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생명이 위독한 이웃을 위해 무상으로 헌혈한 '소중한 피'가 제약회사 사장의 비자금 마련을 위해 악용돼온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더구나 20년이상 이런 관행이 계속됐지만 대한적십자사,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청 등이 전혀 통제를 하지 않았고, 2000년에는 경찰 수사도 진행됐지만 그 역시 흐지부지돼 그 배경에 강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20여년동안 '시민 피'로 비자금 조성해"**
그동안 의혹으로만 산발적으로 제기돼 온 이같은 사실은 적십자사로부터 혈액 중 혈장만을 따로 뽑아 만든 혈액성분 제제(알부민 주사제)의 원료를 독점적으로 공급받는 국내 2개 제약사 중 1개인 D제약의 전 대표이사 김모씨가 23일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통해 증언함으로써 확인됐다.
D제약은 1970년대 초반부터 대한적십자사로부터 혈액성분 제제인 '알부민 주사제' 위탁 생산을 맡으면서 급성장한 제약회사이다. 1970년대 창립 이래 1998년 8월 부도가 날 때까지 창립자 유모씨가 경영을 맡아왔다.
김씨에 따르면, 전 경영진 유씨는 적십자사로부터 '알부민 주사제' 위탁 생산을 맡은 뒤 시민의 '소중한 피'를 개인의 비자금을 조성하는 데 활용해 왔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시민들이 무상으로 헌혈한 피는 아무 대가 없이 생명이 위독한 환자에게 전해지는 게 아니다.
적십자사는 헌혈을 통해 들어온 1명분의 혈액(전혈, 400ml 기준)을 3만5천3백90원에 각 의료기관에 판매한다. 의료기관은 이를 환자에게 공급한 뒤 구입가격에 5천원을 붙인 4만3백90원을 보험수가 명목으로 받아낸다. 이 혈액을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 적혈구농축액, 신설동결혈장, 혈소판농축액 등으로 분리하면 전체 가격은 7만6천5백20원으로 훌쩍 뛴다. 이 과정에서 국민이 낸 건강보험료가 사용되고, 환자들은 높은 가격으로 피를 구해야 한다.
적십자사는 의료기관에 이렇게 혈액을 제공하는 것과는 별도로 혈액 중 혈장만을 따로 뽑아 녹십자사와 D제약, 2개 제약사에 독점적으로 혈장을 6만6천원(20% 알부민 100㎖)을 받고 공급해왔다.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 산하 혈장분획센터에서 만들어진 이 혈액성분 반(半) 제품은 2개 제약사에서 완제품으로 만들어져 통상 2만2천원을 더 붙인 8만8천원을 받고 공급된다.
김씨는 "D제약의 1998년 기준 매출액 6백억 중에서 3백억이 알부민 주사제 판매로 획득한 것"이라며 "적십자사가 준 특혜로 녹십자사와 D제약이란 사기업이 국민의 피로 엄청난 이득을 얻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다른 약품이 거의 어음으로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알부민 주사제는 전액 현금으로 결제돼 회사 입장에서는 최선의 상품"이라고 덧붙였다.
***교묘한 비자금 만들기**
이렇게 특혜를 받아온 D제약 경영진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20여년 이상 비자금을 조성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그 방법 역시 교묘하다. 통상 적십자사는 제약회사로 공급할 때 손실률을 감안해 3% 정도를 더 얹어준다. 알부민을 병에 넣어 완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무균 여과 용기나 충진기(병에 넣어주는 기계) 내부에 묻어있는 양 등을 미리 감안한다는 얘기다. 여기다 적십자사에서 넘어온 순도 100%의 알부민을 10% 한도 내에서 보정하는 것이 관련 규정상 가능해 5~7% 정도 원액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경우에 D제약은 알부민 원액 1만ℓ를 적십자사 혈액원으로부터 공급을 받으면 20% 알부민 100㎖를 9만7천병을 만들지 않고 더 적은 수의 병을 생산해도 기록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게 된다.
바로 이 '기록되지 않아도 되는 손실분'을 완제품으로 만들어 팔면 그것은 고스란히 회사 경영진의 비자금이 된다. 1998년에 이렇게 만들어진 완제품은 전체 알부민 생산물량인 34만병의 1.6%인 5천4백46병이었고, 이를 계산하면 약 5억원의 비자금이 조성된 셈이다.
