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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불한당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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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불한당들의 시대

그림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제1부 이야기의 서막 ⑲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20.자장율사(慈藏律師)의 등장


왕의 시신은 이레 동안 불타올랐다. 덕만공주는 불꽃으로 사라지는 부왕(父王)을 꼼짝도 않고 바라보았다. 바람을 안고 '탁탁'소리를 내며 거세게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에 공주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상기된 얼굴엔 굵은 눈물 자욱이 선명했다. 자장은 왕의 화장(火葬)을 지켜보는 신하들과 승려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약한 모습 보이시면 아니 됩니다. 저들 속에 칠숙과 석품을 따르던 무리들이 있습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볼 것이 온데, 강고함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을 처단할 수 있습니다."

정반왕은 재가 되어 연기와 함께 서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앙상하게 남은 뼈대마저 무너지자 공주는 오열을 참지 못했다. 휘청거리는 공주를 지탱한 것은 자장이 유일했다. 어느 누구도 미륵불로 분장한 공주에게 다가갈 엄두를 못 냈기 때문이다. 그는 공주를 단상에 앉히고 사라져 가는 정반왕을 향해 합장했다. 그리고 잔잔한 목소리로 이와 같이 말했다. 승려들의 염불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 국인들의 소란이 한데 뒤섞였으나, 부왕의 음성이 그랬던 것처럼 공주는 자장의 말을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먼저 도(道)를 세우셔야 합니다. 그 도는 국인들을 위한 애민(愛民)의 도가 아닙니다. 귀족과 왕족, 승려들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도는 여왕을 위한 제왕(帝王)의 도입니다. 당나라의 황제를 보십시오. 아버지를 겁박하고 형과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일개 평민의 삶에서는 금수(禽獸)와도 같은 짓입니다. 그러나, 골육상쟁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정관(貞觀:당 태종의 연호)의 태평성대를 열었습니다. 천가한(天可汗:당 태종)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번영을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저잣거리에는 보화(寶貨)가 넘쳐나고 사방팔방으로 뻗은 대로는 모두 장안(長安)에서 시작되고 장안에서 끝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과 인재들이 당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주변국들이 신국(神國)이라 떠받들고 있습니다. 제왕의 도는 이와 같습니다. 일개인을 구속하는 도(道)와 덕(德)과는 다른 것입니다. 때로는 냉혹하고 비정하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부왕께서 여실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진평왕께서 남긴 언행은 제왕의 도에 한 치 어긋남이 없습니다."

승려들이 허물어진 장작을 뒤척이며 다시 불을 일으켰다. 왕의 시신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덕만공주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자장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부왕께서는 온 세상을 속인 거대한 거짓말을 이루셨습니다. 세뇌된 국인들은 정반왕에서 미륵여왕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호협들이 큰 난동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왕족과 귀족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들의 부귀와 명예는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대대로 물려받은 것임으로 지키고 유지하려는 자들은 반역을 꾀하지 않습니다. 승려들을 이끄는 고덕(高德:덕이 높은 승려)들 또한 신라가 곧 미륵 정토(淨土:불교적 이상향)가 될 것이란 걸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승단(僧團)과 왕권 사이의 결속은 원광법사께서 이미 굳건히 하셨으니, 법사를 하늘같이 떠받드는 승려들은 잠자코 있을 것입니다. 종교가 왕의 편에 서면 임금은 어떤 행위를 해도 위태롭지 않습니다. 종교란 세속의 인간이 감히 도달하기 어려운 높은 정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함부로 세속의 기준으로 왈가왈부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습니다. 법흥왕께서 이를 일찍 간파하시어 불교를 공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는 통치술의 한 방편일 뿐입니다. 제왕은 신앙을 지킬 때도 정치적 이득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왕은 부처를 믿지 않고 다만 이용할 뿐입니다. 제왕은 이 모든 것을 교묘하게 위장하는 뛰어난 기만자이자 위선자이어야 합니다."

자장의 말은 장황하게 계속 이어졌다.

