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 암센터 병실에 누워 있었다. 주삿바늘을 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솜으로 팔 한쪽을 누르고 있었다. 토론회나 캠페인, 시위 현장이 아닌 병원에서 그를 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순간 그는 늘 그랬듯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아침 7시부터 7시간 동안 항암주사를 맞았다는 그는 힘들었을 텐데도 오는 길 힘들지는 않았는지, 밥은 먹었는지 상대방부터 챙긴다.
지난해 7월 말 정지열 선생은 폐암 선고를 받았다. 7월 초에도 그는 국회에서 열린 전국피해자대회에 참석해 석면 피해자들의 처우 개선과 슬레이트 지붕 철거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한데 폐암이라는 사실이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사실 잊고 있었다. 석면추방운동에 앞장섰던 그 역시도 석면 피해자였단 사실을 말이다.
친척과 마을을 삼킨 석면
그의 고향은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 자리한 한 시골 마을이다. 마을 바로 뒤에 석면광산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해 한반도 곳곳에 석면광산을 대대적으로 개발했는데 마을 뒤 석면광산도 그중 하나였다.
2008년 환경부는 그가 사는 마을을 포함해 홍성, 보령지역 석면광산 인근 주민들 중 215명을 무작위로 선정해 X-레이를 촬영했다. 그 결과 그를 포함해 110명에게서 이상 소견이 나왔다. 검진 결과 석면폐를 진단받았다. 운동 부족 때문에 숨이 차는 줄만 알았는데 석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의 친인척들은 석면 광산에서 일을 했다. 1930년대 석면광산 초기부터 그의 할아버지는 석면 캐는 일을 했고 이어 숙부, 친형, 당숙 등 친인척들 대다수가 석면광산에서 일을 했다. 그도 16, 17살 무렵에 형들을 따라다니며 석면광산에서 일을 도왔다.
"형님들이 발파를 하면 부서진 돌들 중 석면 맥이 있는 돌들을 골라 형님들 앞에 가져다주는 일을 했어요. 그러면 형님들은 다시 돌을 깨서 석면만 골라냈어요. 그때 보호 장비가 어디 있어요? 마스크도 없고 장갑도 없이 다들 맨손으로 일했죠."
한 2년 정도 석면광산을 따라다니다 그는 다른 일을 하겠다며 외지로 나갔고 나이 여든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땐 석면광산은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석면광산에서 일했던 친인척들은 대부분 오래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와 숙부는 폐질환으로 돌아가시고 당숙은 폐암으로 50세를 넘기지 못하셨다. 그의 친형 또한 석면피해 진단을 받고 숨졌다.
"우리 집안에 석면환자가 30명이 넘어요. 암만 9명이에요. 석면광산에 근무하지 않았어도 근처에 산 친척도 석면 때문에 죽었어요."
몇 년 전에 비해 피해자 숫자가 늘었다. 안타까운 가족사를 전할 때면 그는 늘 그들에 비하면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하고 했다. 그분들은 원인도 모른 채 돌아가셨지만 자신은 왜 병에 걸렸는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가 석면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석면추방운동에 뛰어든 이유다.
석면 피해자에서 석면추방운동가로
석면광산 인근 마을 주민들의 검사 결과가 알려지면서 한국은 발칵 뒤집혔다. 1987년 세계보건기구가 석면을 1급 발암물질로 지정하며 그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한국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야 석면사용을 금지할 정도로 석면 위험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생활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석면을 사용해온 데다가 석면으로 인한 피해 역시 10~40년 후에야 발병이 되다 보니 일반 시민들도 석면의 위험성을 체감하기 어려웠다. 또 석면 피해자 이야기가 나와도 석면공장 노동자의 문제로 선을 그었다.
