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당시는 한중 간의 풀어야 할 국제정세가 만만치 않았다. 언론에서는 사드 배치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중국에서 음수사원을 언급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한국 독립운동이 중국에서 전개되었을 당시 음수사원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위기에 처하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24세의 한국 청년 윤봉길 의사가 제국 일본의 침략주의자들인 시라가와 요시미치 등을 처단한 이른바 '훙커우 의거'를 단행했다. 일본 영사경찰과 프랑스 경찰은 '범인'의 배후를 색출하기 위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는데 혈안이었다.
이 때 안타깝게도 도산 안창호가 체포되고 만다. 다행히 백범 김구는 엄항섭, 안공근, 김철과 함께 피치 목사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 피신하였다. 피치 목사의 부인 제럴린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알아보겠다.
우리가 알고 있던 안공근이 애시모어에게 와서 말했다. "우리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우리는 지금 집에 머물 엄두를 못 냅니다. 김구 주석을 포함해 임시정부 사람 네 명이 있습니다." 내 남편이 말했다. "우리 집으로 오십시오. 네 분을 위한 방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 집 2층으로 들어왔고, 우리의 중국인 요리사가 그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으며, 그들은 28일간 머물렀다.
의거 다음날인 4월 30일 김구는 피치 목사 부부에게 사건 전모를 이야기했다. 애시모어는 김구 일행이 자신의 집에 피신하고 있는 동안 안창호의 체포 소식을 듣고 프랑스 언론인, 지식인들과 접촉하면서 프랑스 당국의 일제에 대한 협조와 체포 과정의 불법성을 규탄했다. 그는 프랑스가 일제에 대해 협조하는 것을 공화정 이전의 왕조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짓이라고 비난했고 안창호 체포에 대한 항의 서한을 프랑스 조계의 경찰서장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도 안창호의 체포와 관련해서 백방으로 그의 석방을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쑨원의 부인 쑹칭링은 제19로군 사령관 장즈중과 차이팅가이에게 미화 2000달러를 마련하게 하고 프랑스 경찰당국과 교섭을 추진했다. 이때 한국인으로 상하이 진단대학교 교수였던 신국권이 중간에서 메신저로 활동하기도 했다. 비록 도산 구명 작전이 실패했지만 중국인들의 진정성 있는 전략은 그 후에도 지속되었다.
프랑스 조계에서도 대대적인 검거 열풍이 불자, 상하이 한인사회가 동요하였고 백범은 피치 목사 집에서 훙커우 의거의 진상을 발표했다. 그는 더 이상 상하이에서 활동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중국 측 고위 인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 중간에 남파 박찬익이 있었다.
상해에서 중대 사건이 발생한 것을 알고 남경에 있던 남파 박찬익 형이 상해로 옮겨 와서 중국 인사들과 접촉한 결과, 우리는 물질상으로만이 아니라 여타 방면에서도 중국 측으로부터 많은 편의를 제공받았다. 나는 낮에는 전화로 잡혀간 동포의 가족들을 위로하고 밤에는 안공근, 엄항섭, 박찬익 등의 동지가 출동하여 체포된 가족들의 구제와 그와 관련한 교섭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의 유명인사인 은주부(殷鑄夫), 주경란(朱慶蘭), 사량교(査良釗) 등의 면회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야간에 자동차를 타고 홍구 방면과 정안사로 방면으로 돌아다녔다. 평일에는 한 걸음도 조계 밖으로 나다니지 않던 나의 행동거지로 볼 때, 그것은 일대 변동이 아닐 수 없었다.
현상금 60만 원을 내세워 김구 체포에 혈안이 되었던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벗어난 김구는 당시 장쑤성(江蘇省) 주석이었던 천궈푸(陳果夫)와 자싱(嘉興)의 유력자인 추푸청(禇輔成)의 도움으로 저장성(浙江省) 자싱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추푸청은 신해혁명 후 저장성 군정부의 민정장을 역임하였으며, 1932년 당시에는 상하이 법학원장과 항일구원회 회장이었다. 김구가 피신한 수륜사창은 추씨 집안에서 대대로 운영해 오던 면사 공장인데 세계 대공황으로 폐쇄된 상태였다.
