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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 산골마다 불교유적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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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수려한 산골마다 불교유적 찬란하다

2019년 11월 고을학교는 <홍천고을>

깊은 가을, 11월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72강은 변방의 전형적인 산골짜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말여초의 찬란한 불교유적이 즐비한 홍천고을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의 공작산 아래 자리잡은 수타사Ⓒ홍천군

고을학교 제72강은 2019년 11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2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남춘천IC-서면어유포리(노동서원)·서면모곡리(남궁억유적지)-홍천읍희망리(사사자석탑/삼층석탑/당간지주/홍천향교)-홍천읍연봉리(홍천철비)-화촌면군업리(군업리지석묘군)-내촌면물걸리(물걸리사지/동창기미만세공원/동창보수로)-서석면풍암리(동학혁명전적지/팔백동학군의총/김학균가옥)-동면덕치리(수타사)-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에 점심식사 겸 뒤풀이가 있습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홍천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2강 답사지인 <홍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산이 높아 골이 깊은 고을
홍천은 산지가 전체 면적의 87%를 차지하는 내륙 산간지대로, 평야의 발달은 미약한 편이나 각 수계를 따라 소규모의 하안단구와 산록완사면이 형성되어 이곳에 자연부락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동북부에 1,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연이어 있고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산줄기 사이에서 발원한 많은 물줄기들이 모두 청평호와 소양호로 흘러듭니다.

산줄기는 북쪽으로 약수산(1,306m), 가칠봉(1,240m), 가마봉(1,191m), 응복산(1,360m), 구룡덕봉(1,388m)이, 동쪽으로 오대산(1,563m), 상왕봉(1,493m), 두로봉(1,422m)이, 남쪽으로 계방산(1,577m), 운무산(980m), 수리봉(960m), 발교산(998m), 오음산(930m)이, 서쪽으로 장락산(627m), 나산(628m) 등이 이어져 있습니다.

물줄기는 홍천강이 내촌천, 장남천, 군업천, 덕치천, 수성천, 어룡천, 성전천, 굴지천 등의 여러 지류를 받아 안고 군의 중앙을 관통하며 서쪽으로 흘러 청평호로 흘러들고 자운천과 계방천은 동쪽으로 흘러 내린천이 되어 다시 서쪽으로 흘러 소양호에 안깁니다.

홍천군은 동쪽은 양양군, 서쪽은 경기도 양평군과 가평군, 남쪽은 평창군과 횡성군, 북쪽은 춘천시와 인제군과 접하고 있습니다.

홍천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에 속해 벌력천현(伐力川縣)이라 불렀다가 757년(경덕왕 16) 녹효현(綠驍縣)으로 개칭되었고 삭주의 영현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1018년(현종 9) 홍천현으로 개칭되었으며, 춘주[春川]의 속현으로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다가 1143년(인종 21)에 비로소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홍천현이라 하고 감무가 파견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수령직(守令職) 강화책의 일환으로 감무를 현감으로 고치면서부터 현감이 설치되었습니다. 1894년(고종 31) 전국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홍천지방에서도 농민항쟁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당시 강원지역의 농민군 총지휘자는 대접주 차기석이었고, 홍천지방의 접주는 심상현이었습니다.

▲희망리로 이전된 괘석리사사자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4마리의 돌사자가 받치고 있어 사사자탑이라 부른다.Ⓒ홍천군

동학농민군 총지휘자-강원 차기석, 홍천 심상현
홍천현감의 보고에 의하면 동학 수령 차기석이 접주 박종백과 더불어 수백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홍천의 물걸리를 습격했다고 하며 또 내면과 서석면 일대는 동학농민군의 최후의 항전지로서 수천 명이 집결하여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참패했습니다. 이 때 농민군의 사상자가 8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1895년에는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춘천부 홍천군이 되어 9개 면을 관할하였고 다음해 전국에 13도제가 실시될 때 강원도 홍천군으로 개편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군내에서는 천도교도와 기독교도가 공동으로 홍천읍, 동면, 내촌면 등지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35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분지리가 서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광복과 더불어 38도선 이남의 남면, 내면, 기린면 등이 홍천군에 편입됨으로써 총 12개 면의 행정구역을 이루었습니다. 1963년 홍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홍천에는 선사시대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군업리 지석묘군(君業里 支石墓群)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두 16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고인돌 주변에서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어 이 지역에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홍천의 관방유적으로는 봉화산에 조선 초기의 희망리 봉수대가 있고 산성은 홍천읍의 희망리성지, 대미산성, 검진리성지, 동면의 성수리성지, 덕치리성지, 월운리성지 등이 있습니다.

