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3일 19호 태풍 '하기비스'가 일본 전역을 강타했다. '하기비스'는 일본 연 강수량의 3분의 1을 이틀 만에 뿌리고 가는 등 이례적으로 강한 폭우를 동반했다. 이로 인해 5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일본 전역에서 24곳의 제방이 붕괴했고 142개 하천이 범람하는 피해가 있었다.
동일본 지역의 피해가 가장 컸는데 폭우가 쏟아지며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성 폐기물까지 쓸려나갔다.
검은 피라미드라 불리는 방사능 폐기물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면서 방출된 엄청난 양의 방사성 물질은 후쿠시마현을 비롯한 인근 현에 내려앉았고, 일본 정부는 방사능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10센티미터 깊이로 오염된 토양을 긁어내는 제염작업을 실시했다.
제염작업으로 발생한 방사능 폐기물은 검은 비닐 자루에 담긴 채 후쿠시마현 곳곳에 임시 저장해둔 상태였다. 방사능 폐기물 자루는 하나에 수백 킬로그램에서 일 톤까지 무게가 나가는데, 자루마다 보관장소명, 방사선량, 일련번호가 적혀 있어 일견 방사능 폐기물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방사성 폐기물의 관리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시저장소에 대규모로 방사능 폐기물이 저장돼 있지만, 그 밖에도 각 가정집에 제각기 쌓아 놓은 방사성 폐기물의 양도 많은데, 이에 대한 조사나 처리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일본의 시사 주간지 <아에라>는 6월 1일 '후쿠시마 방사능 폐기물을 일본 전역에 묻어 보관했고, 요코하마시의 경우 유치원을 비롯한 초, 중, 고 학교 운동장에 방사능 오염토를 매립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요코하마시에 매립된 방사성 오염토의 양과 매립장소에 대한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일본 정부의 방사능 폐기물 처리가 얼마나 엉망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방사능 오염토를 담고 있는 폐기물 자루들에는 세슘과 스트론튬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방사성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완전히 밀봉해 격리 보관해야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방치하고 있다.
태풍에 유실된 방사능 폐기물량과 그 상태
이번 태풍으로 인해 후쿠시마현 다무라 시 임시보관소 7곳과 이타테 촌의 임시보관소에 보관되어있던 방사능 오염 토양 자루가 인근 강에 적어도 11자루 이상 유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실은 더 심각하다. 다무라 시의 경우 임시보관소에 2667개의 자루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폐기물 자루의 수량조차 파악이 되고 있지 않다. 다무라 시와 환경성은 유실된 자루에서 방사성 폐기물이 유출되지는 않았고, 공간 선량 역시 변동이 없어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주간 <아사히> 기자가 방사능 폐기물 자루들이 홀쭉해진 유실 현장 사진을 개인 트위터로 공개하며 방사성 폐기물의 유출이 있었음을 알려 주었고, 후쿠시마현 내의 공간 선량 측정기 모두 고장 난 상태로 측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무라시 외에도 후쿠시마현 가와우치 마을과 니혼마쓰시에서도 방사능 폐기물 유출 사고가 발생했으나 전체 유출량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임시 저장소 인근 강에서 폐기물이 사라진 빈 자루가 발견되고 있다.
후쿠시마현에서는 2015년에도 폭우에 폐기물 자루 240개가 유출됐고 일부는 내용물이 새 나간 경험이 있으나 허술한 방사능 폐기물 보관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반복되는 방사능 폐기물 유출에도 불구하고, 방사능 폐기물 임시저장 시설들이 모두 강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유실에 대비해 방사능 폐기물 자루를 고정하는 등의 조치가 없었다는 사실은 후쿠시마현에서 방사능 오염토의 유실을 유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염된 강과 저수지의 범람
방사능 폐기물이 유출된 곳 중 하나인 아부쿠마강은 후쿠시마현 남쪽으로 흘러 미야기현을 지나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이번에 유출된 방사능 폐기물은 강을 따라 바다로 흘러들어 결국 태평양을 오염시킬 것으로 보인다. 태풍으로 인한 폭우로 후쿠시마현의 강이 범람하고 제방이 무너지며 후쿠시마현 일대에 홍수가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방사능 폐기물 유출보다 더 심각한 오염이 발생했다.
