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전세계 곳곳에 확산되자 세계보건기구(WHO)가 결국 국제비상사태를 결정했다. WHO는 30일(현지시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해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를 선포했다. WHO에서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은 이번이 6번째다. 앞서 WHO는 지난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A(H1N1), 2014년 소아마비와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2016년 지카 바이러스, 2019년 콩고민주공화국의 에볼라까지 모두 5번 선포했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은 이날 자문 기구인 긴급 위원회의 회의 이후 스위스 제네바의 WHO 본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병원체의 출현을 목격했고, 그것은 전례가 없는 발병으로 확대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이 바이러스가 보건 시스템이 취약한 국가로 퍼진다면 어떤 피해를 볼지 모른다"며 "그런 가능성에 대비할 수 있도록 지금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WHO의 국제비상사태 선포는 이미 '실기'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이 집중 발생하고 있는 우한 시가 중국의 내륙 한가운데에 위치한 교통요지이자 인구 1100만 명의 대도시이다. 공교롭게 중국의 춘제라는 인구 대이동 직전에 발생해 중국 전역, 나아가 전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라는 많은 전문가들의 경고가 쏟아졌다. 그러나 "아직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사람 대 사람의 감염이 발생한 근거가 없다"면서 지난 22, 23일 이틀 연속 긴급위원회를 열고도 국제비상사태 선포를 주저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23일부터 우한 시에 봉쇄령이 발령되기 전에 우한 시 인구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500만 여명이 중국 전역과 해외로 빠져나간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WHO가 긴급위원회에서 국제비상사태 선포를 머뭇거린지 불과 나흘 뒤 일본에서 2차 감염 사례가 나온 것을 시작으로 베트남, 독일, 대만, 한국, 미국 등에서 사람 간 전염 사례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미국도 30일 한국처럼 6번째 감염자가 2차 감염으로 확인됐다. WHO는 국제비상사태를 결정하지 않은 가장 주된 명분이 무너진 이후에야 뒷북치기 식으로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결정했다. 또한 이번에는 "교역과 이동의 제한을 권고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역시 안이한 판단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WHO가 국제비상사태 선포를 늦추는 사이 전세계 20개가 넘는 국가에서 확진자들이 계속해서 추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중국 국경 일부 폐쇄. 비자발급 중단
WHO가 "교역과 이동의 제한을 권고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러시아가 중국과의 국경 일부를 폐쇄하고, 중국인 관광객에 대한 비자 발급도 중단하는 등 WHO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이 나오고 있다.
이날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는 "질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러시아 극동지역 중국과의 국경을 봉쇄하는 방안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미슈스틴 총리는 "우리는 우리 국민 보호를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국영TV 연설을 통해 강조했다. 이어 타티야나 골리코바 부총리는 중국과 러시아 사이 자동차 및 도보 교통은 완전히 중단될 것이라 밝혔다.
러시아 정부에 따르면, 총 25개 국경중 16개 국경이 30일 자정을 기해 봉쇄됐다. 단 국가 간 열차 운행에 있어서는 모스크바~베이징을 잇는 노선만 유지하되 나머지 국가 간 열차 운행은 중단키로 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중국인 관광객에 대한 전자비자발급도 중단했다.
현재 감염병 전문가들은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 계열인 사스와 메르스와 달리 '우한 바이러스'가 증상이 나타나기 전 잠복기에서 감염력이 상당한 것으로 확인되는 상황을 가장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미 중국에서는 무증상자에 의한 집단감염 사례까지 나왔다. 춘제를 맞아 고향에 모인 20대 초반 동창생들이 우한 바이러스에 집단 감염된 것이다. 중국 보건 당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발원지인 우한에서 온 한 사람이 나머지 친구 5명을 감염시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례는 고열과 기침 등 외부로 나타나는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우한 폐렴'을 빠른 속도로 전파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6명의 감염자는 모두 지난 21일 열린 모임에 참석한 22세 남성들이다. 지난 19일 우한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마(馬)씨는 모임 참석 때까지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열이 나기 시작해 병원 진료를 거쳐 28일 확진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 친구 5명도 모임이 있었던 날부터 하루에서 사흘 사이에 고열 등 증세가 나타났고 잇따라 확진 판정을 받았다.
중국 언론들은 이 사례를 보도하면서, 증세가 뚜렷하지 않은 감염자와 몇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 머무르기만 해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파 위험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중국, 31일 기준 213명으로 사망자 늘어
'우한 바이러스 무증상자'가 '슈퍼 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이미 '우한 폐렴 사태' 초기에 발생했다. 지난 7일 우한의 한 병원에서 증세가 뚜렷하지 않은 한 신경외과 환자가 14명의 병원 의료진을 감염시키며 '슈퍼 전파자'가 됐지만, 중국 당국이 이를 숨기다가 뒤늦게 인정했다.
독일에서 최초의 확진자가 나온 이후 추가된 3명의 확진자도 바로 '무증상자에 의한 감염' 사례다. 중국 상하이에서 출장 온 '무증상 감염' 중국 여성에 의해 직장 동료 3명이 감염된 것이다. 여성은 독일 출장 당시 증상이 없었지만 중국에 돌아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무증상 확진자가 발생했다. 우한에서 전세기를 타고 30일 일본에 도착한 1차 귀국자 중 3명이 신종 코로나에 감염됐고, 이 중 2명은 발열·기침 등이 없는 무증상인 상태에서 확진됐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후생노동성 관계자는 "다른 사람에게로 전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권위 있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한국은 아직 '무증상자 감염력'에 대해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중국 보건 관계자와 WHO 크리스티안 린트마이어 대변인도 무증상 감염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CDC의 입장은 아직 과학적으로 결론을 내릴 자료, 특히 중국 측의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4차 감염 사례까지 나왔다는 중국에서는 매일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에 따르면 31일 0시 기준 우한 폐렴 환자 사망자수는 213명으로 전날 170명보다 43명 증가했다. 확진자 수도 9692명으로 전날 7711명에서 무려 1981명이나 늘었다. 이번 주말 내에 확진자수가 1만 명을 돌파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WHO 긴급 위원회는 국제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WHO와 각 국에 임시 권고안을 발표했다. 보건 시스템 취약 국가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위한 조처 등을 WHO에 주문하면서, 중국 당국에는 합리적인 공중보건 정책의 강화, 의료 인력 보강, 전염 사례 등 관련 정보 전체 공유, 중국 전역에서의 검역 강화 등을 권고했다. 모든 국제 공항과 항구에서 출국자를 검역하는 방안도 권고 사항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WHO의 '뒷북' 국제비상사태 선포와 임시 권고안으로 우한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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