자싱으로 피신한 김구는 추푸청의 양아들인 천퉁성(陳桐生)의 별채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곳은 수륜사창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2층의 목조주택이었다. 김구가 침실로 사용한 2층 방 한쪽 구석에는 긴급한 경우 사용할 수 있도록 비상 탈출구가 만들어져 이었다. 비상탈출구를 통하면 배 한척이 나오는 데 이곳의 지형적 특성을 이용하여 위험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벗어나기 위한 방안이었다.
석오 이동녕, 김의한 일가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윤봉길 의거 직후 자싱으로 피신했다. 김구보다 2주 정도 앞서 자싱에 도착한 이들은 추푸청의 아들 추펑장(禇鳳章)의 집에 머물렀다. 김구의 피난처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동녕, 박찬익, 엄항섭, 김의한과 그들의 가족이 2년간 머물렀다. 그리고 김구의 어머니인 곽낙원과 두 아들도 본국에서 자싱으로 와서 이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현재 자싱 백범김구 피난처와 임시정부요인 거주지는 자싱시에서 잘 정비하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싱시 남문 매만가 76호는 천퉁성의 주택으로 청나라 말기에 지은 건물로 복도식 6칸 양식의 2층 건물이다.
2000년 자싱 시정부는 당시 피난처를 시급문물보호기관으로 지정했고 2005년에는 전면 수리‧복원했으며 현재는 저장성 성급문물보호기관으로 지정됐다. 이동녕, 김의한, 엄항섭 등 임시정부요인들과 가족들은 자싱 일휘교 17호에 거주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거주지 역시 중국측의 적극적인 배려로 마련된 것이었다. 일휘교 17호는 청조 말기 정원식 네칸 이층집이고 건축면적은 260평방미터이다. 중국 내 사적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자싱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사적지 역시 한중 수교 이후 본격적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자싱을 떠나 하이옌으로
일본은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상하이와 항저우 철로를 수색했다. 자싱은 철로의 중간 지점이어서 일본 경찰이 여기에도 파견됐다. 당시 김구는 중국 경찰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자싱 보안대에서 취조를 받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는 천퉁성의 보증을 받고 풀려났지만 이후 신분 노출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주아이바오(朱愛寶)라는 여자 뱃사공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감시망이 좁혀 온다고 판단하여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자 하였다. 바로 하이옌(海鹽)이었다. 하이옌은 추펑창의 부인 주지아루이의 친정집이 있는 곳이었다.
김구는 윤선을 타고 자싱을 떠나 하이옌으로 가서 주지아루이 집안의 별장인 자이칭(載靑) 별장에서 6개월 간 생활했다. 김구는 1932년 7월 주지아루이의 친정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바로 자이칭 별장으로 향했다. 주지아루이는 김구와 기꺼이 그 길을 동행했다.
김구는 그 고마움을 활동사진에 남기는 한편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주 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하이옌에서 김구는 6개월동안 중국의 산천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임시정부의 존폐 기로에서 송병조와 차리석이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김구는 더 이상 하이옌에 머물 수 없어 다시 항저우로 건너와 새롭게 국무위원을 임명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을 강화했다.
한중우호를 말하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김구의 아들 김신은 하이옌을 방문하여 중국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했고 1996년 재청별장을 보수하여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했다. 이때 김신은 '음수사원 한중우의'라는 네 글자를 방문 기념으로 남겼다. 어려움 속에서도 우의를 도모했던 한중관계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또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다.
지금도 김구와 주지아루이가 걸어갔던 길에는 '김구소도(金九小道)'라는 기념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누구라도 이 길을 걷다 보면 김구를 도와준 중국인들의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