후쿠시마현의 강과 저수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이미 수만 베크렐의 세슘 오염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후쿠시마현 코리야마 시에만 282개의 저수지가 있는데 일본 정부는 저수지의 방사성 물질을 방치하고 있었다. 이번 홍수로 인해 강과 저수지가 범람하며 바닥에 있던 고농도의 방사능 오염 진흙이 후쿠시마현을 뒤덮었다. 폭우로 인해 범람한 후쿠시마현 모토미야시의 한 저수지는 1킬로그램당 25만 베크렐의 세슘이 검출되었던 곳이었다.('2013. 후쿠시마현 저수지의 방사성 물질 조사보고서')
일본 정부는 도쿄올림픽을 개최하며 후쿠시마현에서의 성화 봉송과 야구를 비롯한 경기 개최, 선수촌과 관광객에게 후쿠시마현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 제공을 공언해왔다. 올림픽이 10개월 남짓 남은 지금 태풍으로 인한 방사능 폐기물 유출과 폭우로 인한 저수지 범람 등으로 인해 방사능으로 추가의 재오염이 발생한 후쿠시마에서의 올림픽 경기와 먹거리 공급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폭우가 몰아치던 밤의 오염수 누출
태풍으로 인한 폭우가 쏟아지던 13일 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원전에서 오염수 누설 경고가 10차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도쿄전력은 빗물로 인한 오작동이라고 말했지만, 오염수의 누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 해양 방류 계획을 밝혀 다시 문제가 되는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수의 경우, 1차 핵종 제거를 거쳐 저장 탱크에 보관 중이다. 그런데 이번에 누설이 의심되는 오염수는 탱크에 보관 중이 아닌, 원전 건물 내부와 오염수 저장 우물에 고여 있던 오염수로 1차 정화 과정조차 거치지 않았다. 경보가 울린 곳 중 하나인 프로세스 주 건물 지하 2층에 고여 있는 물은 시간당 3시버트(㏜)의 높은 방사선량이 측정될 정도로 방사성 물질에 오염되어 있다. 도쿄전력은 오염수 누출이 없었다고 발표했으나 쏟아지는 빗물과 흘러넘친 지하수를 생각하면 오염수 누출은 일어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 방사능 오염수가 발생하는가? 언제나 수습될까?
후쿠시마 원전 1, 2, 3호기가 폭발하면서 녹아내린 핵연료를 식히기 위해 퍼붓는 냉각수와 하루 수백 톤씩 유입되는 지하수가 녹아내린 핵연료와 만나면서 고스란히 방사능 오염수로 변한다. 하루 수백 톤의 방사능 오염수가 매일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도쿄전력은 방사능 오염수는 다핵종제거설비 '알프스(ALPS)'로 안전하게 정화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2018년 도쿄전력 보고서에 따르면 삼중수소(트리튬)만 있다던 정화수에 스트론튬90, 코발트60 등과 같은 또 다른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어 정화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렇게 생성된, 현재 115만 톤의 방사능 오염수가 980여 개의 탱크에 저장돼 있고, 원전 건물과 오염수 저장 우물에도 감당하지 못하는 방사능 오염수가 고여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방사능 오염수는 녹아내린 핵연료를 제거하기 전까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고, 방사능 오염수 유출과 방류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8년이 지났지만, 방사능 오염수, 폐기물 등 새로운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후쿠시마는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지만, 일본 정부는 부흥 후쿠시마를 외치며 올림픽마저 선전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번 태풍으로 인한 방사능 폐기물 유실 역시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방사능 오염을 인정하고 사고 수습을 위한 올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방사능 오염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말고, 일본산 수입식품에 대한 방사능 검사를 강화하고, 원산지 표기를 강화해야 한다. 또한 도쿄올림픽 선수촌과 관광객에게 후쿠시마에서 생산한 식재료를 공급하려는 계획을 저지시키고, 후쿠시마에서 열리는 경기와 성화 봉송을 막아야 한다.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더욱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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