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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불한당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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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불한당들의 시대

그림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제1부 이야기의 서막 ⑳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21. 성조황고(聖祖皇姑)의 등극

이윽고 신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될 덕만공주는 대당(大唐)에 사신을 보냈다. 사신과 함께 신향녀(身香女)들도 바다를 건너 산둥반도 등주(登州)에 다다랐다. 신라 사신들의 행렬을 따라 매혹적인 향기가 진동했다. 가항(街巷)의 잡배들 중에는 그 향기에 매료되어 무작정 사절단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길 안내를 도맡았다. 등주에서 내주 창양현(昌陽縣), 밀주(密州), 해주(海州), 초주(楚州), 양주(楊洲), 사주(泗州), 정주(鄭州), 동도 낙양(洛陽), 화음현(花陰縣), 동관(潼關)을 거쳐 파교(灞橋)와 산교(滻橋)를 건너 드디어 장안성의 춘명문에 다다랐다. 사신이 지나가는 곳곳에서 잡배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들은 소란 피우기를 일삼는 시정잡배이거나 모리배들이었으나 웬일인지 고분고분 따라왔다. 신라 사절은 끼니마다 그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급기야 장안(長安)에 다다를 즈음에는 잡배 무리의 행렬이 사신보다 더 길어졌다.


춘명문(春明門:동방에서 온 사신들이 출입하는 문)을 지키는 수문병들이 신라 사절만 통과시키자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잡배들은 잠잠했던 그들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수문병들에게 침을 뱉거나 대놓고 사타구니를 까고 오줌을 싸지르며 신라 사신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망쳤다고 노발대발했다. 신라인들이 장안까지 길안내를 해주면 거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수문병들은 잡배들의 항의를 곧이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해산시키려 했다. 그래도 흩어지지 않고 저항이 드세지자 황성(皇城)을 경비하는 금오위(金吾衛) 군사들이 출동했다. 말발굽 소리와 황금빛 갑주를 보고서야 잡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황궁의 중관(中官:고위 환관)들이 소란의 이유를 묻자 사신들은 신향녀 때문이라고만 답했다. 신라 사절단에서 풍기는 향기는 이내 황궁 안을 가득 채웠다. 춘명문에서의 소란은 신향녀의 향기와 함께 천가한에게 알려졌다.

천가한(天可汗:'하늘에서 내려온 칸'이란 뜻으로 돌궐 족이 당태종에게 바친 호칭)은 황후 장손씨(長孫氏) 아래에 정일품 부인(夫人)들과 정이품 구빈(九嬪)들과 정삼품 첩여(婕妤)들과 정사품 미인(美人)들과 정오품 재인(才人)들을 비롯하여 대어처(代御妻) 80여 명을 두었다. 비빈(妃嬪) 신분의 여인들만 120인이 넘었다. 황제는 스스로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 말하며 각처(各處)에서 각양(各樣)의 여인들을 편력(遍歷)했다.

중관들이 신라의 신향녀들이 풍기는 농농한 향기 때문에 시정잡배들이 폭도로 돌변했다고 상진(上秦:황제에게 보고하는 것)하자, 호기심이 발동한 황제는 당장 신라 사절을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황제는 비서감(秘書監) 위징(魏徵)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천하 통일 전쟁에서 천책상장(天策上將:하늘이 낸 계책으로 백전백승하는 상장군)이라 불렸던 황제였다. 현무문의 정변을 일으켜 형 황태자 이건성과 동생 제왕(齊王) 이원길을 죽이고 그들의 일족까지 모두 참살했던 황제였다. 위징은 그런 황제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정 전반에 관여했으며 황제의 자질구레한 실수에도 잔소리를 참지 못했다. 위징의 직간(直諫)은 죽기를 각오한 것처럼 날이 서있었고 황제의 심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간언에 관한 한, 그는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위징은 언제나 황제와의 문답을 글로 남겼다. 천가한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일 전, 춘명문에서 신라 사신들 때문에 소란이 있었다 하니 그 자초지종을 사신들에게 묻고자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시오?"