▲풍암리의 동학혁명군전적지Ⓒ한국관광공사

유교문화재와 고가, 비각, 사적들 즐비
유교문화재는 홍천읍 희망리의 홍천향교와 홍천철비, 화촌면 성산리에 박영철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화성단(華城壇), 서면 어유포리에 노동서원이 있고, 고가로는 화촌면 군업리에 아양정(峨洋亭), 서석면 풍암리에 김학균 가옥이 있으며, 비각으로는 화촌면 외삼포리에 완산이씨열녀각, 3·1운동 때 내촌면 물걸리에서 순국한 8열사의 얼을 추모하는 팔렬각, 서석면 청량리에 정규시효자비, 동면 성수리에 순국삼일열사비 등이 있습니다. 또 사적으로는 서석면의 풍암리동학혁명전적지와 팔백동학군의총, 동면 속초리에 한말 의병장 민긍호의 격전지, 수하리에 동창보수로 및 암각명, 서면 모곡리에 남궁억묘역이 있습니다.

홍천향교(洪川鄕校)는 1531년(중종 26)에 세웠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고, 이후 몇 차례 자리가 바뀌었다가 1635년(인조 13)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습니다.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관리소 등 5개동과 문루인 석회루와 내삼문 등입니다.

홍천철비(洪川鐵碑)는 홍천현감을 지낸 원만춘의 선정비로, 1661년(현종 2) 4월에 홍천 사람들이 건립하였습니다. 앞면 중앙에는 세로로 비의 이름을 새겨두고, 양 옆으로 두 줄씩 비문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으며 뒷면에는 이 비를 만든 장인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홍천군청 앞 도로변에 철비와 함께 모두 17개의 선정비가 있었는데, 이 비들은 현재 홍천읍 연봉리로 이전되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4기의 철비
대부분 비석하면 석비를 생각합니다만 석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모가 심해서 철비가 등장하게 됩니다. 철비는 1600년대부터 1900년 초까지 만들어졌는데 전국에 300여 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파괴, 훼손되어 지금은 전국에 50여 기 정도 남아 있습니다. 이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홍천철비, 진도 칠천리 학계철비, 삼척 역둔리 철비, 밀양 삼랑진 후조창유지 비석군 등 4곳입니다.

노동서원(魯東書院)은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원조인 최충과 아들 최유선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최충의 12대 손인 최변이 이곳에 낙향하여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지었다가 후에 노동서원이라 개칭하였습니다. 서원에 봉안된 두 분의 영정은 1628년(영조 24)의 거작으로 동산문화재로 각각 등록되었으며 제기 일체가 또한 문화재로 등록되어 현재 서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정전과 동재, 서재, 내삼문과 외삼문이 남아 있고 정전에는 문헌(文憲), 문화(文和) 두 분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원래 북방면 노일리에 있던 것을 1932년에 이곳으로 옮겼으며 한국전쟁에 소실된 동재와 서재 일부를 개축하고 수차에 걸쳐 중수하였습니다.

김학균 가옥(金學均 家屋)은 안채와 사랑채 등으로 이루어진 ㄱ자형 주택으로, 1913년 서석의 부호이던 엄근호가 지어 45년간 살던 집입니다. 안채의 평면은 부엌을 중심으로 앞면에는 부엌광을 배치하고, 뒷면에 툇마루가 있는 안방을 두고 옆으로 대청과 건넌방을 들였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출입 대문을 분리하였고 그 사이 좁은 안마당에도 담장을 설치하여 남녀가 쓰는 공간을 따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는 초가집이었던 것을 2004년 함석기와로 교체하였습니다.

