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에 다리 한쪽을 저는 양지골 아저씨, 밀짚모자 쓰고 떡갈나무 지팡이 하나 들고 간이역에 서서 해 지기 전에 달려올 완행기차를 기다립니다. '출세하자면 대처에 나가야 한다'는 고집불통 맏자식을 배웅하면서 삶은 계란 꾸러미를 건네주던 음지골 아낙네의 손등 위에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간이역 푸른 하늘에 벼락같은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들어옵니다. 기차에서는 닭도 내리고 강아지도 내리고 흑염소도 내립니다. 보리쌀 포대와 옥수수랑 감자자루가 다시 실려지면 기차는 졸음처럼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기차에서 내린 강아지는 사람보다 먼저 논길을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치달립니다.
간이역은 분주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때로는 바람만 불고, 햇살 이글거리는 여름에는 매미소리만 가득 찹니다. 눈 내리는 겨울, 사람들은 오바깃을 세우고, 온통 마후라로 머리통 휘감고 발을 구르며 완행열차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간이역은 오랫동안 이 땅의 이름없는 장삼이사들을 이리저리 실어 나르던 달구지같은 완행열차 정류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빨리 달려야 한다는 망할 속도중독증의 미친 세월을 만나, 이 땅의 아름답고 한가로운 간이역은 다 떨어진 고무신짝처럼 버려지고, 허물어지고, 잊혀져 내동댕이쳐지고 있습니다. 고속전철이라는 말썽 많은 괴물이 나타나 멀쩡한 산이 뚫리고 없어도 되는 다리가 생기고, 우리 산하의 핏줄이 끊기고 거기 살던 생명체들이 절단나고 있습니다."
***열 번째 '풀꽃상' '간이역'이 수상해**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 '간이역'을 올해의 '풀꽃상' 수상자로 선정해 23일 발표하면서 밝힌 선정이유다.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간이역은 회복해야 할 느림과 반개발의 가치를 절박하게 웅변하고 있다"며 "아직도 간이역으로 상징되는 넉넉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심성의 사람들, 무서운 속도의 광증에 온몸을 내던져 '이게 아니오'라고 신음하고 있는 분들을 떠올리며 '간이역'을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특히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무조건 빨리 달려야 한다는 속도중독증을 상징하는 고속전철이 멀쩡한 산을 뚫고 없어도 되는 다리를 놓으며, 우리 산하의 핏줄을 끊고 생명체들을 절단내고 있다"고 밝혀 고속철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간이역과 더불어 묵묵히 살아온 역무원, 다큐멘터리 영화 <곡선>을 만든 부산문학예술공동체 영상패 '숨', 경부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터널 반대운동을 벌이며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벌이고 있는 내원사 지율스님에게 간이역을 대신해 부상을 줄 예정이다. 시상식은 24일 오후 3시 광화문 열린시민마당에서 열린다.
***'자연에 대한 존경심 회복', 자연물에 '풀꽃상'**
3천4백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우리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한다'는 뜻에서 1999년부터 '동강의 비오리'를 시작으로 사람이 아닌 자연물에 '풀꽃상'을 시상해와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올해 10회를 맞이하는 '풀꽃상'은 그 동안 '동강의 비오리', '보길도의 갯돌', '가을 억새', '인사동 골목길', '새만금 갯벌의 백합', '지리산의 물봉선', '지렁이', '자전거', '논'에게 수상됐다.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1998년 12월 스물세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천초영(千草英) 씨의 어머니 화가 정상명 씨가 생전 그가 품었던 꿈을 기억하기 위해 제안한 것에서 시작했다.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라는 이름도 '천 송이 풀꽃'을 뜻하는 천초영 씨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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