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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역사, 만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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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역사, 만주국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만주국 수도 건설과 창조된 이념

카키색의 거리 신징(新京)
1924년, 14세에 만주에 갔고 15년간 만철(滿鐵,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총국(總局)에서 근무했으며 1938년에 다롄(大連)에서 만철 신징(新京) 지사로 전임하였던 시마다 코지(島田辛二)는 새로운 도시 신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스케치를 남겨 놓고 있다.

왕도주의자의 거리라고 한다.
카키색의 거리라고 한다.
너무나 눈부셔 눈을 뜰 수조차 없는, 현란하게 빛나는 인상,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이야기 소리가 끊임없이 요동치는 와중을, 멍하니 그러나 나는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이 도시에 온지 벌써 80일이 지났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중국의 만주 지역에 괴뢰국가 만주국을 설립하였고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왕도주의"는 만주국의 중요한 통치이념이었다. "왕도주자의 거리"란 바로 만주국의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또한 신징은 "카키색의 거리"이기도 했다. "카키색"은 당시 만주국의 제복이었던 '협화복'의 색상이다. '협화복'은 일본과 만주가 한 마음 한 뜻임을 강조하는 "일만일덕일심(日滿一德一心)"을 상징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국민복이다. 고관이든 평사원이든 똑같이 '협화복'을 착용했고 노란색의 견장을 통해 직위의 고저를 나타냈다.

다리에는 모든 사람이 각반을 쳤는데 각반은 전시 태세에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었다. '협화복'을 입은 사람들이 흘러넘치는 거리를 저자는 "카키색의 거리"라고 하고 있다.
"왕도주의자의 거리", "카키색의 거리"에서 시마다 코지는 "눈부셔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눈부심은 사람들의 "현란하게 빛나는 인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약동하는 신생 국가의 넘쳐나는 생기 앞에서 저자는 아뜩함과 함께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수도의 부지 선정과 도시 건설
신징의 원래 이름은 창춘(長春)이다. 1932년에 신징으로 개칭되었고 같은해 3월 10일, 만주국의 수도로 확정되었다. 당시 만주국에는 신징 외에도 여러 대도시들이 존재했다. 펑톈(奉天, 현재의 선양)은 당시 만주국 제일의 번화한 도시였고, 하얼빈(哈爾濱)은 동청철도부속지로부터 일약 국제도시로 성장한 신흥도시였으며, 지린(吉林)은 지린성의 수부로서 오랫동안 정치,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선정된 것은 신징이었다.
신징은 남만주 철도의 종착지이자 북만주 동청철도의 기점으로서 남으로는 다롄(大連), 북으로는 하얼빈을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으로 출발하는 철도의 기점이기도 했다. 지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지만 토지 가격은 또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었다. 이는 당시 제국의 수도 건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토지매입 대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도 건설 계획은 네 번의 수정 및 조율 과정을 거쳤고 만주국도건설국(滿洲國都建設局)의 주도하에 1932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신징은 도로와 광장, 상하수도, 통신과 전기, 공원 등 기초시설부터 건설에 착수하였다. 대동광장(大同廣場)을 중심으로 하여 방사선형으로 뻗어나간 도로들이 신징 도시의 한 장관을 이루었고 새롭게 건설된 관공 청사들은 전체 도시 면적의 50% 이상을 차지하였다.

만들어지는 이데올로기
만주국에서 관동주 다롄은 일본인의 이주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도시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면서 만철이 다롄에 진출하였고 이와 함께 일본인 인구가 자연스럽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만주국이 건국되던 해인 1932년 9월에 이르면 다롄의 일본인 인구는 10만 8000명에 달하지만 같은 시기 신징의 일본인은 1만 4000명에 그치고 만다.
오래된 다롄에 비해 신징은 신생의 도시였고 새롭게 부상하는 중심지였다. 신징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대동대가(大同大街)에는 만주중앙은행(滿洲中央銀行)을 위시하여 만주전신전화주식회사(滿洲電信電話株式會社), 만주영화협회(滿洲映畫協會), 만주건설국(滿洲建設局), 만주국수도경찰청(滿洲首都警察廳) 등이 밀집해 있었고 이어 만주국 최고의 학부인 만주건국대학(滿洲建國大學)도 신징에서 설립된다.
새로운 수도로서의 신징이 정치·경제 중심지로 거듭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신징은 이에 그치지 않고 문화중심지로도 부상하고 있었다. 다롄의 많은 문화단체들이 강제·반강제적으로 신징으로 옮겨졌고 그렇게 옮겨진 각 단체들은 <문예지도요강>의 반포와 함께 집중적인 관리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문학단체인 만주문화회이다. 1937년 다롄에서 결성된 만주문화회는 신징에 그 지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본부가 신징으로 이전됨과 동시에 지부는 자연스럽게 사라지진다. 기타의 많은 단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징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면서 만주는 다양성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심과 여러 개의 주변으로 구획되기 시작하였다. "카키색"으로 넘쳐나는 "왕도주의자의 거리" 신징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곳은 만주국의 국시, 만주국의 이념, 만주국의 이상과 희망을 집대성한 공포의 공간이었다. 더 이상 다롄 시절의 자유와 여가를 허락하지 않았고 문학 역시 이념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해야 했다.

거리에 흘러넘치는 "카키색"과 활보하는 "왕도주의자"들을 바라보면서 현기증을 느꼈던 것은 급속도로 행해지는 집권 속에서 맹목적으로 단일화 되어가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감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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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제특성화' 대학을 지향하면서 2013년 3월 설립된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처하고, 바람직한 한중관계와 양국의 공동발전을 위한 실질적 방안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하에 한중법률, 한중역사문화, 한중정치외교, 한중통상산업 분야의 전문연구소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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