풍암리 동학혁명군전적지(豊岩里 東學革命軍戰蹟地)는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운동이 일어나자 홍천지방에서도 농민군이 관아를 공격하고자 산에서 내려와 장야촌까지 진군하였으나, 관군 총사령관 맹영재와 싸워 동학군 30여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패한 동학군은 풍암리에 집결하여 최후의 항전지인 자작고개에서 김숙현을 중심으로 관군과 싸웠으나 끝내 패하였고 800여 명의 혁명군이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1976년 자작고개에서 지역 주민들에 의해 유해 더미가 발견되어 800의총을 조성하였습니다.

동창마을의 동창만세운동
동창만세운동은 1919년 4월3일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려고 분연히 일어난 항일구국운동입니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은 동창마을에서 마방을 운영하던 김덕원 등 팔열사이며 내촌면 동창마을을 시작으로 화촌면, 서석면, 내면, 기린면에서 수천 군중이 모여 자주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왜경의 무차별 총격으로 8명이 사망했으며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만세운동의 의미를 후손들에게 알리고 열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서 순직한 8열사를 추모하는 팔렬각을 건립하였고 이후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자 기미만세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동창보수로(東倉洑水路)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쌓아 만든 보로서, 서석면 수하리에서 내촌면 물걸리까지 약 1㎞ 정도의 물길입니다. 물길을 끼고 있는 산의 낭떠러지 바위면에 ‘보주 김군보(洑主 金君甫)’라고 새겨져 있는데, 김군보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직접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0여 년 전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이 보는 내촌면 물걸리 일대의 개척과 관련된 농경유적으로, 조선 후기의 수리 및 관개시설의 형태를 비교적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노동서원(魯東書院)은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원조인 최충과 아들 최유선을 봉안하고 있다.Ⓒ한국관광공사

남궁억의 활동유적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 유적지에는 기념관과 예배당 및 묘소가 있습니다.

한서교회는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남궁억이 세운 감리교회로 원래의 이름은 지명을 딴 모곡교회였습니다. 1915년 남감리회 본처 선교사로 임명받은 남궁억은 1918년 강원도 홍천군 모곡(보리울)으로 낙향하여 그 다음해 예배당과 학교 부지 5,200평을 매입하고, 10칸 기와예배당을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모곡교회의 시작입니다.

이와 함께 모곡서당을 설립하였고, 1922년에는 사립 모곡학교를 개교하여 근대교육에도 앞장서서 1925년 모곡학교는 6년제 사립 모곡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무궁화 묘포를 경영하여 무궁화 보급에도 앞장섰습니다. 특히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등 100여 곡의 애국가요를 직접 지어 보급하였으며, <동사략> <조선니약이> 전5권 등을 저술하여 비밀리에 보급하면서 학생들에게 한국 역사를 알렸습니다. 1933년 독립운동 비밀결사대인 ‘십자당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사립 모곡학교는 폐교되었고, 모곡교회도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모진 일본경찰의 고문을 받아 병든 남궁억은 그 여독(餘毒)으로 1939년 77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남궁억 묘역에는 둥글게 호석이 둘려져 있고, 봉분 앞에는 상석이, 그 오른쪽에 묘비가, 앞쪽에 망주석 1쌍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볼 만한 불교문화재들
불교문화재는 두촌면 괘석리의 괘석리삼층석탑, 희망리로 이전된 괘석리사사자삼층석탑과 홍천읍 희망리의 희망리삼층석탑, 희망리당간지주, 내촌면의 물걸리사지에 남아있는 물걸리석조여래좌상, 물걸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 물걸리불대좌, 물걸리불대좌 및 광배, 물걸리삼층석탑, 수타사에 남아있는 소조사천왕상, 영산회상도, 삼층석탑, 홍온당부도, 대적광전, 서곡대사사리탑비, 월인석보 권17·18, 봉황문, 흥회루, 동종 등이 있습니다.

홍천의 물걸리, 괘석리, 희망리 세 곳 절터에는 불교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물걸리사지(物傑里寺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절터에 남아 있는 많은 유물들로 보아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점, 고려시대 철불파편 4점, 철쇄파편 2점, 암막새 4점, 수키와 조각 6점, 암키와 조각 6점, 청자 조각 4점, 토기 조각 5점, 조선시대 백자 조각 7점이 출토되었습니다. 문화재로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석조대좌(보물 제543호),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삼층석탑(보물 제545호)이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절터 일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금당지로 추정되는 지역을 확인하였습니다.