빠른 붓놀림으로 황제의 말을 기록하던 위징이 되물었다.

"신향녀 때문이신지요?"

난데없이 황제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황제는 위징과의 대화에서 대답 대신 큰소리로 웃을 때가 많았다. 위징은 붓놀림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신라에서는 곧 여왕이 들어설 것이라 합니다. 여왕이라니... 가당키나 한 법도이겠습니까? 신라인들의 사정이란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이 사신단을 보낸 이유도 필시 그런 연유와 맞닿아 있을 것입니다. 하므로, 대가(大家:황제를 지칭하는 궁궐 내 호칭)께서는 신라인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셔야 합니다."

황제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사신단을 그대로 돌려보내란 말인가?"

위징은 쉴 새 없이 붓을 놀렸다.

"만나셔야지요. 허나 신향녀를 넙죽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신라의 수단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황제가 대답 대신 겸연쩍게 다시 웃었다. 위징은 황제와의 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신라 사신단이 황제를 알현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날따라 신향녀들의 몸에서는 온갖 꽃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뿜어져 나왔다. 태극궁(太極宮:황제의 집무실과 거처가 밀집된 지역) 전체가 온통 꽃향기로 자욱하여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신라 사신은 먼저 진평왕의 붕(崩:죽음)을 전했다. 황제는 애도를 표하며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황제 직속 고문관)로 추증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황제가 직접 신라의 왕에게 벼슬을 내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것은 신라왕이 당나라 황제의 신하라는 것을 만방에 공표하는 것이었다. 신라 사신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당혹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부의(賻儀:부조로 내는 돈이나 물품)로 비단 200 필을 하사하였고 신라 사신들은 그 또한 흔쾌히 받들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호방하게 웃던 황제가 이와 같이 물었다.

"그러한데, 신라왕은 언제 죽은 것인가? 그에 대해 여러 낭설이 있어 너희에게 묻는 것이니?"

황제의 돌연한 질문에 신라의 사신들은 우물쭈물 명확한 답변을 못했다. 진평왕이 죽은 시기에 대해 고기(古記)에서는 정관(貞觀:당태종의 연호) 6년 정월에 죽었다고 하고 신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정관 5년에 졸(卒)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이것은 진평왕이 죽어서도 오랫동안 덕만공주 곁을 지켰던 것에 따른 혼란일 것이리라.

이윽고, 신라 사신들은 신향녀들을 황제 앞에 대령하며 장차 여왕이 될 공주의 뜻을 황제에게 간곡하게 전했다.

"이 처녀들은 천가한께서 오래전에 보내주신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옵니다. 우리 신라에는 예로부터 지극히 존숭 하는 표시로 미녀를 공납하는 풍습이 있사온데, 이 처자들은 국색(國色:나라에서 으뜸가는 미인)으로 뽑힌 여인들 이옵고, 몸에서 향기가 난다 하여 신향녀라고 하옵니다. 우리 여왕께서 지극한 예를 표하라는 간곡한 당부를 하셨사옵기에..."

황제는 신라 사신의 말이 미처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저 임읍(林邑:베트남)에서 바친 앵무새도 모진 추위를 부르짖으며 제 고향으로 되돌아가려 하는데... 하물며 두 처자가 친족과 생이별함에 있어서랴~"

황제는 위징이 시키는 바대로 신향녀들을 거부했다. 신라 사신들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으나, 황제가 거부의사를 밝힌 이상 퇴청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 사절이 모두 물러나자 위징이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신향녀들을 받았다면 신라는 그것을 미끼로 더욱 많은 이해와 요구를 시도할 것입니다. 신라인들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십시오. 저들의 뜻을 교란시켜야 차후의 쓰임을 도모할 것이오니 대가께서는 오늘 과감한 결단을 보이셨사옵니다. "

천가한은 위징의 칭찬에 큰소리로 웃으며 기뻐했다. 황제는 호방한 어투로 이와 같은 구절을 읊었다.

