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양심적 지원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약칭 ‘나고야 소송 지원회’. 공동대표 다카하시 마코토. 高橋信)이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근로정신대 동원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매주 금요일 개최하고 있는 ‘금요행동’이 17일로 500회째를 맞는다.
2007년 7월 20일 첫 원정시위를 시작한 것으로부터 13년, 2010.8~2012.7월까지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협상 기간 잠시 중단했던 2년을 제외하고도 만 10년이 넘는 세월이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가 직접 도쿄 원정시위까지 나서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동원돼 강제노역 피해를 입은 근로정신대 동원 피해자와 유족 8명이 1999년 3월 1일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1심에 이어 2007년 5월 31일 항소심까지 연거푸 패소하게 되면서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비록 나고야 고등재판소에서 패소하긴 했지만, 법원이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에 의한 강제연행과 강제노동 가해 책임을 인정한 것에 희망을 걸었다. 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이유로 기각했지만, 불법행위가 법원에서도 인정된 만큼 자발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촉구해오고 있다.
“‘금요행동’은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수요시위’에서 그 명칭이 착안됐다. 또한 미쓰비시의 주요 기업 사장단 회의가 매주 금요일에 있기 때문에 시위 효과를 높이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러나 금요행동은 고단한 여정이었다. 나고야에서 도쿄까지의 거리는 약 360km. 광주-서울 간 거리(297km)보다 더 먼 거리다. 신칸센 1인당 왕복요금만 25만원(약 2만1천엔)에 이른 비용을 감수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1년이 넘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8년 11월 11일 도쿄 최고재판소는 결국 원고들의 청구를 외면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의지했던 최고재판소 판결마저 끝나 더 이상 사법적 구제의 길이 막힌 상황.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뛰어든 불같은 이들의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없었다.
나고야소송지원회는 “처음부터 부당한 판결이다. 최고재판소 판결이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에 결코 면책이 될 수 없다. 미쓰비시는 지금이라도 자발적으로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금요행동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들의 또 다른 고충은 시위를 지켜보는 자국 국민들의 차가운 시선이다.
금요행동의 거리시위를 지켜보는 일본인들 대부분은 “일본도 똑같이 피해자들이 있다. 너희가 한국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 한국이 좋으면 한국에나 가서 살아라”고 조롱 섞인 말을 쏟아낼 때가 많다.
이들에게 다시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은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투쟁을 일본 양심인들이 뒷받침해 왔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광주의 몇몇 시민들을 중심으로 2009년 3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결성된 사건이었다.
때마침 2009년 미쓰비시자동차가 광주에 판매전시장 문을 열면서 반 미쓰비시 투쟁에 도화선을 제공하는 결과로 투쟁이 확산됐다.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철수 1인 시위 투쟁에 이어, 2009년 12월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에게 지급된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 사건’(한화 약 1,200원 지급)에 대한 국민적 분노로 불길이 옮겨붙으면서 미쓰비시와의 투쟁은 전례없이 강경하게,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됐다.
결국 미쓰비시는 그동안 피해자 측이 요구해 온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협의체’ 구성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도쿄 원정 금요시위 만 3년째였다. 일제강점기 무려 10만 명을 한국에서 강제동원 했던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피해자 측과 ‘협의체’ 구성에 나선 것은 최초의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쓰비시와의 협상은 2년 동안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결국 협상은 16차 협상에도 불구하고 2012년 7월 최종 결렬됐다.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미쓰비시 측의 노골적인 무성의 때문이었다.
마지막 의지해 온 협상마저 결렬되면서 선택의 여지는 더더욱 협소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는 투쟁을 선택했다. 제2차 ‘금요행동’ 결행에 나선 것이다. 미쓰비시 측의 협의체 수용으로 2010년 7월 잠정 중단했던 도쿄 금요행동을 다시 재개했다.
소송지원회 다카하시 공동 대표는 “협상이 결렬되자 특히 금요행동에 적극 참여해 온 회원들의 실망이 생각보다 매우 컸다. 다시 운동을 지속할 동력이 없다는 사람도 많았고, 여기서 포기할 수 없고 다시 계속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어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느라 굉장히 힘들었다. 결국 ‘원고 할머니들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시작하자’라고 결정했다” 고 숨은 고충을 밝혔다.
2012년 8월 10일 재개한 도쿄 원정 금요시위는 오는 1월 17일로 500회를 맞는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일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큰 변화가 있었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이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소송과 관련, 기존 판결을 뒤집고 일본 기업에 배상책임이 있다며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항소심 법원으로 되돌려 보낸 것이다.
이에 힘입어, 2012년 10월 24일 양금덕 할머니 등 피해자와 유족 5명은 미쓰비시를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가 큰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일본 소송에서는 비록 패소했지만, 10년 동안 재판을 위해 조사한 방대한 피해 입증 자료들이 재판에 유력한 증거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2013년 11월 1일 광주지방법원은 근로정신대 사건과 관련 미쓰비시에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 명령을 내렸고, 마침내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도 최종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1999년 3월 1일 나고야에서 시작 된 명예회복 투쟁이 장장 19년 8개월 만에 승리한 것이다. 한편, 1차 소송 결과에 힘입어 제기한 2차(원고 4명), 3차 소송(원고 2명) 역시 2018년 12월 광주고등법원 항소심에서 승소해, 이들 2개 사건도 현재 대법원의 최종 판단만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전망은 아직 요원하다. 일본정부와 전범기업 미쓰비시는 사과는커녕, 오히려 판결을 악의적으로 트집 잡으며 한국 사법부 판결 명령을 받아들일 뜻이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정권 이후 불어 닥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바람, 그리고 어느 때 보다 국가 간 갈등이 첨예화 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나고야 소송 지원회’와 같은 양심적인 지원단체의 목소리는 점점 왜소해 질 처지에 놓여있다.
한때 1,100여명이던 지원회 회원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 노령화와 사망 등으로 실제 활동 회원은 8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의 의지는 결연하다.
다카하시 공동대표는 “한국 사람들은 늘 우리한테 ‘일본인인데 왜 한국인의 일로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대답은 간단하다. ‘가해국의 시민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답변한다.
그들은 오늘도 도쿄에서 ‘국가’와 ‘전범기업’이라는 거대한 벽을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17일 도쿄 ‘금요행동 500회’를 맞아, 1월 16일 근로정신대 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해 20여명의 회원들이 도쿄를 방문, 연대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17일오전에는 일본 외무성 및 미쓰비시중공업에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에 나서라는 요청서도 전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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