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지고 불에 타 처참한 몰골을 한 트럭과 차량들이 도로 위에 뒤엉켜 있었다. 교통사고가 아니라 무차별 폭격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14일 경북 상주-영천고속도로 위에서 벌어졌던 교통사고의 모습이었다.
이번 사고는 겨울철 운전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겨울철 도로 위 ‘죽음의 신’ 또는 ‘암살자’로 불리는 ‘블랙아이스’ 사고가 지난 주말 경북과 충북 등 전국 곳곳의 도로와 고속도로 위에서 발생했다.
칠흑 같은 새벽 사고 도로에서 운전자들은 평소처럼 한산한 도로 위를 마구 내달렸다. 한국교통안전공단, 한국도로공사, 경찰 등 그 누구도 도로 위 빙판길을 조심하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경고 표지판이나 전광판도 없었다. 휴대폰에서 긴급재난 경고 문자도 울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가 온 뒤 기온이 내려가 도로 위가 얇은 얼음, 즉 블랙아이스로 덮였는데도 운전자들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빙판에 미끄러진 수십 대의 차량들이 사고가 난 앞차들을 차례대로 들이받았다. 브레이크는 무용지물이었다. 차는 형체 분간을 못할 정도로 찌그러졌다. 급기야 차량 화재까지 일어났다. 지옥 같은 새벽이었다. 14일 토요일의 비극은 이렇게 일어났다. 모두 7명이 숨지고 40명 가까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가장 큰 사고는 14일 새벽 4시41분께 경북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 상주-영천고속도로 영천 방향 상행선(상주 기점 26㎞)에서 일어났다. 이 구간에서 벌어진 사고로 6명이 숨지고 14명이 다쳤다. 비슷한 시각 사고 지점에서 2㎞ 떨어진 하행선에서도 20여대가 연쇄 추돌해 1명이 숨지고 18명이 부상했다. 이 두 곳의 사고로 모두 7명이 숨지고 32명이 다쳤다. 트럭과 승용차 등 차 8대가 불에 타고 35대가 파손됐다.
일반도로에서도 블랙아이스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오전 5시28분께 충북 영동군 심천면 4번 국도를 달리던 화물차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차량 6대가 연쇄 추돌했다. 두 명이 다쳤다. 충북에서만 블랙아이스 때문으로 보이는 교통사고가 무려 22건이나 일어났다.
블랙아이스 사고는 연례행사, 근본 대책은 외면
블랙아이스로 인한 교통사고와 사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연례행사처럼 매년 벌어져왔다. 특히 시야가 나쁘고 사고가 나면 대처하기 쉽지 않은 한밤중이나 새벽에 고속도로 빙판길에서사고가 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방비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상 현상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니라 도로안전 관련 기관과 관계자들의 안이함이 빚은 인재다. 운전자 탓을 할 게 못된다. 이번 사고가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유사 사고가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교통안전 당국이 근본적인 개선책을 마련해 시행하지 않는 이상 지역을 가리지 않고 모든 운전자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블랙아이스는 주로 터널의 입·출구나 그늘진 산모퉁이, 교량, 고가도로 위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 도로보다 온도가 낮거나 빨리 떨어지는 곳이다. 제설용 염화칼슘에 녹은 눈이 다시 얇게 얼어 빙판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경북 상주-영천 사고의 경우도 산모퉁이 때문에 도로가 굽어져 있는 구간에서 일어났다. 사고가 나더라도 모퉁이를 돌 때까지 운전자가 이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산재 하인리히 법칙, 교통사고에도 적용돼
하인리히 법칙은 산업재해뿐만 아니라 교통사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어느 원인에 의해 사고가 잦으면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없애지 않는 한 언젠가 대형사고가 터진다는 것이다. 블랙아이스 사고도 그랬다. 요 근래 몇 차례 블랙아이스 교통사고가 있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사전 경고였던 셈이다.
2016년 1월 오전 8시쯤 서해안고속도로 광천나들목에서 16중 빙판길 추돌사고가 일어났다. 지난 달 15일 오전 7시45분쯤에는 경기도 양평군 제2영동고속도로 동양평 IC 인근에서 자동차 20대가 연속으로 부딪히는 블랙아이스 사고가 일어났다. 같은 달 29일에는 오전 6시15분쯤 강원 고성의 한 국도에서 승용차가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았고 뒤따르던 SUV 차량 등 4대의 연쇄 추돌 사고로 이어졌다.
이런 블랙아이스 사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훈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블랙아이스 교통사고를 줄이거나 막을 수 있는 확실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번 사고의 과정과 원인을 면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한국도로공사·한국교통안전공단·경찰 등 관계기관은 16일 사고현장을 찾아 추돌사고 원인과 화재 등 2차사고 원인을 조사키로 했다. 사고가 난 민자고속도로 관리회사의 안전조치 미비 여부 등도 조사 대상이라고 한다.
도로교통공단이 밝힌 ‘최근 5년간 도로 노면 상태별 교통사고’ 현황자료를 보면, 서리·결빙 상태의 전국 도로에서 발생한 사고는 2014년 1812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것이 2015년 847건으로 줄었다가 다시 2016년 1135건으로 증가했다. 이어 2017년 1359건, 지난해 1349건으로 집계됐다. 5년간 이 유형의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98명, 부상자는 1만1837명으로 각각 나타났다.
행정안전부는 블랙아이스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SK·카카오·맵퍼스 등 3대 내비게이션 운영사와 손잡고 12월부터 전국 제설 취약구간(1288곳), 결빙교통사고 다발지역(136곳)을 안내 중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은 상태에서 운행하거나 속도를 아주 낮추지 않는 한 유사 사고가 벌어질 수 있다.
첨단기술 활용한 결빙 탐지 또는 열 내는 도로 필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실제 블랙아이스가 도로 위에서 발생했을 경우 이를 즉시 이를 탐지해내 경고전광판이나 내비게이션 안내 방송 등을 통해 이를 확실하게 고지하는 것이다. 지난해 초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도로연구소가 블랙아이스 정보수집 기술을 개발했지만 관련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아 아직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첨단기술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블랙아이스 사고 예방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한편 빙판길이 잘 형성되는 도로에는 도로포장재 내부에 열선이나 온수 파이프, 발열 매트 등 블랙아이스를 방지하는 도로포장을 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빙판도로를 예방하는 방법에는 발열 또는 결빙방지 물질을 도로포장재에 넣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예산이 들어간다. 상습 결빙지역이나 그동안 대형사고 또는 인명피해를 낸 지역의 도로부터 우선 예산을 투입해 발열포장을 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블랙아이스 교통사고는 특정 계절, 특정 지역, 특정 구간에서 생기는 위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운전자가 언제 그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예산 타령을 하고 있을 계제는 못된다. 정부나 지자체, 도로공사, 국회 등이 블랙아이스 교통사고 예방에 들어가는 비용에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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