"군주야(君舟也)이고 인수야(人水也)이니, 수능재주역능복주(水能載舟亦能覆舟)이도다! 먼 이국의 소녀들이기는 하나 고향을 떠난 아픔이 오죽할까! 짐은 그들의 아픔마저도 어루만져 줄 것이니..."

황제의 말은 원래 위징이 황제에게 직간(直諫)할 때 자주 사용하던 구절이었다. '군주는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으니, 물은 배를 뜨게 해 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천가한이 정적(政敵)들을 대할 때는 그 비정함이 이루 말할 수도 없었으나, 자신의 휘하에 있는 신하들 특히 위징을 대하는 태도는 간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여 세상에서는 당태종을 일컬어 성덕천자(聖德天子:성스러운 덕성의 천자)라 칭송하며 그의 덕과 넉넉한 품을 찬양하였으니, 중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정관의 치(貞觀之治)'는 이와 같은 성군과 충신의 대인배적 풍모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을 것이라.

자장(慈藏)이 율사(律師:승단의 계율을 총괄하는 직책)가 되면서 제일 먼저 서둘렀던 것은 탑을 세우는 일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황룡사 뒤편으로 기상천외한 모양의 돌탑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안산암(安山巖) 벽돌로 켜켜이 쌓여가는 탑은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황룡사의 금당 뒤편으로 검은 돌탑이 불쑥 솟은 모습은, 마치 황룡사가 돌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순식간에 세간의 관심은 돌탑에 쏠렸다. 목탑에 익숙했던 국인들은 검은 돌로, 그것도 사각형의 돌을 촘촘하게 쌓아 올린 탑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국인들의 이목이 온통 돌탑에 쏠리자, 황룡사는 국찰(國刹)로서의 위엄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황룡사가 어떤 절인가! 천축국 아육왕(阿育王: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대왕)이 보낸 쇠와 금으로 만든, 무량억겁의 연기(緣起:모든 현상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법칙)가 살아 숨 쉬는 가람이 아니던가! 고구려와 백제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의 불자들이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친견하기를 소망하는 장륙 삼세불의 사찰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진평왕이 정반왕(淨飯王)의 윤회로 다시 태어난 사실이 밝혀진 곳이고, 그 증거로 땅 속에서 미래의 부처 미륵불이 솟아났던 그 현장이 아니던가!

자장율사는 새로운 탑과 그 주변을 분황사(芬皇寺)라 부르겠다고 공표했다. '분황'은 '향기 나는 황제'를 의미했다. 그것은 곧 여왕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진흥왕에서 진평왕까지 도도하게 이어졌던 황룡사의 전성시대를 마감하고 이제 새롭게 분황사로서 여왕이 다스리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알렸다. 저자에는 여왕의 대관식이 월성(月城)이 아니라 분황사에서 거행될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했다.

당(唐)에서 사신들이 돌아왔다. 그들의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당의 황제가 진평왕에게 벼슬을 내린 것과 비단을 선물한 것과 신향녀들을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저자에 나돌았다. 이와 같이 세세한 소문의 출처는 알 수 없었으나, 국인들은 당나라의 천가한이 여왕의 등극을 승인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자장이 도모하는 일은 모두 일사천리였고 뜻하는 바대로 모두 이루어졌다. 영민했던 진평왕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 했다. 그럴 때마다 덕만공주는 안도하거나 때로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혼란스러웠으나, 공주는 마냥 어좌에 앉아 자장이 열어 주는 문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만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검은 돌탑이 서서히 폭을 줄이며 층을 달리하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국인들은 첨탑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대관식의 시기를 점쳤다. 드디어 탑의 상륜(上輪:머리장식) 만을 남겨둔 어느 날, 별자리를 보고 점을 치는 첨성박사(瞻星博士)들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자장율사를 찾았다.

"오늘 새벽의 천문(天文)이옵니다. 그 상(相)이 괴이하여 율사께 보고 드리옵나이다."

박사들이 내민 지편에는 이와 같이 적혀있었다.

'백홍음우궁정(白虹飮于宮井), 토성범월(土星犯月).'