하지만 정지열 씨의 이야기는 차원이 달랐다.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주민 100명이 넘는 피해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한국판 구보타 쇼크(2005년 일본 오사카 인근 구보타 수도관 공장이 인근 주민 수백 명에게 석면암 중피종을 발생시킨 사건)였다. 그는 석면으로 온전치 않은 폐를 안고도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기자회견이나 토론회에 석면 피해 증인으로 참석해 석면의 위험성을 알렸다. 서울도 숱하게 오고 갔다. 그와 같은 피해자들을 조직해 집회를 열기도 하고 여의치 않으면 홀로 일인시위를 하며 석면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다행히 2011년 석면피해구제법이 시행되었고 그는 그 법을 통해 석면 피해자임을 인정받아 피해에 대한 보상을 일부 받게 됐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석면구제법이 제정됐지만 개선해야 할 내용이 적지 않았고 대한민국 곳곳에 석면이 시한폭탄처럼 숨어 있었다. 더 이상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며 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광천 집 옆에 사무실까지 마련해 석면 피해자 지원과 석면추방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
석면추방운동가로 활동한 지 11년. 석면피해구제법도 조금씩 개선됐고 석면 관리에 대한 정부 정책도 세워지고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하지만 그의 폐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원래 의사가 7월 2일에 검사를 하자고 했어요. 근데 7월 3일에 전국 석면 피해자 대회가 잡혀있었어요. 그래서 7월 말로 검사를 미뤘어요. 처음엔 의사가 저에게 암이라고 알려주지 않았어요. 근데 간호사가 저에게 암 환자는 진료비의 5퍼센트만 내면 된다고 하대요. 그때 암이란 걸 알았어요."
덤덤한 그와 달리 아내는 검사가 늦어져 치료 또한 늦어진 것 같아 속상하기만 하다.
현재 그는 수원에 머물며 서울 삼성병원 암센터에서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항암제가 워낙 독해서 6시간에 걸쳐서 맞는다. 의사는 백혈구가 부족하거나 신장이 나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다행히 몸은 잘 견뎌주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10월 27~30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직업환경피해자대회에 참석해 국내는 물론 아시아 각 지역에서 온 산재피해자와 환경피해자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대회 마지막 날에는 홍성에 내려가 석면광산 안내까지 맡았다. 그 때문에 입안이 다 헐었다. 가족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멀리서 한국까지 오셨는데 모른 척할 수 없죠. 내가 해야 할 일이에요. 오히려 격려와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더 잘 버티고 있지 않나 싶어요"라는 그는 다행히 2차까지 진행한 항암 치료 결과 암 크기가 많이 줄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했다.
석면추방운동가로 계속 우리 곁에 남아주시길
며칠 후 11월 15일 환경보건시민센터 9주년 창립기념식과 함께 그의 활동을 기리고 응원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석면추방네트워크 활동가를 비롯해 그와 같은 석면폐증 1급, 2급 피해자, 라돈 침대 피해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족이 그를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초기부터 활동을 함께 해온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박사는 "2009년 초 광천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마음이 맞아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가서 석면추방운동을 해나갔다. 활동에 대해 한 번도 주저하신 적이 없고 비용이 부족하다 싶으면 사비를 털어 함께 해주셨다"며 그간의 활동을 떠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지질학 박사이자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운영위원인 이인현 박사는 말했다.
"현장에서 많은 피해자들을 만났지만 선생님처럼 헌신적이고 다른 피해자들까지 이끌어내는 분은 본 적이 없다. 정지열 선생님은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이다."
그와 동행한 석면 피해자는 "위원장님 아니었으면 석면에 석 자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연신 손등으로 눈시울을 문질렀다.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어요"라는 말로 마음을 전했다. 그동안 아버지 건강에 속이 탔을 아들도 한마디 했다. "아버지가 활동한 내용이 법이 되고 또 많은 피해자분들이 구제받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됐다. 아버지 자식들이 석사, 박사인데 우리 다 합쳐도 아버지를 못 당한다"며 "아버지 혼자서는 힘든 싸움이었겠지만 전문가와 시민단체가 함께 있어 공룡 같은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싸울 수 있었다.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자리를 함께 한 이들은 차마 전하지 못한 마음들을 노래에 담아 불렀다. 그 마음들이 전해져 부디 쾌차하시길, 오래도록 곁에서 석면추방운동가와 환경피해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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