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처분의 추억: 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
한국에서는 2003년부터 2017년까지 약 7000만 마리의 닭과 오리를 비롯한 가금류가 매몰처분되었다. 그중에서도 2016년 11월부터 2017년에 1월 사이에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로만 약 3000만 마리의 닭과 오리가 땅에 묻혔는데, AI가 산란계에 주로 발생하면서 그 충격이 더했다. 치킨이야 좀 안 먹고 지낼 수 있다지만 계란만큼은 그럴 수가 없는 식품이다. 당시 사람들은 속절없이 매몰처리되는 닭과 병아리를 보는 것을 힘들어했지만, 한판에 4000원 내외로 밥상을 수호하던 계란이 졸지에 1만 원까지 치솟으면서 받은 충격도 컸다.
2000년부터 2015년까지 구제역으로 매몰된 대가축은 387만여 두수에 이른다. 구제역이 창궐한 2010년 겨울부터 2011년 초봄까지 한 계절에만 347만 마리가 죽어 나갔다. 대가축인 돼지와 소의 살풍경은 가금류보다 압도적인 스펙터클이었다. 냉혹한 말이지만 이렇게 많이 '죽여보았기' 때문에 현장에는 경험이 쌓이고 매뉴얼이라는 것이 생긴다. 가축전염병에 따른 '긴급행동지침'의 규준은 세계동물보건기구(OIE)의 지침에 준한다. 한국보다 먼저 대량생산 체제의 축산업에 나서고 가축질병에 대응해본 국가의 경험이 녹아 있는 매뉴얼이기도 하다. 이번 아프리카돼지열병(ASF)에 대한 대응도 결국 이전의 AI와 구제역의 매몰처분 경험에 빚지고 있다.
'공장식 축산'으로 표상되는 축산업에 대해 환경운동 진영, 특히 동물권 운동 진영의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AI와 구제역 발생 때였다. 병에 걸리지 않은 가축까지 매몰하는 예방적 살처분에 대한 문제제기가 주를 이루었고, 인도적 살처분에 대한 지적도 많았다. 가축들의 의식이 완전히 소실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땅에 묻히는 장면들이 SNS를 타고 공유되면서 동물권 문제를 공론화했다. 막상 매몰처분 현장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대량의 가축을 매몰하다 보니, '인도적 살처분' 지침은 지켜지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축산업이란 가축을 기르는 일인 동시에 죽이는 일이기도 하다. AI나 구제역만큼은 아니어도 다양한 가축 질병으로 인한 살처분은 늘 있어왔다.
예방 백신도 치료법도 없어 돼지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북한 지역에 발생한 때가 지난 늦봄이다. 이는 한반도에 ASF바이러스가 들어왔다는 뜻이므로 양돈생산자들은 차단방역에 힘써 달라는 요청을 공격적으로 줄기차게 해왔다. 공격적 방역에는 야생 멧돼지 살처분도 포함된다. 사람에게는 국경이 있지만 멧돼지에게는 국경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휴전선이 멧돼지 유입을 막아준다는 공허한 대답뿐이었다. 결국 폐사된 멧돼지에서 ASF바이러스가 연이어 발견되면서 이제야 멧돼지 포획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가축의 주무부처는 농식품부지만 야생동물의 소관은 환경부다. 야생동물을 보호해야 할 환경부가 '죽이는 일'에 나서기는 퍽 난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의 분노도 바로 여기에 있다. 농민보다 멧돼지가 중요하냐는 것이다. 멧돼지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의 '원흉'이기도 하지만, 꼭 그뿐 아니라도 멧돼지로 인한 고통은 그동안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심에 출몰하는 멧돼지는 단신 뉴스거리지만 농촌에서는 일상적인 고통이다. 여성 농민들이 혼자 밭을 맬 때 가장 무서운 존재가 멧돼지다. 성인 남성보다 몸집이 훨씬 큰 성돈 멧돼지는 공포 그 자체다. 무엇보다 농작물 피해의 주범이기도 하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는 물론 과수의 최대 포식자인데, 과일만 따 먹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몸을 부딪쳐가며 가지를 부러뜨려 과일을 실컷 먹고 사라지곤 한다. 작은 새끼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어미 노릇을 하는 것이다. 논도 멧돼지의 주요 놀이터다. 본능적으로 진흙 목욕을 좋아하는 돼지들에게 여름에 물 찬 논은 최적의 목욕탕이다. 벼가 태풍에 눌리면 세우기라도 하지만 멧돼지에 짓이겨지면 구제할 방법도 없다는 것이 농민들의 하소연이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서식지가 파괴되어 야생동물들은 그저 식량을 구하러 내려올 뿐이라는, '생태적으로 매우 옳은 분석'도 농촌에서는 한갓진 말로 들릴 뿐이다. 멧돼지가 먹거리를 찾아 내려오는 민가가 주로 농가이고 생계를 짓밟히는 이들도 농민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멧돼지 보호구역을 지정해야 한다는 대안 등이 제시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죽여보지 않았다
가축전염병의 근본 문제를 공장식 밀집사육으로 지적하곤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기도 하다. 고령화와 경제적인 문제로 농민들은 해마다 줄어든다. 그런데 전체 가축의 사육 두수는 지난 5년간 축산통계를 보면 크게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는다. 축산 농가 수가 줄어드는 대신 농장의 대형화 추세가 뚜렷하다. 아예 축산기업이 진출해 기존의 농가와 계약을 맺고 축산업에 간접 진출하기도 한다. 자급률이 낮은 탓에 사료 곡물은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인건비 상승으로 가축 생산비는 점점 더 올라가지만 고깃값은 제자리에 멈춰 있다. 결국 단가를 맞추는 방법은 사육 두수를 늘리는 것뿐이다. 이에 더해 도시인들도 거기에 매달리는 삶을 산다. 즐비한 삼겹살집과 치킨집은 누군가의 최후의 직장이고 한 가족의 생계다. 가급적 싼값에 고기를 사들여 많이 팔아야만 생계를 꾸릴 수 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한 지 이제 한 달여가 지났다. 좁은 국토에서 다닥다닥 기르다 보니 지역밀집도가 높아 예방적 살처분 반경에 많은 가축들이 포함되어 더 많이 죽는다. 오히려 축사 내 밀집도보다 지역 밀집도가 문제의 핵심이다. 양돈은 경기와 충청에, 양계는 호남에 집중되어 있다. 사료공장과 도축장과의 거리, 그리고 소비지 배후에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지로 되어 있는 한국의 축산업은 농촌 주민들의 고통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분뇨 냄새를 맡는 사람들도, 가축들이 죽어 나가면 살풍경을 봐야만 하는 이들도 농촌 주민이다. 기르는 곳에서 가축이 죽어 나가고 그 자리에 묻고 무덤을 매일 마주하는 이들도 농촌 주민이다. 축주는 기르는 자이기도 하고 죽이는 자이기도 하다. 가축을 돌보는 노동자 다수는 낯빛이 다른 이주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일하던 농장의 가축들이 살처분되어 일자리를 잃으면 그대로 살처분 업체의 노동자가 되기도 한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라는 장례 행렬에서 죽여보지 않은 이들의 곡소리가 상주들의 곡소리보다 더 높은 상황이 썩 흔쾌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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