시민의 '소중한 피'가 '더러운 돈'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경찰도 비자금 조성 사실 확인, 수사는 흐지부지**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런 사실은 김씨가 당시 대주주 자격으로 1999년에 대표이사에 취임해 그 정황이 포착된 후, 관계자들의 증언과 경찰 수사로 사실이 드러났지만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D제약 오산공장에서 1982년부터 2000년까지 18년간 알부민 완제품 생산 과정 책임자로 일해 오던 곽모씨의 공증을 받은 확인서에서, 곽씨는 "(이렇게 생산된 제품은) 매년 D제약의 경영진의 비자금의 원천이 됐다"고 그 조성 경로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1990년부터 비자금 조성용 제품 출하를 직접 담당해온 정모씨도 역시 공증을 받은 확인서에서, "비자금용 알부민의 경우 거래명세표와 전표 없이 현물만 소송돼 창고에 보관됐다가 당시 영업본부장의 메모에 의해 각 지점 별로 수량이 할당돼 해당 지점에 물량을 출하했다"고 증언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서 2000년에 D제약에 대한 수사를 벌였던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관련 정황을 파악하고도 '내사종결'처리하고 전 경영진 유씨를 지명 수배하는 것으로 수사를 흐지부지 끝낸 것으로 확인돼, 그 배경에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경찰 수사 당시 공장장으로서 비자금 조성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수사를 받은 한 공장장의 경우에는 대주주가 S사로 바뀐 현재의 D제약 대표로 재직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경찰에서 "96년 7월부터 공장장으로 부임했지만, 이전 공장장 시절부터 비자금용 알부민을 생산하고 있어서 이를 중단시킬 수 없었으며 그 수량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적십자사 혈장 확보에 기를 쓰는 이유도 의혹 대상**
D제약의 20여년에 걸친 돈 잔치는 전 경영진 유씨가 회삿돈을 유용해 골프장 건설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일단 제동이 걸렸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터무니없는 일에 대해서 적십자사, 식품의약품안전청, 보건복지부 등 관계 기관이 전혀 통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D제약 전 대표이사 김씨는 "이런 비자금이 개인의 치부, 차명계좌를 통한 D제약 주가 조작 등은 물론 적십자사, 식품의약품안전청, 보건복지부 등 관계기관의 로비 자금으로 사용됐을 게 뻔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적십자사는 혈액제제 원료인 혈장 확보에 기를 쓰고 있다. 적십자사는 수혈용 채혈이 일정 금지된 말라리아 우려지역의 전방 군인에 대해서도 혈장을 따로 뽑아 제약사에 팔기 위해서 단체헌혈을 강행하고 있다. 혈장에는 말라리아균이 발견되지 않으며, 약품 제작과정에서 말라리아균이 모두 죽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주간동아>의 지난 15일자 보도에 따르면,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가 'O형 혈액 재고량 바닥'이란 보도자료를 지난 3월13일 낸 이후, 4일 동안 서울 동부혈액원은 6포병여단(말라리아 주위지역)에 헌혈차와 인력을 투입해 4백50명의 군인에게서 혈장만을 따로 뽑아냈다. 중앙혈액원도 3월15일부터 21일까지 1주일동안 군부대와 각 대학, 고등학교에서 단체헌혈에 나서 수혈용 전혈은 1천5백30명에게 받은 반면, 혈장은 2천6백20명에게서 받아냈다. 병원에서는 피가 없어 환자가 죽어가는데, 적십자사는 '돈벌이용 혈장 확보'에 급급한 셈이다. 김씨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그 배경에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김씨는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국민의 순수한 마음으로 제공된 피를 가지고 장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면서 "적십자사가 비자금이 조성된 경위를 알면서도 묵인할 정도로 '부도덕한 집단'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20여년 동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몰랐다는 것만으로도 임무를 태만하게 한 것이므로 정당한 비판을 받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국민의 공혈로 돈벌이를 하겠다는 생각부터 고쳐먹어야 한다"면서 "우선 녹십자사와 D제약 2개 사기업에 독점적으로 부여된 혈액제제 위탁 생산 자격부터 철회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혈액 사업은 가장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면서 "적십자사가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면 여러 제약회사가 지분을 갖고 시민들이 직접 감시할 수 있는 일종의 공영 회사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김씨는 "외국에서만 20여년 살다 온 내가 우연한 기회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개입돼 이런 증언을 하게 됐지만 나는 의인(義人)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다만 상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런 일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증언의 배경을 밝혔다.
인터뷰는 23일 오전 고양의 김씨의 사무실에서 2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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