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일터에 있는 20대 중반 이상의 여성이라면 이런 생각을 한 번은 했을 것이다. 처음엔 '카리스마 뿜뿜' 커리어우먼을 꿈꿨다가도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그게 환상이라는 것쯤은 금방 깨닫는다. 일 참 잘한다 싶은 여자 선배들은 회사를 떠나기 마련이고 결국엔 남자들만 남는다.
그나마 남은 여자 선배들은 40이 넘을 즈음, 둘 중 하나로 낙인 찍혀있다. '성격 이상한 노처녀' 아니면 '민폐 워킹맘'이다. 아등바등 노력하는 모습이 같은 여자로서 짠하다가도 같은 여자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일을 떠넘길 때는 화가난다. 독하게 살아남았다 싶었던 여자 선배가 남자 상사들이랑 오래된 연인이라도 된 듯 묘한 대화를 주고받는 걸 보기라도 하면 혐오스러워진다. 그마저도 중요한 순간엔 번번이 밀려나는걸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내가 품고 있던 열정이나 야망은 사라지고 '현타'가 거하게 몰아친다. 난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 커리어를 쌓을 수 있을까. 답도 없는 질문이 이어진다.
<출근길의 주문>(한겨레출판 펴냄)은 일터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회의와 고민에서 시작한다. 저자 이다혜 작가는 이런 일들이 모두 '일터에서 여성들이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라며 여성들의 '체감 정년'을 갱신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여성의 '체감 정년'은 비슷한 배경의 남성이나 사회가 명시한 것과는 많이 다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대략 30대 중후반부터 '실질적 정년'이 시작된다.
작가는 그런 고민을 안고, 여자라는 이유로 밀려나고 싶지 않은 여성들,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안고 있는 여성들에게 '말', '글', '네트워킹'이라는 정교한 무기를 쥐어주고자 한다. 전작과 방송에서 보여준 사회를 향한 통찰력과 공감을 일으키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이 책은 적나라하다. 일터의 여성들이 겪는 난감한 상황들,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고민들을 작가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여성들에게 유독 가혹한 도덕적 잣대, 업무 외적으로 요구되는 '여성적인' 특징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기울어지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지적한다. 그렇다고 마냥 '그래, 그래. 그만하면 넌 잘하고 있어'라고 위로하지도 않는다. '잔소리'가 이어진다. '의사표현은 분명하게 하라', '웃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웃지 마라', '혼자 참지 마라', '여자들 간의 연대를 강화하라', '사회가 정하는 여성성의 틀에 갇히지 마라' 등등.
여성이 아니라, 그냥 사회생활 선배로서의 조언도 담겨있다. 사회 초년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 대하는 법'도 살며시 알려준다. '공적인 인간관계'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하지 말아야 하는 말, 조심해야 할 감정, 끊어야 하는 관계와 '느슨함'의 중요함 등. 이런 것들은 결국 타인을 존중하면서도 '나'를 존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저자의 이런 조언은 사실 뻔하다. 웃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웃지 말고 의사표현 분명하게 하고 이런 거 누가 모르나. 다 안다. 다만 '여성이 친절하고 상냥하지 않을 때' 가해지는 공격과 불이익을 직·간접적인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해야 하는 것, 중요하다는 거 안다. 그런데 왜 못하나. 여성들의 연대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사회적 배경이나 구조적 맥락에 대한 고민은 뒤로 한 채 '우리가 잘하자'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어떤 면에선 '꼰대' 같다. 물론 막연하게 느끼던 것을 정제된 언어로 가시화했다는 점에선 의미있다.
아쉬운 점은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면 어땠을까 싶은 점이다. 이 지점에서는 페미니즘 진영 내 세대 차이를 실감할 수도 있다. 저자 또한 "시대가 변하면 윗세대의 조언이 아랫세대에게 쓸모없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조언도 시대착오적이고 쓸모없어질 때가 올 거라고 말한다. 어쩌면 저자가 진정 바라는 것 아닐까 싶다.
이상과 다른 현실에 고민하는 사회 초년생 뿐 아니라 좀 더 현실에 몸담고 있는 실무진을 향해서도 조언은 이어진다. 이 책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이 부분이다. 저자가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인 것 같다. '30대 중반이 지난 여성이 이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재취업은 어려울 것 같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려는데 어떻게 해야할 지 너무 막막해요'라는 물음에 현실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앞서간 선배의 꼼꼼한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저자는 "그러니 버티자"고 말한다. 우리는 수많은 공격에 노출돼 있는 여성이고, 시간이 갈수록 불리하게 기울어지는 운동장은 우리로 하여금 도망가고 싶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버티고 버텨서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남아야 뒤이어 다음 세대 여성들도 살아남을 수 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출근길의 주문>이지만 퇴근 후에도 이어질 우리의 일상 속 수많은 상황에 저자의 조언이 문득문득 생각날 것이다.
저자는 "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우리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또 "누구 한 사람만 앞에 있어도 그 길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모든 일터의 여성에게 "계속 있어주세요. 길을 만들어주세요"라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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