감옥과도 같은 작용을 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저 혼자서 비참해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다행히 인종주의가 성차별주의와 신분주의는 단단한 보호막을 가지고 있어 뿌리를 뽑기가 아주 어렵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는 이미 수세에 몰리고 있으며, 신분주의 역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신분주의가 설 땅을 잃은 상황에서는 ‘섬바디’와 ‘노바디’라는 개념은 지금과 같은 의미를 상실하고 각각 ‘공적인 사람’과 ‘사적인 사람’을 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섬바디를 일시적으로 지도자나 본보기, 혹은 공인 등과 같은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민권운동이 신분주의에 대항하는 존엄성 회복 운동으로 발전할 때 민권운동과 인권운동은 서로를 보완하여 21세기의 피할 수 없는 도전, 즉 ‘세계적인 경제 정의’라는 목표를 향한,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인 접근 방법을 제공한다”고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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