물걸리석조여래좌상은 얼굴은 마멸이 심해 세부표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고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것 같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는 표현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깨는 둥글지만 두껍고 투박하게 보이고, 상체는 왜소한 편이어서 당당한 양감이 사라져버린 모습입니다. 대좌는 8각형으로 하대에는 각 면마다 무늬가 있고, 향로와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중대는 8각의 각 면에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고, 상대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장식성이 강조되는 9세기 중엽 이후의 전형적인 대좌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걸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크게 솟아 있습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긴장감이나 탄력적인 모습이 사라진 채 다소 투박하고 무겁게 늘어진 모습입니다. 손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대좌는 8각 연화대좌로 상대, 하대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에는 부처에게 공양을 드리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향로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물걸리석조대좌는 불상은 없어지고 광배와 대좌만이 남아 있는데 대좌는 거의 완전한 형태입니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구분이 뚜렷한데 현재 머리광배 부분은 없어졌으며, 안쪽에는 덩굴무늬를,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표현하였습니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 대좌로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각이 매우 세련된 대좌는 물걸리에 보존되어 있는 비로자나불좌상, 석조여래좌상 등과 같은 절터에서 발견된 점과 조각수법 등에서 볼 때 다른 불상과 비슷한 시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는 완전한 배(舟) 모양의 광배 가운데에 연꽃무늬와 덩굴무늬가 새겨지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모양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윗부분과 좌우 등 9곳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는데 각기 손 모양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광배를 받치고 있는 대좌는 3단으로 구성된 8각 모양입니다. 광배 및 대좌의 양식이 9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것들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물걸리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습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겼고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상륜부의 머리장식은 없어지고 이를 받쳐주는 노반만 남아있습니다. 기단 각 면의 가운데 기둥이 하나로 줄어든 것이라든지, 3층에서의 지붕돌받침이 4단으로 줄어 아래층과의 조화를 못 이룬 것으로 보아 시대가 조금 떨어지는 9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입니다.

괘석리사사자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4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사사자탑이라 부릅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조각이 장식되어 있고 위층 기단에는 각 모서리에 돌사자 1마리씩을 두어 넓적한 윗돌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으며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습니다. 기단에서 보이는 안상 조각수법과 돌사자, 연꽃받침 및 지붕돌의 3단 받침 등으로 볼 때 고려후기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괘석리삼층석탑은 단층 기단의 3층석탑으로 탑신부는 1층 몸돌만 한 돌로 되어있고 그 위는 1층 지붕돌과 2층 몸돌, 2층 지붕돌과 3층 몸돌, 3층 지붕돌과 꼭대기의 머리장식 받침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두꺼운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고 옥개받침이 3단과 2단으로 일정하지 않으며, 추녀선이 수평이 아닌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고려시대 중기 이후의 석탑양식으로 추정됩니다.

희망리당간지주는 특별한 장식 없이 소박하며, 중간 아래로 내려오면서 조금 굵어졌고, 밑 부분에 이르러는 더욱 굵어진 모습입니다. 인근 홍천군의회 옆에 위치한 희망리삼층석탑과 관련지어 볼 때, 거의 같은 시기인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희망리삼층석탑은 시멘트로 다져진 높은 바닥돌 위에 널찍한 돌 2장이 놓여 있고 그 위로 기단과 탑신부가 있습니다. 기단 가운데 돌의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가운데에도 기둥조각을 하였습니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탑신에 비해 기단부가 너무 크게 조성되어 비례가 맞지 않아 기형의 느낌이 드는데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공작이 날개 펼친 모습의 공작산에 자리잡은 수타사
수타사는 708년(성덕왕 7)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산세가 아름다운 우적산(牛跡山)에 세워져 일월사(日月寺)라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원효대사는 이미 686년에 입적했으니 창건자 아니면 창건연대에 잘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타교를 건너기 직전 왼쪽으로 올라보면 남향의 꽤 너른 터가 눈에 띄는데 여기가 곧 일월사터입니다. 창건 이후 영서지방의 명찰로 꼽히면서 고려 때까지는 선수행 도량으로 번창해온 절터에 지금은 앙증맞은 삼층석탑 1기만이 홀로 서 있습니다.

