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아플 때는 오지도 못하게 했으면서"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
"버선발로 뛰어나와야지. 어른이 올 때까지 앉아서. 머리 긴 거봐. 엄청 따뜻한 거 갖고 왔거든. 크레인에서 입던 건데 엄청 따뜻해. 이건 밀양에서 할머니들이 주신 거. 내려와서 돌려줘. 이거 진짜 따뜻해. 마후라(목도리)도 밀양 할머니들이 직접 만든 거야. 이거 주려고 111km를 걸어왔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한 손에는 '박문진 힘내라'라고 쓴 부채를 들고 두꺼운 패딩과 털모자, 목도리과 마스크 등으로 단단히 몸을 감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저 멀리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 모습이 보일 무렵부터 눈물을 흘렸다.
김진숙 위원은 유방암 수술 후 투병 중임에도 박 위원과 연대하기 위해 지난 23일부터 부산에서부터 도보행진에 나섰다. 그렇게 걸은 지 7일째인 29일, 두 사람이 만났다.
김진숙 위원은 오랜 친구 박문진 위원에게 목도리를 두르고 빨간 패딩을 입혔다. 각각 밀양 송전탑과 한진중공업 투쟁의 기억이 담긴 것들이었다. 그렇게 준비한 '선물'을 건낸 뒤, 두 사람은 한참을 끌어안고 말없이 울었다.
노조 탄압 진상규명과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박문진 위원은 지난 7월 1일부터 182일째, 지상으로부터 70m 높이의 대구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고공농성 중이다. 애초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인 박문진 지도위원과 송영숙 전 노조 부지부장이 함께 했으나 이후 송 전 부지부장이 건강이 악화되면서 107일만에 고공농성을 중단했다. 이후부터 박 위원 혼자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김 지도위원 홀로 떠난 행진, 마지막엔 200여 명이 함께 해
김 위원 홀로 본인의 트위터에 "걸어서 박문진에게 갑니다"는 글만 올리고 시작된 행진이었다. 첫날은 김 위원이 홀로 18km를 걸었다. 둘째 날부터 한진중공업, 철도노조 등 투쟁 중인 노동자들의 연대가 시작됐다. 김 위원의 트위터를 보고 모인 8명이, 다음날은 40여 명이 모였다. 마지막 날인 29일에는 200여 명이 함께 행진했다. 이날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 등 30여명이 서울에서 '동행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기자도 이 버스에 동행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19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래봉생병원의 노조탄압에 맞서 보건의료노조(당시 병원노련)에 연대투쟁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다. 김진숙 위원은 "어디 투쟁 현장 가면 항상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위원은 '2011년 크레인 농성' 때를 떠올렸다. 당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평택에서 부산까지 400km를 걸어왔다. 그는 "걷는 게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사람들의 진심어린 마음이 모아야 가능한 것"이라며 "나 역시 크레인 농성 때 희망버스를 통해 큰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당시 장장 309일이라는 기간을 크레인 위에서 버텼다. 그렇기에 박 위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시간은 길어지는데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지는 것만큼 힘든 게 없다"며 "내가 이렇게라도 나와서 기사 한 줄이라도 나오면 그걸로 됐다"고 말했다.
"다들 그래요. 저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그런데 해고되서 13년 동안 할거 다 해본사람이 뭘 더해요 제가 크레인에 있을 때에도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거였어요. 저도 크레인에 올라가기 전에 몇 년 동안 할거 다 해봤어요. 근데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으니까 결국 올라가는거지."
김 위원이 크레인에 오를 때는 이명박 정부였다. 지금의 정부는 그때와 다를까. 김 위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신의 친구인 박 위원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공농성 중이었다.
"저는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노총 부산본부 2기 때부터 지도부를 같이 했어요. 그만큼 잘 아는 분이라 그분이 대통령이 되셨을 때 노동문제, 사회문제에 열린 정책들을 기대했어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노동자들이 너무 극단적으로 몰리니까 단식하고 고공농성하고 쌍용차는 30여 명이 죽고, 이런 거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 문 대통령 당선되고서 제가 트위터에 '노동자들이 더 이상 굶지 않고 높은데 올라가지 않고 죽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 정도는 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지금 그것조차 되지 않고 시간은 이렇게 길어지면서 노동자들은 여전히 내몰려있고. 쌍용차는 뭐에요 그게 30명 '쌩' 목숨 갈아 넣어 만든 합의는 휴지조각이 됐잖아요. 대통령까지 나서서 얼마나 얘기를 많이 했는데."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관절통 앓으면서도 행진 마무리
영남대의료원은 노조 파괴로 악명 높은 '창조컨설팅'과 2006년 계약을 맺고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노조가 비정규직 정상화를 요구하며 3일간 파업을 벌이자 병원은 박 위원을 비롯한 노조 간부 10명을 해고하고 노조원 28명을 중징계 했다. 계속된 탄압으로 한때 1000명에 달했던 영남대의료원 노조는 현재 70명 규모로 축소됐다.
김 위원은 "박 위원이 영대병원 노조에 어떤 마음인지, 어떤 책임감이 있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봤다"며 "박 위원은 노동조합을 그 시절로 되돌리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소임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항암치료를 받은 김 위원은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약 부작용으로 관절통을 앓고 있다. 항암제가 독해 간도 다 망가졌다. 김 위원은 "후유증과 부작용이 심하다"며 "골다공증이 있는데 골밀도가 떨어지는 부작용이 생기고, 그 약을 먹으면 또 간이 나빠지는 식"이라고 말했다.
2011년 고공농성의 후유증도 남아있다. 김 위원은 "크레인에 있을 때부터 근육 손실이 심해서 체력도 떨어지고 회복도 잘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관심들이 만들어져야 투쟁으로 이어지고 그래야 병원에 대한 압박이 된다"며 "그 힘으로 타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보 행진을 하려고 걷는 연습을 해온 김 위원은 간에 쇼크가 와 쓰러진 적도 있다. 원래 생각했던 도보 행진의 시작은 2~3주 미뤄졌다.
김진숙 "내 친구를 거기 두고온 몸보다 마음이 아픈 밤"
일주일에 걸쳐 친구를 만나기 위해 걸어 온 김 위원이 박 위원을 만난 시간은 고작 20여 분이었다. 김 위원은 짧은 만남 뒤, 내려오면서 "운동화 값 모아서 방수로 사줘. 발 시려 죽겠다"라고 연대 인원들에게 말한 뒤, "갈게. 파이팅. 힘들면 내려와"라고 친구와 농담 섞인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가볍게' 헤어졌지만 친구를 추운 농성장에 홀로 남겨 놓고 돌아서는 마음은 무거웠던 듯하다. 김 위원은 이날 밤 자신의 트위터에 박 위원을 만난 소회를 글로 썼다. 정권이 바뀌어도 노동자가 하늘에 매달리는 세상은 여전한 듯하다.
"안 울려고 했어요. 울면 남겨질 사람이 너무 힘드니까. 7일을 걸어 하늘 꼭대기에서 손흔드는 손톱만한 내친구를 보자 가슴에서 후두둑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소리내 울던 친구를 부둥켜 안으니 바스러질듯 야윈 몸. 182일. 내친구를 거기 두고온 몸보다 마음이 너무 아픈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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