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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물은 꼭 끓여 먹어야 한다?

[함께 사는 길] 믿고 마시는 수돗물을 위해·①

"뮌헨에선 임산부에게도 수돗물을 권해요."

지난 6월 독일에서 50여 년을 거주한 임혜지 박사가 자택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받은 수돗물을 필자에게 권하며 한 말이다. 독일에서 건축학 박사학위를 딴 임 박사는 건축학 분야 외에 4대강사업 등 물 문제와 관련해 독일과 한국 상황을 비교분석한 글을 여러 차례 연재했다. 꼼꼼한 성격답게 자신과 가족들이 마시는 물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그는 "수돗물이 더 깨끗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미네랄 같은 게 더 많기 때문에 시에서 적극 권장하고 있다"며 "독일 사람들도 수돗물에 대한 믿음이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음식점에선 유리병이나 와인병에 담긴 '탭 워터(Tap Water)', 즉 수돗물이 제공된다. 거의 모든 식당에서 정수기 물을 주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함께사는길

수돗물 직접 음용률 7.2퍼센트


지난 5~6월 인천시 등에서 발생한 수돗물 녹물 사태로 수돗물 신뢰도가 흔들린다는 평가다. 원래 낮은 신뢰도가 이번 사태로 더 낮아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인천 수돗물 녹물 사태가 운영 미숙에 따른 인재라 평가되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수돗물 생산 시스템과 품질은 유럽연합(EU), 미국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와 비교했을 때 결코 뒤지지 않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세계보건기구(WHO)의 166개 기준뿐만 아니라 국내 수질 기준이 더 깐깐하기 때문에 UN 등 국제기구와 해외 전문기관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수돗물 소비자인 국민 인식은 그리 높지 않은 게 현실이다. 2017년 수돗물시민네트워크 등의 자료에 따르면, 수돗물 직접 음용 비율은 7.2퍼센트, 끓여서 먹는 간접 음용 비율과 합치면 49.9퍼센트다. 그나마 2005년 환경부 조사에서 확인된 직접 음용률 1.7퍼센트에 비하면 많이 상승한 결과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선진국 직접 음용률 50퍼센트, 직·간접 음용률 70~80퍼센트인 상황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낮다. 우리나라 수돗물 품질은 세계적이지만, 그에 대한 인식이 낮은 건 무엇 때문일까? 또 이처럼 수돗물이 신뢰받지 못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수돗물 신뢰도 하락의 시작


여러 원인이 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잇달아 터진 수질 오염 사고를 수돗물 신뢰도 하락의 직·간접적 원인으로 본다. 구체적으로 1989년 수돗물에서 기준을 초과한 중금속이 검출돼 논란을 빚었고, 1990년엔 염소 소독 과정에서 생성되는 총트리할로메탄이라는 발암물질이 기준치를 초과해 파동이 일었다.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낙동강 페놀 유출에 따른 악취와 건강 영향 사건은 국민적 분노를 야기했고 수돗물 인식 저하에 결정타로 작용했다. 당시 한 환경단체는 1950년 이후 발생한 대한민국 10대 환경 사건 중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을 1위로 선정할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정수기 판매가 보편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큰 실수는 굵은 밧줄처럼 여러 겹의 섬유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이를 과학적으로 풀어낸 것이 '하인리히 법칙'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하인리히 법칙은 1:29:300으로 설명된다. 1931년 미국 산업 안전 분야 전문가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이란 책에서 "하나의 대형사고 전엔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조들이 반드시 나타난다"라고 지적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반 발생한 우리나라 수질오염 사건도 하인리히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앞선 시기부터 수많은 사고와 징조가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근대 정수시설이 도입된 건 1908년 9월 1일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뚝도정수장이 개통되면서부터다. 하지만 인구에 비해 상수도 확충은 더디게 진행됐다. 1945년 해방 직후 서울 인구는 110만 명으로 증가했지만, 수돗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 만성적 수돗물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현상은 한국전쟁 이후 더욱 심화됐다. 전쟁 중 서울 정수장 30~90퍼센트, 지하에 매설된 송배수관 5~10퍼센트, 펌프장 60~80퍼센트, 통신 시설의 90퍼센트가 파손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도시 인구 유입은 계속됐다. 1950년대 말부터 서울은 200만 명을 넘어섰고, 1970년대 경제성장은 이농 현상을 부추겨 1980년대 후반 1000만 명을 돌파했다. 1960~1970년대 청계천 등 판자촌엔 아예 수돗물 공급시설이 없어 오염된 하천 옆 공동우물을 사용했다. 수돗물이 공급되는 지역이라 해도 1970년대까지 물 수요가 증가하는 여름철엔 수돗물 공급이 중단되는 '수돗물 대란'이 일상사였다. 1980년대부터 상수도 시설이 90퍼센트까지 확충해 현재는 거의 100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정책적으로 이전까지 공급량 확보에 치중했다면 1990년대부턴 수돗물 품질 개선에 주력해 현재는 고품질 수돗물을 생산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돗물 불만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 한국 최초로 근대 정수시설이 도입된 서울 뚝섬 정수장. ⓒ함께사는길(이성수)