"임금이 선하고 정의롭고자 한다면 비명횡사합니다. 항상 국인들을 속이고 기만하고 그럴듯한 거짓말을 궁리해야 합니다. 여왕이 되시면 부왕께서 하신 것보다 더 강하게 서약하고 맹세하십시오. 때에 맞춰 속일 때를 항상 염두에 두십시오. 그것이 여왕께서 마땅히 따라야 할 부왕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사방에 간자들을 풀어놓으십시오. 동시(東市)와 서시(西市)의 저잣거리에 떠도는 사소한 풍문에도 촉각을 세우십시오. 그래야 국인들을 속일 때와 방법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민심은 천명이 아닙니다. 민심은 갈대와 같아서 바람에 따라 그 형색(形色)을 달리할 뿐, 왕은 다만 권력으로 그 형색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힘입니다. 권력은 정의롭고 선하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월등히 우세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탁월한 기량과 덕을 갖춘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왕이 협잡과 위선을 마다하지 않아야 이유는 그로부터 강한 권력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잠시 말을 끊은 자장은 덕만공주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듣고 있던 공주는 자장의 시선에 얼굴이 더욱 상기되었다. 자장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여왕이 되시면 당분간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혼란의 시대에는 냉소주의가 급속히 퍼지기 마련입니다. 냉소주의자들을 우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익을 준다면 무엇이든 용서할 것입니다. 다만 일부 호협(豪俠:영웅호걸의 의기를 가진 자들로 여왕의 통치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우려됩니다만, 그것은 소승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러니 이제 여왕으로 즉위하시면 됩니다. 그저 웃고 인자한 표정만 지으시면 됩니다. 궂은일은 소승이 감당하겠나이다."


자객에 의해 부모가 비명횡사 당하던 날 밤, 자장은 호협들을 피해 산중으로 도망쳤다. 인적 없는 깊은 산중에 벌거벗은 한 인간이 생존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한 것이었으나, 복수심은 그를 악착같이 살아있게 했다. 부모를 살해한 호협들에게 복수하기 이전에는 굶어 죽을 수도 짐승의 밥이 될 수도 없었다. 자장은 산속에서 혼자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는 밀림 속으로 들어가 가시덤불로 초막을 만들었다. 가시덤불은 짐승들의 습격을 막아주었으나 온몸에 생채기를 냈다. 그는 온종일 앉아서 생활했고 잘 때는 끈으로 머리를 매달았다. 그것은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좌선으로 삼매경(三昧境)에 빠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자, 자장은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를 이루어 냈고 세상의 역사와 삼라만상의 물리(物理)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게 되었다. 자장은 스스로 터득한 수련법을 고골관(枯骨觀)이라 했고, 거처하던 가시덤불 움막을 원녕사(元寧寺)라 불렀다.

자장이 공주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고골관을 통해 깨우친 바였다. 그의 말은 알아들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혼재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었으나, 항상 꾸짖는 듯한 부왕의 말투와는 다르게 부드럽고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부처의 설법과 같이 끝없이 이어지는 자장의 장광설(長廣舌)은 마치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처럼 공주의 상기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더 이상 부왕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덕만공주는 이제 믿고 따라야 할 것은 자장뿐일 것만 같았다.

정반왕은 완전히 전소(全燒)되어 겨우 한 줌 재로 남았다. 황룡사의 승려들이 왕의 유골을 수습했다. 끝까지 부왕의 음성을 고대했던 공주는 초췌한 모습으로 뒤돌아서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카랑하게 맑게 빛나고 있었고, 자장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얼마 후, 비구(比丘) 자장을 율사(律師)로 임명한다는 포고가 있었다. 공주의 이름으로 처음나온 포고문이었다. 율사가 된 자장은 승단(僧團)의 규칙을 바로잡고, 승려들을 감찰하는 승정(僧正)을 각처에서 암행케 했다. 새롭게 승관(僧官)을 설치하여 승정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대덕(大德)으로 이름 높았던 고승들이 하루아침에 오도사문(汚道沙門:계를 범하고도 부끄러움 없이 뻔뻔한 자)이나 단두자(斷頭者:살생 도둑질 음행 등의 죄를 지어 승려의 자격을 잃고 다시는 승려가 될 수 없는 자)들로 내몰려 축출되었다. 이내 승단은 자장을 중심으로 재조직되었다. 그의 일은 주도면밀했고 전광석화처럼 재빨랐다.

그는 공공연하게 이와 같이 말했다.

"원광법사께서 정반왕을 세우셨듯이, 소승이 미륵여왕을 세울 것입니다."

그는 한번 말을 시작하면 짧게 그치지 않았다. 자장은 스스로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이렇게 말했다.

"오오~,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도래(到來)합니다, 이제 곧 도래합니다. 미륵여왕이 다스리는 미륵정토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지금까지 있지 못한 새로운 신라입니다."

자장은 몹시 들떠있었다.



계속...

글 그림 : 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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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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