일월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겨짓고 절 이름도 수타사(水墮寺)로 바꾼 것은 1568년(선조 2)입니다. 공작이 본디 우리나라엔 없던 새이고 보면 공작산이란 이름도 이 무렵에 붙여진 게 아닌가 추측됩니다. 절터는 공작이 알을 품은 ‘공작포란지지’(孔雀抱卵之地) 형국이고, 절을 에워싼 주변으로 동쪽은 공작이 나래를 펴고 솟아오르는 듯한 ‘동용공작’(東聳孔雀), 서쪽은 소가 내달리는 듯하다는 ‘서치우적’(西馳牛迹), 남쪽으론 용이 승천하는 듯하다는 ‘남횡비룡’(南橫飛龍), 북쪽으론 용의 형상을 닮은 못이 유유히 넘쳐흘러 ‘북류용담’(北流龍潭)으로 묘사되는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타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렸고, 이후 40여 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636년(인조 14)에 공잠대사(工岑大師)가 법당을 지으면서 중창이 시작되었고, 그 뒤부터 차차 가람의 면모가 갖춰지게 됩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 흥회루,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는데, 오른쪽 마당 끝으로 썩 나앉은 선원을 제하고는 모두가 예스런 단출한 집입니다. 삼층석탑, 홍우당 부도, 봉황문, 사천왕상, 법고 등이 있습니다.

수타사동종은 사인비구가 만든 종 가운데 문경 김룡사동종과 함께 완숙미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강희9년(康熙九年 1670)에 공작산(孔雀山) 수타사(水陀寺) 종으로 만들었다”는 내용과 시주자 명단을 새긴 양각명문이 주회(周回)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수타사(壽陀寺)’의 명칭이 조선시대에는 ‘수타사(水陀寺)’로 썼다는 것과 정확한 종의 주조연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인비구의 동종들
사인비구(思印比丘)는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는데 현재 그의 작품 8구(포항 보경사 서운암동종, 문경 김룡사동종, 홍천 수타사동종, 안성 청룡사동종, 서울 화계사동종, 통도사동종, 의왕 청계사동종, 강화동종)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습니다. 원래는 강화동종(1711년에 제작)만이 보물 제11호로 지정되었으나, 이후 사인비구의 활동과 작품 양식에 대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나머지 7구를 함께 묶어 보물 제11-1~8호로 일괄 지정되었습니다.

수타사사천왕상의 복장 부분에서 발견된 <월인석보> 권17, 권18은 세조 때 처음 간행된 초간본으로 권17은 <월인천강지곡> 제311장에서 제317장까지이며 권18은 제318장에서 제324장까지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월인석보(月印釋譜)>는 세조가 1457년(세조 3)에 왕세자였던 도원군이 죽자 이를 애통히 여겨 부왕과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근 2년 동안에 걸쳐 증보, 수정하여 1459년(세조 5)에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을 설명부분으로 하여 합편하여 간행하였습니다. 세조의 명으로 신미, 수미, 설준, 홍준, 효운, 지해, 해초, 사지, 학열, 학조 등의 고승과 유학자인 김수온 등 11명이 편찬에 종사하였는데 이들은 당대의 불학을 대표하는 선지식이었습니다.

<월인석보> 편찬은 세종 말엽에서 세조 초엽까지 양 대에 걸친 약 13년 동안에 이룩된 사업으로, 석가일대기의 결정판일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이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언해서이며, 당시의 글자나 말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어 국어사상 매우 귀중한 문헌입니다. 원본이 완전히 전하지 않아 당초 몇 권으로 되어 있었는지 명확하지 못하나, 30권 이내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초간본 10권(권1·2·7·8·9·10·13·14·17·18) 8책과 중간본 4권(권21·22·23·25) 4책이 보물 제745호로 지정되었으며, 초간본 2권(권11·12)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11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도자재단 대표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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