공급량 확보했지만 원수 수질은?

서울 한강은 1950년대까지 겨울철 식용 얼음을 채취하고, 1960년대 초반까지 현재 광진교 부근에서 얼음에 구멍을 뚫고 식수로 이용했을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상황은 악화됐다. 인구는 폭증했지만, 하수처리시설이 없었다. 1969년 구의 수원지 부근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은 20.3ppm, 뚝도 부근 24.2ppm, 보광동수원지 부근 34.9ppm, 노량지수원지 부근 30.7ppm으로 하류로 내려갈수록 수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수인성 질병을 일으키는 대장균과 같은 미생물도 1970년대 후반 국제 기준치의 40배가 넘는 수치가 검출되기도 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수치였다.

수질 악화에 따라 1970년대부턴 기형 물고기 논란도 발생했다. 1976년에는 한강 하류 행주산성 부근에서 척추가 굽은 기형 잉어가 잡혔는데, 중금속에 의한 선천적 기형이란 전문가 분석이 뒤따랐다. 1979년에는 한강 상류인 뚝섬유원지 부근에서 척추가 'S'자로 굽은 물고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1980년대까지 이런 보도가 이어졌다. 한강에서 벌어진 수질 악화의 여러 징후와 증거는 곧바로 수돗물 인식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약 냄새가 나서 구역질이 나고 물을 끓여 먹게 됐다"는 반응이 대표적이다. 이는 수인성 질병 예방을 위해 염소 투입을 과도하게 늘리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1977년 조사에 따르면, 당시 수돗물을 직접 음용한다는 비율은 11퍼센트에 그쳤다. 이때부터 정수기 광고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일부 부유층에선 염소 냄새 제거를 위해 외국 제품을 본뜬 액티브카본(활성탄소)과 같은 소형 필터를 사용하기도 했다. 1980년대엔 무허가 정수기 업체가 난립하고 외국산 정수기 수입 크게 증가했다. 서울 시내 약수터 이용률이 증가하더니, 1989년부터 수질 사고가 터졌을 때는 수백 미터 줄을 서야 겨우 뜰 수 있는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관습화된 수돗물 불신

이러한 현상들은 수돗물 신뢰도가 1970~ 1980년대 대한민국 경제가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준다. 다시 말해 경제 성장을 위해 강이라고 하는 자연환경을 훼손하고 희생시킨 결과 시민의 공공재이자 공공 서비스로서 수돗물 신뢰도가 저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신뢰 기반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앞서 언급한 대형 수질 오염 사고는 결정타로 작용했다. 수돗물 신뢰도 저하에는 먹는 샘물과 정수기 업체가 상업적 목적을 위해 수돗물 불신을 더욱 조장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

수돗물 신뢰도 저하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연구들이 많이 있다. 그 중 "어렸을 적부터 수돗물을 끓여 먹어야 한다는 관습적 익숙함"을 원인으로 꼽는 분석도 있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그의 저서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사람들은 꺼리는 음식에 대해 숭배하거나 혐오한다"라고 분석한다. 인도에서 암소가 숭배되고, 이슬람권에서 돼지가 혐오되는 건 사회적, 역사적, 생태적 특징이 반영된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나라 수돗물 신뢰도가 낮아진 이유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수돗물이 제대로 대접받는 길

다만, 수돗물 불신이 시작된 이후 30~40년 동안 우리나라 환경 의식과 관련 제도,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성숙했다. 당장 상수원으로 쓰는 강의 수질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됐고, 국제사회가 인정할 정도로 고품질 수돗물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위험사회>의 저자인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고,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다"라고 했다. 결국 수돗물 신뢰도 향상은 수돗물에 대한 사회적 합리성과 과학적 합리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제도와 인식이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민들은 수돗물에 대해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하고, 행정기관은 시민들의 인식을 수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수돗물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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