지편을 들고 있던 자장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천문은 너희 말고 누가 알고 있는가?"

박사들이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하늘이야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온데, 천문만 읽을 줄 안다면 이와 똑같은 상이 나왔겠지요."

자장은 박사들에게 구태여 오늘의 천문을 밝히지 말라고 엄하게 다짐시켰다. 서둘러야 했다. 여왕의 나약함이 드러나기 전에 어서 대관식을 올려야만 한다. 자장이 일사천리 했던 것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대관식이 늦어지면 어떤 일이 돌발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왕의 대관식은 검은 석탑의 상륜이 올려 지자마자 거행되었다.
여왕은 더 이상 미륵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슴을 드러낸 공주의 황금빛 몸을 보고 몽정이나 수음을 일삼던 자들은 이내 시무룩해졌으나, 온통 화려하고 성스러운 치장을 한 여왕은 다시 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원녕사(元寧寺)에서 고골관(枯骨觀)의 수련으로 보기에 아름답거나 거룩한 것과 향기로운 냄새에 쉽게 경도되는 것은 억조창생의 근본 속성임을 깨우쳤던 자장은 여왕이 국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여왕에게는 기존의 '미륵'과 함께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가 덧붙여졌다. '성조황고'란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야부인의 성스런 혈통, 즉 성골(聖骨)을 지닌 여자 황제라는 의미였다. 자장은 분황사의 주지로서 여왕의 즉위식을 총괄했다. 분황사 마당에는 빼곡하게 붉은 명주와 비단이 깔려 있었고 비취색 지붕의 전각과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스투파들이 촘촘히 놓여 있어 장엄한 분위기를 더했다. 신기한 것은 석탑 뒤편에 새롭게 우물이 있었고, 팔각으로 조각된 돌과 둥글게 다듬어진 돌이 봉인이라도 된 것처럼 우물 천정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붉디붉은 주단(紬緞) 가운데 검은 돌탑이 우뚝 솟은 것은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엄동설한의 칼바람 속에서도 신라 전역에서 검은 석탑과 여왕의 대관식을 보기 위해 국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여왕의 대관식은 자장이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경계하느라 자장은 부릅뜬 눈을 거둘 수 없었으나, 그의 뇌리에는 첨성박사들이 전해준 천문으로 온통 혼란스러웠다.

'백홍음우궁정이란 것은 흰무지개가 궁정의 우물을 마신다는 뜻인데, 이것은 아직도 사도태후의 원혼이 사라지지 않은 때문일 터. 하여, 석탑 뒤 우물의 입구를 무거운 돌로 봉인하는 것을 보였으니 이로써 다른 잡설의 유행은 차단하였고...'

자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천문의 나머지 문장은 내심 그 의미가 중첩되고 오리무중 한 것이어서 도무지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토성범월이라 함은 토성은 원한(怨恨)을 나타내고 월(月)은 여왕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원한이 여왕을 범한다는 것인데... 우물을 봉인하였으니 사도태후는 아닐 테고...'

자장은 국인들 앞에서 황금빛 왕관과 짐승의 털을 둘러쓰고 붉거나 푸른 각양각색의 예복으로 즉위식을 거행하고 있는 여왕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원한이라 함은 누구의 것인가? 김용수의 것인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고 내가 알지 못하는 자의 것인가... 아니면... 나의 것인가...'

성조황고로 새롭게 불리게 된 미륵여왕의 대관식은 정관(貞觀) 6년 정월(正月)에 있었다. 정관은 천가한의 연호이고 정관 이외에는 이때를 규정할 어떤 연호도 없다. 인평(仁平)이라는 선덕여왕의 연호는 즉위한 지 6년이 되던 해에 제정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즉위 원년부터 5년까지는 암흑의 시기였고,

그 암흑은 함부로 개구(開口)하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로 시작되었으니...

날이 갈수록 개구리들의 기광은 더욱 극성스럽기만 하였다.


제1부 이야기의 서막 끝.

글 그림 : 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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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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